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지임(之任), 호는 안분재(安分齋). 현감 홍일민(洪逸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영필(洪永弼)이고, 아버지는 경기관찰사 홍명원(洪命元)이며, 어머니는 부호군 윤민준(尹民俊)의 딸이다.
1639년(인조 17)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40년 예문관검열, 1641년 감찰, 1643년 홍산현감(鴻山縣監) 등을 지냈다. 1646년에는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어 파방(罷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발표를 취소함)되자 삭직되었다.
1648년 복직되어 정언·수찬 등을 역임하고, 1650년(효종 1) 응교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그 해 지평이 되어 영의정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였다. 또한 교리가 되어서는 당쟁(黨爭)의 무해(無害)함을 진술하다가 삭직되었다.
그러나 곧 배천군수(白川郡守)로 기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652년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사인을 지냈다. 이듬 해 교리가 되어 사노(私奴)로서 충군(充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내용의 소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한편, 효종이 옛 성인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뜻을 알고자 『서전(書傳)』에 쓰인 기형(璣衡: 천문을 관측하는 기계)을 만들어 바칠 것을 명하자, 이것을 만들어 올려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로 해서 직강·수찬이 되었으나 곧 삭직되었다. 1654년 다시 보덕에 임명되어 직강·교리를 지냈다. 1656년 금성군수(錦城郡守), 1658년 응교·사간·사인, 이듬 해 수찬·사간·사예·종부시정 등을 지냈다.
효종이 승하하자 사인 겸 빈전도감도청이 되고, 이어 교리 겸 한학교수를 거쳐 통정대부로 승진,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형조참의·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예조참의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