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직산(稷山) 출신. 아버지는 장흥부사 황세득(黃世得)이다. 지략이 뛰어나 병서(兵書)와 천문·지리에 밝았다.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명나라 사신이 왔다가 후금(後金: 뒤의 청나라)이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을 함락하여 육로가 막히자, 해로로 등주(登州)로 돌아가려 할 때 자원하여 철산거우도(車牛島)에서 출발하여 무사히 등주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1634년(인조 12) 의주부윤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노령으로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천문을 보고 청군의 내침을 예측, 군비확충을 주장하였다.
마침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의 정세규(鄭世䂓)가 이끄는 근왕병(勤王兵)에 소속되어 용인에서 전투 중 얼굴에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 숙종 때 그의 부자에 대한 정문이 고향에 세워졌고, 공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