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연꽃을 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등 4명의 나한이 배치된 간단한 형식을 취하였다.
화면 상단의 채운(彩雲)을 배경으로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이 녹색의 두광(頭光)과 화염으로 둘러싸인 신광(身光)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서 있다. 머리중간에는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가 표현되었으며 정상부에는 뾰족하게 솟은 육계(肉髻) 위에 원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장식되었다. 얼굴은 넓고 각진 사각형에 가까우며 가는 선으로 이목구비가 묘사되었는데, 활형의 눈썹, 위로 약간 치켜 뜬 눈, 작은 입 등이 특징적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그려져 있고 귀는 턱 부분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신체의 굴곡이 별로 없어 안정감이 있으면서도 당당한 느낌을 주며,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정면을 응시하며 서있는 석가모니의 모습은 영산회의 본존으로서의 위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올려 연꽃을 잡고 있고 가슴 아래에 위치한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고 있다. 옷은 화려한 문양이 시문된 붉은색의 대의(大衣)를 양 어깨에 걸친 통견(通肩)식으로 입었다. 대의의 가장자리는 녹색 바탕에 금니로 연화당초문을 시문하였으며, 붉은색 대의의 바탕에는 다양한 원문(圓文)을 금니로 시문하여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엿보인다.
좌우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화염보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두 손으로 긴 연꽃가지를 들고 본존처럼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있다. 얼굴은 본존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사각형에 가까운 편인데 턱 부분에 살이 많아 다소 비대해 보인다. 화려하게 장엄된 상내의(上內衣)와 상의(裳衣) 위에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군의(裱衣)를 걸치고 두 다리를 약간 벌리고 서있는 보살의 뒤로는 훤히 비치는 검은 망사형의 두광이 둘러져 있다. 보살 위에 작은 크기로 묘사된 4명의 나한은 채운을 배경으로 석가모니를 향해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가섭존자와 사리불(이상 향우측), 오른쪽에는 아난존자와 목건련존자(이상 향좌측)로 추정되며, 회색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친 제자들과 달리 가섭존자는 잔잔한 화문이 시문된 짙은 갈색의 가사를 걸쳤다. 제자들은 가슴과 손등에는 일일이 털을 그려넣어 실존했던 인간으로서의 제자들의 모습을 표현하려한 듯 섬세한 필치와 음영법의 구사 등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의 주조색 외에 청색과 황색, 백색, 금색 등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특히 석가모니의 대의 가장자리와 대의 전면, 보살의 천의 등에 설채된 능숙한 금니의 문양은 화려하면서도 이 괘불도의 품격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필선은 강하면서도 곧은 철선묘(鐵線描)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괘불도는 주상전하 및 왕비전하, 세자저하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며 1702년에 제작되어 경상우도(慶尙右道) 서진산(栖鎭山) 선석사(禪石寺)에 봉안되었다. 90여 명의 시주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그림을 그린 화원은 탁휘(卓輝), 법해(法海), 설잠(雪岑), 성징(性澄) 등 네 명이다. 성징은 선석사 괘불도보다 1년 앞서 제작된 상주 남장사 감로탱(1701년)에 탁휘 등 7명의 화원과 함께 참여했다. 1705년 용문사 괘불도 제작에도 참여하였는데, 용문사 괘불도는 4명의 제자가 2명으로 줄어든 것을 제외하고는 선석사 괘불도와 형식 및 양식적 특징, 심지어는 90여 명의 시주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하여, 선석사 괘불도의 초본(草本)을 기본으로 하여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수화사 탁휘는 1650년 갑사 괘불의 화원으로 참여하였고, 상주 남장사 감로탱(1701년)에 성징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 괘불도는 보통 석가의 설법 모임을 도설한 「법화경(法華經)」 서품(序品)의 광경을 장엄하게 묘사한 영산회상도와 달리 오른 팔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분홍빛의 연꽃을 잡고 있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 보현보살을 배치한 삼존불 형식에 가섭과 아난 등 4제자만을 묘사한 간략한 형식의 화면 구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석가모니가 연꽃을 들고 있는 도상은 영축산에서 세존(世尊)이 대중들에게 꽃을 들어 보이자 오직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염화불(拈花佛)이라고 부른다.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 도상은 1622년 청계사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과 1655년 법주사에서 간행된 『묘법연화경』 변상도에도 보이며, 괘불도 중에는 1705년 용문사 괘불도를 비롯하여 남장사 괘불도(1705년), 봉은사 괘불도(1886년), 개운사 괘불도(1897년)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괘불도에서 여래형의 석가모니가 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선석사 괘불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횡선과 종선의 손상 흔적이 보이며, 특히 두광부분이 많이 손상되었다.
선석사 괘불도는 18세기 초반 연꽃을 든 석가모니불 도상이 나타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괘불도로서 1702년 탁휘(卓輝), 법해(法海), 설잠(雪岑), 성징(性澄) 등 네 명의 화원에 의해 제작되었다. 화기에서도 영산회도라는 명칭이 밝혀져 있어 연꽃을 든 석가모니 도상의 성격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다른 영산회상도에 비해 비록 구성은 간단하지만, 이러한 도상은 이후 1705년 용문사 괘불도로 계승되면서 삼존불 위주의 영산회상 괘불도의 초기적 예로서 의의를 갖고 있다. 또한 조성과 관계된 화기가 상세할 뿐 아니라 괘불궤(掛佛櫃)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어 조선시대 괘불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