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천도 계획 ( )

고대사
사건
689년 신라신문왕이 도읍지를 달구벌(達句伐: 현재의 대구광역시)로 옮기려 했던 계획.
내용 요약

달구벌 천도 계획은 689년 신라의 신문왕이 도읍지를 현재의 대구광역시인 달구벌로 옮기려 했던 계획이다. 신문왕은 경주 지역의 진골귀족세력을 벗어나 새 수도 건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천도를 추진하였다. 달구벌이 후보지가 된 것은 팔공산 등 큰 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한 지리적 요건과 농경지대에다가 낙동강을 통한 물자수송이 편리하다는 경제적 측면 외에도 경주와 가깝고 왕실세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계획은 9주 5소경의 정비 이후 결정, 준비가 진행되다가 막대한 비용 부담과 진골귀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었다.

정의
689년 신라신문왕이 도읍지를 달구벌(達句伐: 현재의 대구광역시)로 옮기려 했던 계획.
역사적 배경

신문왕은 진골귀족세력을 대표하는 김흠돌(金欽突)의 난을 진압한 후 전제정치를 뒷받침하는 정치 · 군사제도를 정비하였다. 681년 10월에 시위부(侍衛府)를 개편하여 장군 6명을 두었고, 이어 국왕의 직속부대인 9서당(九誓幢)을 설치하였다. 682년에는 국학(國學)을 설치하여 관료의 양성을 통해 왕권의 세력기반을 보다 확충시켜 나갔다.

그밖에 왕족 김씨의 족내혼(族內婚) 실시, 9주(九州) 5소경(五小京)의 정비, 문 · 무 관료전(官僚田)의 시행(687)과 녹읍의 혁파(689) 등을 통해 전제왕권을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는데 뒷받침이 된 세력은 무열왕계 왕족과 김유신계, 그리고 통일 후 지배층에 새로 편입된 구고구려인, 구백제인 등 비신라계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신문왕은 이러한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689년(신문왕 9) 도읍지를 주1로 옮기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달구벌은 먼저 지리적 측면에서 천도 후보지로서 적합하였다. 첫째, 달구벌은 경주보다 광활한 지역으로서 그 주변에 분포한 팔공산 등 큰 산들이 분포해 있어 방어에 유리한 분지지역이었다. 둘째, 달구벌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방과 서남방으로 진출하기에 편리한 주요 교통로상에 위치한 잇점이 있었다.

다음으로 달구벌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천도 후보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대구지역이 농경지대로 농업생산력이 풍부하고, 내륙개발을 촉진시켜 경제적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낙동강 수계와 그 지류를 끼고 있는 수륙교통의 요충지로서 조운(漕運)을 통한 물자 수송이 편리하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이밖에도 달구벌이 신라 오악(五嶽) 가운데 중악(中嶽)인 팔공산을 끼고 있는 지역으로서 신라 중대(中代) 왕실의 세력기반과 관련이 있다는 점, 무열왕계에 대적할 만한 큰 토착세력이 존재하지 않은 점, 신 · 구 수도 상호관계에서 대구지역은 경주와 비교적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지리 ·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갖추고 있고 경주와 가까우며 왕실세력과 관련이 있는 달구벌을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이다.

경과 및 결과

달구벌천도계획은 신문왕이 685년(신문왕 5)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여 지방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끝난 뒤에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686년(신문왕 6) 정월 이찬(伊湌) 대장(大莊)집사부(執事部)중시(中侍: 侍中)로 임명하고 주2를 확대 개편한 일이 주목된다.

집사부 중시는 국가의 기밀사무를 관장한 친왕세력으로서 새 수도 건설을 기획한 실질적인 추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시 대장은 재임 중에 사망하였지만 그를 이어 원사(元師)가 천도 실패 직후까지 집사부 중시를 역임하였다. 달구벌 천도준비 시기에 중시를 역임한 대장과 원사 등은 달구벌 천도를 추진한 핵심인물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작부는 토목과 영선을 담당하는 부서로 5단계 조직, 17인으로 구성된 비교적 큰 관부였다. 예작부의 기능 확대는 달구벌 천도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달구벌 천도준비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문왕이 689년 9월 26일에 천도 공사가 진행 중이던 달구벌의 인근 지역 장산성(獐山城)을 순행한 일이 주목된다. 이때의 순행은 새 수도 달구벌 건설 공사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공사 진행을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문왕의 4년에 걸친 달구벌 천도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689년(신문왕 9)에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천도에 따른 막대한 비용 부담과, 수 백년의 연고 지역을 일시에 떠나기 어렵고, 서라벌에 오랜 토대를 가진 전통 진골귀족들의 강한 반발로 인해서였다. 현실적으로 달구벌 천도가 어려워지자 신문왕은 왕경의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하였다. 이는 신문왕이 왕경에 뿌리를 내린 진골귀족세력들과의 일정한 타협속에서 미봉적인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의의와 평가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는 무열왕계의 중대 왕실에 비판적인 전통적 진골귀족세력의 굴레를 벗어나 통일왕국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문왕은 새 수도 건설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정치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구시대를 청산하고 경주지역의 진골귀족세력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 계획은 진골귀족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결국 천도계획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달구벌 천도의 실패는 무열왕계가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지배층의 교체를 통한 정치 개혁의 후퇴를 의미한다. 또한 왕권과 전통적인 세력기반을 가진 진골귀족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기득권을 보장해 줌으로써 향후 신라의 정국운영에 적지않은 후유증을 남겼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신문왕대 천도론의 제기와 왕경의 재편에 대한 고찰」(전덕재,『신라학연구』8, 2004)
「신라의 천도 문제」(이영호,『한국고대사연구』36, 2004)
「신라의 달구벌천고 기도와 김씨집단의 유래」(주보돈,『백산학보』52, 1999)
「신라의 삼국통일과 대구의 변화」(이문기,『대구시사』1, 대구광역시, 1995)
주석
주1

‘대구’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2

신라 때에, 건축물 따위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신문왕 때 처음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 수례부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환원되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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