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우는 1905년에 서울특별시 용산구의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신학교 내에서 학생들과 만세 시위에 가담한 일로 징계를 받아 예정보다 1년 늦은 1920년 9월 18일에 종현(鍾峴, 현, 명동주교좌)성당에서 서울대목구 부주교 드브레(Devred, 兪世竣)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서품 직후 평양시 관후리(館後里)본당의 보좌 신부로 1개월간 재임하였고, 1920년 10월에 진남포(鎭南浦)본당의 제3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1921년 5월에 황해도 재령(載寧)본당 제3대 주임 신부로 부임한 후 9년간 재임하면서, 신자들의 모금으로 프랑스제 종(鍾)을 들여와 설치하였고, 성당 경내에 약 700~800평의 과수원을 조성하여 포도, 자두, 살구 등을 재배하였다.
1930년 6월부터 신천(信川)본당에서 사목하다가 1931년 5월에 해주(海州)본당의 제5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해주본당에서는 지역 개신교회의 찬양대 활동에 자극을 받아 해주고등보통학교(海州高等普通學校) 학생들을 중심으로 본당 성가대를 발족시켰다. 1935년 경기도 개성(開城)본당, 1942년 2월에 강원특별자치도 춘천(春川, 현 죽림동주교좌)본당에 부임하였다. 춘천본당에 재임했을 때에는 감목대리(監牧代理)로서 일제에 의해 연금 생활을 하고 있었던 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45년부터 4년간 경성천주공교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경리 신부로 활동하였다.
1949년 1월에는 소사(素沙)본당의 제2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임시 성당이 폐허가 되자 성당 신축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은 자재 등을 이용하여 114평 규모의 성당을 준공하고, 1954년 11월 28일에 서울대목구장 노기남(盧基南)의 주례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1955년에는 성가소비녀회(聖家小卑女會)에서 운영하는 성가보육원(聖家保育院)이 서울특별시 중구 중림동에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소사동으로 이전할 때 도움을 주었다. 이어 1956년 4월에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소녀들을 위해 소명가정기술학교(현, 소명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봉직하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지 못하는 소년들을 위한 야간학교도 개설하여 지역 사회의 청소년 교육에도 일조하였다.
교회의 구역제(區域制)를 만들어 각 구역마다 회장을 임명하였고, 초대 주임 신부인 임세빈(林世彬) 신부가 조직한 성가대의 명칭을 ‘소사가톨릭합창단’으로 바꾸었으며, 주보(週報)를 발행하였다. 1960년 10월 20일에 소사읍 소사 2리(현,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 489번지)에 성당을 신축하여 본당을 이전한 뒤 현직에서 은퇴하였다. 그 후에도 성가소비녀회 지도 신부 등으로 활동하였고, 1978년 10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