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안 ()

천주교
사건
1891년 2월 대구 지역을 선교하던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감사(慶尙監司) 민정식(閔正植)에 의해 추방당하고 신부의 복사와 통역이 아전과 군졸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며 사제관이 주민들에 의해 약탈당한 사건.
이칭
이칭
로베르 신부 사건
정의
1891년 2월 대구 지역을 선교하던 프랑스 선교사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경상감사(慶尙監司) 민정식(閔正植)에 의해 추방당하고 신부의 복사와 통역이 아전과 군졸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며 사제관이 주민들에 의해 약탈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대구교안은 1886년 조법수호통상조약(朝法修好通商條約, 일명 한불조약) 이후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까지 천주교회와 지방의 관민(官民) 사이에서 약 20년간 발생했던 수백 건의 충돌과 분쟁 사안[敎案] 중의 하나이다. 당시 호조(護照)를 가진 프랑스 선교사의 선교활동을 묵인하는 한불조약 제4조 6항, 제9조 2항 등의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서양인(西洋人)과 천주교회에 반감을 가진 대구 지역의 주민들과 이에 편승한 감사, 판관을 비롯한 아전, 군졸들이 선교사 일행을 모욕, 폭행,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교안의 피해자 로베르 신부는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로, 1876년 사제품을 받고 1877년 9월 23일 조선에 입국하여 여러 지방을 거쳐 1885년경부터 경상북도 칠곡군 신나무골(현 지천면 연화동)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1887년경에는 대구 인근의 새방골(현 대구시 서구 상리동)의 죽밭[竹田]으로 거처를 옮겨 대구부(大邱府) 전교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1887년 2월경 그의 복사를 비롯한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888년 8월 수감 중이던 허(許) 골롬바의 사건을 주교에게 보고하여 프랑스 공사의 중재로 석방시킨 사건도 있었다. 가해자 민정식(閔正植)은 고종대 외척 벌열인 여흥 민씨(驪興 閔氏) 가문 중에서도 민태호(閔台鎬), 민영익(閔泳翊), 민응식(閔應植) 등과 함께 민비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삼방파(三房派)의 인물이었으므로, 이 교안에도 불구하고 감봉 등으로 끝나 공개적인 징계를 면할 수 있었다.

경과

1890년 12월 김영옥(金永玉), 윤남출(尹南出) 등 대구 주민들이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에 침입하여 하인을 구타하였으며, 1891년 2월에는 김돌몽(金乭蒙), 신금준(申今俊), 강봉술(姜奉術) 등이 사목 방문에서 돌아온 로베르 신부를 찾아가 위협하고 사제관 주위의 죽전 신자들을 모욕했다. 1891년 2월 25일 로베르 신부가 전교회장 겸 통역인 김문일과 두 명의 마부를 대동하고 대구 판관과 감사를 차례로 찾아갔다. 판관은 병을 칭하고 만나주지 않았고, 감사도 신부는 제쳐두고 통역만 면담한 뒤, 로베르 신부 일행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성 밖으로 쫓아낼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아전들이 김문일과 마부들을 구타했고 주민들이 신부를 위협하자, 신부는 다시 감사에게 호송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호송 군졸들마저 통역과 마부를 구타했다.

3월 5일 로베르 신부가 당시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G.C.M.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서한을 작성하여 보고하자 뮈텔 주교는 3월 8일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에게 사건의 해결을 부탁했다. 3월 9일 플랑시 공사는 프랑스 외무부에 전보를 보내 보고하면서 군함 1척의 파견도 요구했다. 플랑시 공사는 외아문 독판 민종묵(閔種黙)에게 여섯 가지 조항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첫째, 해당 감사를 징계(감봉)하고 조보(朝報)에 게재하며, 둘째, 다른 지방 감사들에게도 회람장을 돌려 한불조약을 준수하도록 지시하며, 셋째, 감사 민정식이 유감을 포명하는 서신을 플랑시 공사에게 제출하고, 넷째, 사건에 연루된 병정·교졸·주민들을 수감하여 조사한 후 과실의 경중에 따라 곤장 또는 귀양의 처벌을 내리며, 다섯째, 로베르 신부를 다시 경상도로 호위해서 데려갈 것, 여섯째, 사건으로 인한 분실물을 배상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제안에 난색을 표하던 민종묵 독판은 3월 21일 프랑스 군함 아스픽(Aspic) 호가 제물포에 입항하자 위기를 느끼고 뮈텔 주교에게 중재를 요청하였다. 이와 함께 민 감사는 지방민들에게 천주교 신자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사제관에서 약탈당한 물건들도 돌려주었다. 이에 뮈텔 주교는 감사의 징계를 철회하는 대신 나머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사건을 해결하도록 플랑시 공사에게 중재하였다.

결과

1892년 3월 30일 외아문 독판 민종묵은 대구 감사 민정식을 견책하는 공문을 보냈고, 이에 민정식은 플랑시 공사에게 유감을 표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 각도의 감사들에게도 선교사를 보호하라는 회람장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향후 외국인을 학대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감사를 비롯한 해당 지방관도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한편 폭행 관련자들은 모두 귀양을 가고 분실한 물건은 교회 측에 되돌려주거나 배상해주었다. 로베르 신부는 4월 30일 호위대의 호송을 받으며 대구로 돌아갔는데, 이때 민종묵은 이미 전라감사로 옮겼고 이헌영이 신임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로베르 신부를 감영으로 초대하여 천주교회 측과의 화해를 도모했다.

의의와 평가

대구교안을 계기로, 천주교회는 한불조약에 명시된 선교사의 신변보호 및 전교활동에 대한 보장을 재확인 받았다. 뮈텔 주교는 한불조약에 규정이 없는 ‘선교사의 내지 거주권(內地居住權)’도 당국으로부터 인정받은 사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개신교의 선교사들도 8도에 게시된 포고문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진보적인 조처로 이해하면서 외국인(선교사)의 개항장 밖 부동산 매입권리가 묵인된 것으로 이해하여, 평양을 비롯한 내지로의 진출을 적극 시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뮈텔 주교일기』1(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2009)
『프랑스 외무부 문서』5(국사편찬위원회, 2006)
『프랑스 외무부 문서』4(국사편찬위원회, 2005)
『프랑스 외무부 문서』2(국사편찬위원회, 2003)
『구한국 외교문서』19(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1891년 대구 로베르 신부 사건 연구」(양인성, 『교회사연구』44, 2014)
집필자
원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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