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신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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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단체
1921년 서울 백동(柏洞)에서 샹트 오틸리안 베네딕도회가 설립하여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 및 이를 뒤이은 덕원면속구(德源免屬區) 소속의 신학교(神學校).
이칭
이칭
성 빌리브로도(St. Willibrord) 신학교
목차
정의
1921년 서울 백동(柏洞)에서 샹트 오틸리안 베네딕도회가 설립하여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 및 이를 뒤이은 덕원면속구(德源免屬區) 소속의 신학교(神學校).
개설

덕원 신학교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한 성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일명 芬道會)가 1921년 11월 1일 서울 백동(柏洞, 현 혜화동)의 수도원 구내에 설치한 소신학교(小神學校)를 그 모태로 한다. 1920년 8월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가 신설되어 베네딕도회가 담당하게 되자, 1927년 11월 신학교도 서울에서 덕원으로 옮겨 1929년 9월 대신학교(大神學校) 교육을 시작하였다. 1935년 일제 당국의 정식 인가를 받아, 1942~1943년에 비인가 신학교로 폐쇄당한 서울의 예수성심신학교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 학생들의 전입(轉入)을 받아들여 일제 패망 직전에는 학생수가 1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의 유일한 대신학교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다가 1949년 5월 북한 정권에 의해 덕원 수도원과 신학교가 몰수당하고 성직자, 수도자들이 체포당함으로써 폐교되었다.

내용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에 거점을 둔 베네딕도회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할 때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중·고등 교육을 담당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숭공학교(崇工學校)와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1920년 8월 로마 교황청이 함경남·북도와 간도 일대의 지역을 기존의 서울대목구로부터 분리하여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로 신설하고 베네딕도회에 그 운영을 위임하자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1921년 원산대목구장 사우어(Sauer, 辛上院, 보니파시오) 주교가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초대 교장은 서울 수도원의 원장이자 부주교였던 로머(Anselm Romer, 盧炳朝) 신부를, 사감은 수도원 부원장 다베르나스(Leopold d'Avernas, 羅碧宰) 신부를 임명했다. 사감의 경우 1926년 슈넬(Sebastian Schnell, 成來純) 신부가, 1937년부터는 비테를리(T.Bitterli, 李聖道) 신부가 계승했다. 1927년 10월까지 서울 백동의 신학교 건물은 기존의 숭공학교 건물을 그대로 활용하였고, 1927년 11월 신축 완공된 건물은 덕원 수도원에서 200m쯤 떨어진 곳에 2층(1938년 화재 후에는 3층으로 올림)의 U자형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중앙 건물은 14.5×26m, 측량건물은 9.5×35.5m였다. 초창기 소신학교로 시작할 때의 교과목은 라틴어와 가톨릭 교리를 위주로 하면서 물리학, 조선어, 일본어, 한문, 산수, 지리 등을 가르쳤고, 그 대상은 대부분 원산, 내평, 간도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첫해 입학생은 모두 33명으로 격년제로 모집하여 9월 초에 학년을 시작하여 이듬해 7월 10일에 수료했다. 1929년 9월 중학교를 졸업한 상급반 4명이 철학반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대신학교(大神學校) 교육이 실시되어 예비과 2년, 중학교 2년, 철학반 2년, 신학반 4년 등 총 14년의 수업연한이 확립되었다. 1935년 2월 10일 함경도청의 인가를 받으면서 예비과와 중학교를 통합하여 중학교 5년, 고등학교 2년으로 새롭게 편제함으로써 총 수업연한이 1년 줄어 13년이 되었다. 초창기 교수진은 5명의 독일인 신부, 2명의 한국인 교사, 1명의 일본인 교사 등 8명이었으나 그 후 매년 약간씩 변동되었다. 특히 전국에서 가장 많은 박사학위 취득자가 교수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신학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라틴어의 경우, 초기부터 가르쳤던 로머 교장신부를 비롯하여, 슈미트(C.Schmid, 金時練) 수도원장, 쿠겔만(W. Kugelmann, 孔樂道), 로트(L. Roth, 洪泰華) 신부 등이 라틴 교부들의 『신국론(神國論)』, 『고백록(告白錄)』등을 교재로 활용하여 가르쳤다. 철학은 슈미트, 피셔(W. Fischer, 許), 두라흐(E. Durach), 클링사이즈(R. Klingseis, 吉世東), 교리(敎理)는 슈미트, 쿠겔만, 슈넬(S. Schnell, 成來純), 교리신학은 슐라이허(A. Schleicher, 安世明), 윤리신학은 로트, 사목신학은 브란들(A. Brandl, 張仁德), 교회법은 브란들, 설교학은 콜러(E. Kohler, 景道範), 전례학과 교부학은 밀레만(H. Millemann), 교회사(敎會史)는 클링사이즈, 최병권(崔炳權, 마티아) 등이 가르쳤다. 또 독일어, 영어를 각각 쿠겔만, 조르게르(G. Sorger) 신부 등이 가르쳤고, 조선의 역사, 지리, 한문, 동양사 등은 조선인 평신도 김씨와 원요한이, 일본어는 와세다 출신 일본인이 가르쳤다. 원요한은 베네딕도회가 운영한 숭신학교 출신이었다. 세계사는 호노라트(Honorat), 성서는 슐하이허, 성서주해는 람로트(O. Ramroth), 음악은 두라흐, 노이기르그(P. Neugirg, 兪順和), 피셔 신부 등이 가르쳤다. 음악 교육은 신학생들로 구성된 관현악 밴드를 만들게 하여, 행사 때마다 지역민들을 즐겁게 하는 등 그 선교효과도 컸다. 1928년 덕원신학교 학우회가 창립되어, 회지 월간 『등대(燈臺)』를 30~40쪽 분량으로 발행했고, 신학교 교지(校誌)인 『신우(神友)』가 1933년 3월 창간되어 1939년까지 6년간 간행되었다. 1936년 연길 출신의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와 한윤승(韓允勝, 필립보)의 서품을 필두로 약 40명의 사제가 배출되었는데, 이중에는 프뢰머(G. Frommer, 權) 등 4명의 독일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덕원신학교 출신들은 원산대목구 뿐만아니라 평양·서울·연길·대구 대목구의 사제들이 골고루 있었고,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김남수(金南洙, 안젤로), 지학순(池學淳, 다니엘) 등은 훗날 각각 광주대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의 교구장 주교가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3(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함경도 천주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편, 1995)
「한국분도회의 초기 수도생활과 교육사업」(최석우, 『사학연구』36, 1983)
집필자
원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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