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부 ()

목차
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때, 신라의 파진찬, 상대등 등을 역임한 장수.
이칭
이칭
황종(荒宗), 거칠부지(居七夫智), 거칠부지(居柒夫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579년(진지왕 4)
본관
경주
출생지
신라
주요 관직
파진찬(541)|상대등(576)
정의
삼국시대 때, 신라의 파진찬, 상대등 등을 역임한 장수.
개설

일명 ‘황종(荒宗)’ 또는 ‘거칠부지(居七夫智)’ · ‘거칠부지(居柒夫智)’라고도 한다.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의 5대손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권17 계체기(繼體紀) 23년조에 등장하는 구지포례(久遲布禮)로 비정된다.

할아버지는 잉숙(仍宿), 아버지는 이찬(伊湌) 물력(勿力)이다. 잉숙은 소지마립간의 장인으로서 486년(소지왕 8) 2월에 이벌찬이 되어 국정을 총괄한 내숙(乃宿)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아버지 물력은 524년(법흥왕 11)에 건립된 울진봉평리신라비법흥왕(모즉지매금왕)과 함께 국정을 논의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전하며, 당시 그의 관등이 일길간지(一吉干支: 일길찬)였다. 후에 이찬까지 승진하였다.

거칠부는 545년 신라 왕조의 역사서인 『국사(國史)』를 편찬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쳐서 죽령(竹嶺) 이북의 10군(郡)을 빼앗아 신라 영토로 만들었으며, 진지왕(眞智王) 즉위에 공헌하는 등 신라 중고기의 중요한 대신으로서 활약했다.

생애 / 활동사항

내물마립간 계통의 왕족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나라에 큰뜻을 두고 승려가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다. 그때,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혜량(惠亮)주1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551년(진흥왕 12)에 고구려의 국경 속으로 진격했을 때 그를 맞아들여 승통(僧統)이 되게 하였다.

혜량은 황룡사에서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국태안민(國泰安民)을 기원하는 대집회를 열었는데, 이는 국가의 안위를 위하는 거칠부의 불교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545년에 왕명을 받아 널리 주2를 모아 『국사』를 편찬하였다. 이로써 국가의 위신을 높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아찬(大阿湌)에서 파진찬(波珍湌)으로 승진하였다.

또한 거칠부는 특히 군사 · 정치적인 분야에서 활동이 컸다. 551년에 대각간(大角干) 구진(仇珍), 각간(角干) 비태(比台), 잡찬(迊湌) 탐지(耽知) ·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湌) 미진부(未珍夫) 등 8명의 장군과 더불어 백제와 연합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탈취하였다. 이는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시위인 동시에 진흥왕 12년 이후의 친정체제(親政體制)를 뒷받침하는 조치였다.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즉 「마운령비(摩雲嶺碑)」와 「창녕비(昌寧碑)」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진흥왕 때 가장 영향력 있는 장군으로 정치적 비중 또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진지왕의 즉위에 어떤 구실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거칠부는 진지왕의 재위 기간에 사망하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가 78세였다. 진지왕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주3되었는데, 이는 거칠부의 사망과 관련시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아세아문화사, 1976)
「신라 중고기(新羅 中古期)의 정치과정 시론(政治過程 試論)-중대왕권 성립(中代王權 成立)의 이해(理解)를 위한 전제(前提)-」(김영하, 『태동고전연구(泰東古典硏究)』4, 1988)
「무열왕권(武烈王權)의 성립(成立)과 활동(活動)」(신형식, 『한국사논총(韓國史論叢)』2, 1977)
「대등고(大等考)」(이기백, 『신라정치사회사연구(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一潮閣), 1974)
주석
주1

학문이나 도리에 관한 주제를 토론하고 설명함.    우리말샘

주2

학문으로써 세상에 자신의 자리와 지위를 확고하게 세운 선비.    우리말샘

주3

왕이나 왕비 등의 자리를 폐함.    우리말샘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