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1999. 예명은 후라이보이. 경기도 안성 태생으로 서울음악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음대의 전신)를 졸업했다.
한국전쟁기였던 1951년에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 군예대에 복무하며 '플라이보이 스윙밴드'를 조직했다. 같은 해 서울 명동의 은성 뮤직 살롱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특히 1957년 「박단마(朴丹馬) 그랜드 쇼」에서 선보인 재치 있는 입담의 원맨쇼와 더불어, 기관총 발사, 함포사격, 비행기 폭격 등의 성대모사 재주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널리 알려졌다.
1970년대 후반까지 코미디 연기와 무대 · 방송 · TV 등의 사회자로 활약하였다. 영화의 출연도 적지 않았는데 그의 스크린 데뷔작은 1959년 정창화 감독의 「후라이 보이 박사 소동」이라는 넌센스 코미디이다. 로켓설계자로 유명한 허박사가 실종되면서 현상금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가짜 소동 이야기로 1인 2역을 맡았다.
‘후라이 보이’란 원래 플라이 즉 나른다는 뜻의 일본식 발음으로 구전되어 엉터리와 거짓말의 대명사가 되었다. 무한한 창공을 날아 보겠다는 소년의 꿈이 공군복무라는 형식으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잇달아 「청춘일기」 · 「복도 많지 뭐유」 · 「고바우」(1959) · 「후라이 보이 논산훈련소에 가다」(1960) · 「서울의 지붕밑」 · 「비단이 장사 왕서방」 · 「이별의 부산정거장」(1961) · 「특등신부와 삼등신랑」 ·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1962) · 「남편은 바람둥이」(1963) · 「청춘사업」(1965) 등에 출연하였다.
그의 연기는 정통적인 악극 · 신파 계열의 배우들과는 달리 서구적인 풍자가 특징으로, 1960년대 초 KBS라디오 고정프로 「막박사, 후박사」의 공동 진행을 맡으면서 컴비가 된 막둥이 구봉서와 경쟁 관계였다.
그 대표적인 영화로 바람기 많은 식품회사 사장의 탈선을 저지하려는 비서의 행각기 「남편은 바람둥이」(박성호 감독)와 두 명의 실업자가 각기 사랑에 빠지면서 여자의 도움을 받는 「청춘사업」(심우섭 감독)등이 꼽힌다.
이후 1964~1975년까지 70년대 쇼의 대명사가 된 TBC(동양텔레비전)의 주말 프로그램 「쇼쇼쇼」에서 그는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진행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1974년에는 구봉서, 신영균과 함께 연예인교회(현 예능교회)를 설립하였다. KBS 「후라이보이 은퇴 특집쇼」(1981)를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신앙생활에 전념, 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