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7년 9권 4책의 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되었다.
정도전(鄭道傳)에서부터 권필(權韠)에 이르는 조선의 대표적 시인 35명의 다양한 시체(詩體)의 작품 888수를 수록하고, 편말(篇末)에 「허문세고(許門世藁)」를 싣고 있다.
이 시 선집(詩選集)은 오랫동안 발간되지 못하다가 허균(許筠, 1569~1618) 사후(死後) 80년이 지난 뒤, 숙종 때에 이르러 박태순(朴泰淳)이 다시 편집 · 간행하였다. 1695년에 쓴 박태순의 서문(序文)에는 '숙종 21년'이라는 간기(刊記)가 있다.
홍만종(洪萬宗)의 『시화총림증정(詩話叢林證正)』에 “박태순이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있을 때 허균이 편찬한 『국조시산』을 간(刊)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간행 연도는 그가 광주부윤으로 재직한 1697년으로 추측된다.
현재 이본(異本) 몇 종류가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나, 이들은 선집 중의 고시(古詩)와 잡체시(雜體詩)를 싣지 않았거나, 편말의 「허문세고」가 빠져 있는 것들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도서관에서 발견된 『국조시산』은 필사본(筆寫本)으로 9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책 첫 장의 하단에 ‘교산(蛟山)’이라는 허균의 호(號)를 새긴 주문방인(朱文方印)이 날인된 허균의 수택본(手澤本)으로, 현재 목판본과 비교했을 때 비평(批評)이나 편차(編次) 등 많은 부분이 차이가 있다. 궁중사자관(宮中寫字官) 이해룡, 송효남, 이희철, 신여탁, 이경량, 이유생 등이 필사자로 참여하였다.
박태순의 서문에서는 허균의 『국조시산』과 저술(著述)들이 허균의 죽음 이후 거의 인멸되기에 이르렀고, 혹 호사가(好事家) 가운데 허균의 저술을 수록하여 둔 자가 있어도 밖으로 드러내기 좋아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태순은 “사람은 폐(廢)할지언정 그 모은 바[所集]는 폐할 수 없음을 절감하고, 또 많지 않은 우리나라 시 선집 가운데도 가장 뛰어난 이 선집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널리 여러 책[諸本]을 구하고 증거와 교정[證正]을 가하여 여러 권으로 찬집(纂集) · 간행한다.”고 하였다. 박태순은 이로 인하여 그 뒤 1699년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에 전라도 유생들로부터 규탄(糾彈)받아 경기도장단부사로 좌천(左遷)되었다.
박태순이 목판본으로 간행한 『국조시산』은 시의 형식 및 문체에 따라 권차(卷次)를 구분하고 있으며, 동일한 형식과 문체에 속한 시들을 시대순으로 배열하였다. 각각의 시 작품 별로 저자의 약력(略歷)을 기재한 다음 시제(詩題)와 시 본문의 순으로 배치하고, 시마다 ‘비(批)’와 ‘평(評)’을 붙였다. ‘비’는 주로 개별 작품의 전체적인 감상평이나 배경을 언급하고 있으며, ‘평’은 특정 구절의 감상평을 주로 언급하였다.
권 1에는 오언절구 49수(34인), 권 2에는 칠언절구 147수(53인), 권 3에는 칠언절구 69수(60인), 권 4에는 오언율시 153수(58인), 권 5 · 6에는 칠언율시 116수(41인), 권 7에는 오언고시 56수(29인), 권 8에는 칠언고시 35수(22인), 권 9에는 잡체시 42수(6인) 등이 실려 있다.
『국조시산』 이전의 시 선집으로는 조선 초기의 시 선집인 『청구풍아(靑丘風雅)』와 『동문선(東文選)』 등이 있다. 『국조시산』은 『동문선』 이후 우리나라의 한시가 크게 떨쳤던 조선 중기의 시 선집으로서 자료사적으로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이 선집에는 금체(今體)에서 고조장편(古調長篇)과 잡체(雜體)에 이르기까지 가구(佳句)와 절조(節調)마다 편자의 비와 평이 붙어 있다. 이것은 선시(選詩)의 작업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비평사에 있어 실제 비평의 선구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국조시산』은 작자 또는 시작(詩作)과 유관한 제영(題詠)이나 고실(故實)을 역대의 시화만록(詩話漫錄)에서 찾아 보주(補註)를 붙이고 있다. 이것은 고본(稿本)을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박태순 자신이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허균과 동시대인의 저술인 양경우(梁慶愚)의 『제호시화(霽湖詩話)』,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이 보주 가운데에 보이기 때문이다.
『국조시산』에 실현된 실제 비평의 성과는 우리나라 비평사상 매우 소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후대의 소인묵객(騷人墨客)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특히 시화(詩話)와 비평서에서 많이 인용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여 주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그의 『종남총지(終南叢志)』에서, 『국조시산』 속에 선입(選入)된 정호음(鄭湖陰)의 「후대야좌시(後坮夜坐詩)」 한 연에 대한 허균의 비평을 통하여 허균의 수준 높은 감식안(鑑識眼)을 재확인하고 있다. 홍만종은 그의 『시화총림증정』에서 “여타의 선집들은 모두 그 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오직 『국조시산』만은 이식(李植)을 비롯한 제공(諸公)들이 모두 잘 뽑았다고 한다. 이 시 선집이 널리 세상에서 읽힌 까닭도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김만중(金萬重)도 우리나라에서 비평가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성현(成俔)과 신흠(申欽), 그리고 허균뿐이라 하였다.
책 끝에 붙은 「허문세고」는 시우(詩友) 권필에게 양천허씨(陽川許氏) 일문(一門) 중에서도 허침(許琛)을 비롯하여 허균의 아버지 허엽(許曄)과 허균의 형 허봉(許篈),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許蘭雪軒) 등 6인의 시를 시체에 따라 품평하고 선발하게 하여 편집 · 수록한 것이다. 아세아문화사에서 1980년에 『국조시산』을 『청구풍아』와 합본하고 영인(影印)하여 『한국한시선집』 제6권으로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