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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남(金秀南)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시대 감찰, 동지사 서장관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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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서원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조선시대 감찰, 동지사 서장관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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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일(汝一), 호는 만치당(萬痴堂). 김영산(金永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익겸(金益謙)이고, 아버지는 김섭(金燮)이며, 어머니는 양희열(楊希悅)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610년(광해군 2)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서인으로서 대북(大北)에 반대하여 두문불출하다가, 162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감찰 등을 지냈다.
1630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도로 피란하였으나, 그곳에 적군이 침입하자 홍명형(洪命亨)과 같이 김상용(金尙容)을 따라 남루(南樓)에 올랐다.
김상용이 순절하려고 여러 사람을 물리치고 김수남에게 말하기를, “벼슬의 질서에는 높고 낮은 분별이 있으나 신하로서 다 같은 점은 나라를 위하여 죽고자 하는 뜻에 있는 것이다. 내가 그대와 같이 죽으면 유감이 없겠다.”하니, 김수남은 “사국(死國)의 두 글자는 남아로서 정해진 바이니, 나라의 일이 이에 이르렀는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후일에 바라는 바는 오직 내 두 아들이 어머니를 위로하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겠다.”라고 쓴 유서를 노복에게 주어 처에게 전하게 하고 김상용과 함께 남루에서 분사(焚死)하였다. 뒤에 공조좌랑·승지에 추증되었다.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은진의 금곡사(金谷祠)에 제향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조계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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