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추 ()

강진 김억추 신도비 정측면
강진 김억추 신도비 정측면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전라수군절도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방로(邦老)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8년(명종 3)
사망 연도
1618년(광해군 10)
본관
청주(淸州)
출생지
전라도 강진(康津)
주요 관직
전라수군절도사|제주목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시대 전라수군절도사, 제주목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방로(邦老). 전라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김충정(金忠貞)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제주판관(濟州判官)·사복시판관 및 진산·순창·초산 등의 현감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평양으로 파천하자, 방어사로서 허숙(許淑) 등과 함께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지켰다.

이 때의 공으로 일시 안주목사에 발탁되었으나, 허위보고를 하고 군율을 어겼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당하였다. 이후 계속 주사장(舟師將)으로 대동강을 지키다가, 여주목사가 되었으나, 맡은 직무를 잘못 처리하여 교체되었다.

1594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탐비(貪鄙: 탐욕스럽고 비루함)하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또 교체되었다.

다음 해에 다시 만포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진주목사로 승진되었지만 무능한 무관이 큰 고을의 목민관이 될 수 없다는 대간의 반대로 고령진첨절제사(高嶺鎭僉節制使)로 교체되었다.

1597년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전사한 이억기(李億祺)의 후임으로 전라우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일시 부장 겸 조방장(副將兼助防將)으로 명나라군에 배속되기도 하였으나, 이후 주로 전라수군절도사로 활약하였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밀양부사를 거쳐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상좌병사가 되었다가 3년 후에 제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