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희중(羲重). 김균강(金允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하상(金夏祥)이고, 아버지는 용양위호군(龍護衛護軍) 김양(金壤)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경기(慶祁)의 딸이다.
1588년(선조 2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가 되었다. 곧,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차례 공조좌랑·세자시강원사서 겸 기주관(世子侍講院司書兼記注官)을 지냈다. 1601년 지평(持平)에 이어 형조·예조정랑을 역임한 뒤 순검어사로 두 번이나 용만(龍灣)에 갔으며, 경차관(敬差官)으로 경기 지역에 나아가 민정을 살폈다.
1604년 어사로 충청도에 나가 자연재해로 입은 농작물 피해상황을 돌아본 뒤, 임천군수 이신의(李愼儀), 서천군수 성계선(成啓善), 연기현감 신경락(申景洛), 이산현감 송영조(宋榮祚), 보은현감 송해(宋垓), 서산군수 임취정(林就正) 등을 중앙에 보고하고 선정을 치하하였다.
이듬해 공주판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성심껏 직무를 수행하여, 공주를 떠난 뒤에도 관리와 백성들이 김정일을 추모하였다. 1608년 호조정랑·함경도도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