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장성 ( )

남해장성
남해장성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에 있는 조선시대 목장성. 시도기념물.
이칭
이칭
금산(곶) 목장, 금산 목장성, 동천 목장성, 금산장 목장, 남해 금산 목장성
유적
건립 시기
조선시대
관련 국가
조선
관련 단체
경상남도
높이
2m
둘레
15km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115번지 일원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경상남도
종목
시도기념물(1996년 3월 11일 지정)
소재지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 신전리 115번지 일원
내용 요약

남해 장성(南海 長城)은 경상남도 남해 금산에서 지족리 수장포와 물건리 대지포 구간에 걸쳐 ‘팔(八)’자의 형태로 축조된 조선 전기의 동천 목장성이다. 목장성은 섬이나 바다로 돌출한 반도상의 지형을 차단하여 말을 기를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다. 동천 목장성은 조선 단종 연간에 초축되었으며, 이후 금산 목장에 편입되었다. 이 목장성이 장성으로 불린 까닭은 성의 둘레가 15km로 여타의 성들보다 둘레가 훨씬 길었기 때문이다. 이 성은 임진왜란 때 일시적으로 관방성의 역할을 하였고, 동천 주변에서는 일시적으로 경작도 이루어졌다.

정의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에 있는 조선시대 목장성. 시도기념물.
건립 경위

마정(馬政)주11은 고려시대에는 전목사, 조선시대에는 사복시를 설치하여 담당하도록 하였을 만큼 왕실의 중요한 주1 조선시대 단종 연간에 의정부에서 전라도 강진현 계참곶(界站串), 경상도 동래현 석을포(石乙浦), 남해현 금산곶(錦山串)에 목장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이 주2 주3, 주4에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임진왜란 이후 금산에 목장이 다시 설치되는데, 동천곶에 사복시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목장 지도」에 남아 있다. 동천은 금산에서 동쪽 바다로 흐르는 하천으로 1872년 「지방 지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지도에 나오는 금산 목장성은 주14를 중앙에 두고 팔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중간에는 문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금산 목장성의 위치는 남해 장성이 확인되는 구간과 주5 「여지도서」에는 동천곶 목장을 폐지하였다고 주6 『대동지지』에는 금산곶 목장과 동천곶 목장이 모두 남아 주7 조선 후기에 들어 동천곶 목장의 치폐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경상도여지집성』을 보면, 태복시에서 동천(凍川) 땅을 점유하여 말을 길렀는데, 이 일이 백성들에게 해가 되자 동천의 목장을 창선 목장으로 돌렸다고 주8 1705년(숙종 31) 남해 이동면 난곡사 앞에 건립된 관방성비에는 '난포에서 유천까지 돌로 만든 일자성은 왜적을 막은 관방성으로, 1657년(효종 8) 태복시가 그곳에 있던 전답을 점유하면서 이 성을 마성이 아니라 관방성으로 인정하여 비를 세우게 된 것'이라 기록되어 주9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남해 동천 목장에서도 백성들이 상당 기간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북벌을 계획한 효종이 군마를 육성할 곳으로 도서와 황무지에 목장을 설치하면서 조선 전기에 운영되던 금산장 목장은 다시 조정의 목마장(牧馬場)으로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이전까지 이 일대에서 전답을 경작하던 농민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에서 조선 전기 목장성의 일부가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관방성으로 전용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갈 곳 잃은 김해와 거제의 백성들을 흥선도로 보내 농사를 짓고 살게 함으로써 주15도 충족시켰음을 짐작할 수 주10

형태와 특징

남해 장성은 남해 금산에서 지족리 수장포와 물건리 대지포 구간에 걸쳐 ‘팔(八)’자의 형태로 축조된 긴 주16으로 그 끝이 바다에 닿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아 있는 석축의 길이는 총 15km에 이르며, 높이는 1~2m 내외이고 폭은 대체로 2m를 넘지 않게 주17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남해 장성은 30~50cm 내외의 주13 자연 주12을 이용하여 석재를 옆으로 뉘어 품(品)자의 형태로 쌓아 올렸다. 이렇게 장방형의 자연석을 협축의 방식으로 쌓아올린 수법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사용된 축조 수법이다.

남해 장성은 논과 밭 주변의 성벽이 많이 훼손되어 성의 형체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임야 안에 있는 석축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남해 금산 보리암 뒷산으로 오르는 주18 주변에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석축이 남아 있다.

의의 및 평가

남해 장성은 조선 단종 연간에 설치된 금산곶 목장성이다. 조선 후기 「목장 지도」에는 동천곶 목장을 폐하고 금산 목장을 종전 55리에서 100리로 늘려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목장성을 남해 장성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남해 금산 목장성으로 불러야 한다.

참고문헌

원전

『단종실록』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목장지도』
『여지집성』
『조선왕조실록』
『1872년 지방지도 남해』

단행본

남해문화원, 『남해금석문총람』(2016)
남도영, 『한국마정사』(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논문

나동욱·이철영, 「울산 남목마성에 대한 고찰」(『한국성곽학보』 17, 2010)
홍성우·김재영·강영수, 「남해 흥선목장의 공간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야외고고학』 17, 2013)
주석
주1

남도영, 1996,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주2

단종실록 7권, 단종 1년 7월 21일 ○丙子/議政府據三道都體察使啓本啓曰: "全羅道 康津縣 界站串周回九十里, 土山肥厚, 水草俱足, 可放馬一千匹。 慶尙道 東萊縣 石乙浦寬闊, 可放馬二千餘匹。 南海縣 錦山串周回九十里, 土膏水足, 雖當冬月草不枯, 可放馬三千匹。 請令點馬別監發旁近諸浦當番船軍, 築牧場。" 從之。

주3

慶尙道屬撰地理志 晉州道 南海 牧場 在縣東錦山串 周回五十五里一百二十一步四尺 入放馬三百四十四匹 水美草惡

주4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一 慶尙道 南海縣 山川 凍川串。在縣東三十里。周五十五里。有牧場。

주5

牧場地圖 慶尙道 九邑二十三牧場內設場六處 南海縣一牧場設屯 廢 凍川串 錦山場 周回一百里 在縣東二十五里 場內有凍川串 本寺設屯

주6

輿地圖書 慶尙道 南海 山川 凍川串在縣東三十里周五十五里有牧場今廢 牧場 無 分養馬一匹每年八月受 來翌年四月上納本寺

주7

大東地志 南海 牧場 錦山串場 凍川串場

주8

輿地集成 山川 凍川 在縣東二十五里 源出錦山 東入于海 丁酉歲 基地爲太僕所占 牧馬于此 生民胎害不貲矣 縣士鄭周章 高大鳴等 上疏蒙 允 還放于昌善牧 己未年 元田移屬龍洞 官加耕 太僕收稅馬

주9

임종욱, 2016, 관방성비, 남해금석문총람, 남해문화원.

주10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0일 기묘 備邊司啓曰: "今日之勢, 處處糧穀殫竭, 兵連不解, 而百無可濟之策。 頃者全羅水使李舜臣, 請於海島爲屯田, 此甚經遠之慮。 假使所得不優, 而猶可以減內地轉運之弊。 聞慶尙道 晋州 興善島牧場, 土地沃饒, 宜稷粟, 而舟師諸將, 方在閑山島, 遮其前。 若於今年措置, 令牧子及流民, 與金海、巨濟等處, 歸順出來, 無所於歸者, 入處其中, 出南海、昆陽、晋州等處今年官糴所捧種子, 使之勤力耕作, 則非徒成熟之後, 足資軍食, 民之失所者, 亦有資生之理。

주11

말의 사육, 개량, 번식, 수출입 따위에 관한 행정. 우리말샘

주12

구조물의 기초에 쓰이는 깬돌. 1개의 중량이 10~100kg로 여러 종류가 있다. 우리말샘

주13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14

꼬불꼬불한 갯벌. 우리말샘

주15

군대의 양식. 우리말샘

주16

돌로 쌓아 만드는 일. 우리말샘

주17

성을 쌓을 때, 중간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에서 돌을 쌓는 일. 우리말샘

주18

‘임산 도로’를 줄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의도(한국성곽학회)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