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균(盧鍾均, 1894~1939)은 황해도 안악군 출신으로, 이명은 양동오(楊東五) · 백운서(白雲瑞) · 김동우(金東宇) · 김동우(金東愚)이다.
1921년 『 동아일보』 안악지국 판매부장으로 있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 홍완기가 국내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사실을 알고 구출하려다 실패하면서 11월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김구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지원 군자금 횡령 혐의로 지목받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장 김립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 · 신규식 등이 무력 기반 강화를 위해 조직한 한국노병회의 추천으로 두 달 후인 12월에 베이징〔北京〕 학병단으로 파견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오다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출옥 후 1926년 상해대한교민단 의경대장 및 병인의용대 간부로 활동하면서 김구의 절대적 추종자임을 자임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이봉창 의거 등 특무 활동에 관여하였다. 1933년 봄 김구는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군관학교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1934년 2월에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자리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이곳에서 한인 학생들을 관리하면서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에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군특무대를 조직하고 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1935년에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안공근과의 갈등으로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 후 비밀결사 맹혈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에 나서는 한편 조소앙, 박창세 등이 주도하는 재건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상하이에서 친일파인 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을 처단하는 등 특무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12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해주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39년 6월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