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균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양동오(楊東五), 백운서(白雲瑞), 김동우(金東宇), 김동우(金東愚)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4년
사망 연도
1939년
출생지
황해도 안악군
주요 경력
한인애국단원|한국독립군특무대 중대장 및 조사부장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95)
내용 요약

노종균은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 휘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장인 김립을 처단하고, 한인애국단 결성과 운영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특무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설치된 한인특별반 학생들의 관리를 맡았다.

정의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노종균(盧鍾均, 1894~1939)은 황해도 안악군 출신으로, 이명은 양동오(楊東五) · 백운서(白雲瑞) · 김동우(金東宇) · 김동우(金東愚)이다.

주요 활동

1921년 『 동아일보』 안악지국 판매부장으로 있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원 홍완기가 국내에서 활동하다 붙잡힌 사실을 알고 구출하려다 실패하면서 11월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김구의 명령에 따라 모스크바 지원 군자금 횡령 혐의로 지목받고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비서장 김립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22년 10월 김구 · 신규식 등이 무력 기반 강화를 위해 조직한 한국노병회의 추천으로 두 달 후인 12월에 베이징〔北京〕 학병단으로 파견되어 군사훈련을 받고,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오다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출옥 후 1926년 상해대한교민단 의경대장 및 병인의용대 간부로 활동하면서 김구의 절대적 추종자임을 자임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1년 김구와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이봉창 의거 등 특무 활동에 관여하였다. 1933년 봄 김구는 주1〔蔣介石〕와 만나 중국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군관학교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여 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활동을 펼쳤다.

1934년 2월에 중국 하남성 낙양에 자리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조직되자, 이곳에서 한인 학생들을 관리하면서 입교 희망생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2월 하순에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독립군특무대를 조직하고 중대장 및 조사부장에 선임되었다.

1935년에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안공근과의 갈등으로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 후 비밀결사 맹혈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에 나서는 한편 조소앙, 박창세 등이 주도하는 재건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상하이에서 친일파인 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을 처단하는 등 특무 활동을 전개하다가, 1937년 12월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해주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1939년 6월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2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조범래, 『의열투쟁2-한인애국단』(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기타 자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3, 35(국사편찬위원회, 2009)
주석
주1

중국의 군인ㆍ정치가ㆍ중화민국의 총통(1887~1975). 이름은 중정(中正). 쑨원(孫文)에게 배웠으며,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관이 되어 북벌(北伐)에 성공하고 난징(南京) 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항일전에 힘썼으며, 헌정(憲政)하의 초대 총통에 취임하였으나 중공과의 전투에 패하여 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겼다.    우리말샘

주2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정인(춘천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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