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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農村)

촌락개념용어

 도시와 구별되는 사회지리적 공간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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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화된 농촌
분야
촌락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도시와 구별되는 사회지리적 공간으로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
키워드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인류의 문명은 사람들이 일정한 장소에 거주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비롯되었다. 경작을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식량 생산은 원시적 농촌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의 역사는 문명적 존재로서의 인류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되고, 상품 시장이 발달하면서 농촌과 도시의 분리가 일어났다.
사회과학적 개념으로서의 농촌은 도시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농촌-도시 관계는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초기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나는 농촌 인구의 유출과 도시로의 인구 유입은 산업 노동자 계층 형성의 핵심적인 조건이었다. 자본주의 발전은 경제적으로 농업과 공업의 분업구조를 만들어냈으며, 지리적으로는 농촌과 도시의 분화를 낳았다.
따라서 농촌과 도시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노력들이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는데, 농촌과 도시 관계는 보는 시각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이해 방식이 있다. 첫째, 이분적 접근은 농촌과 도시를 확연히 이질적이고, 독자적인 사회적 공간으로 본다. 둘째, 연속적 접근은 퇴니스(Tönnies)의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Gesellschaft)로의 변화라는 연속적 개념에 주목하는 것이다. 셋째, 공생적 접근은 농촌과 도시를 상호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살펴보려는 접근방식이다.
이념형으로서의 농촌과 도시는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회학자들은 농촌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인구, 직업유형, 문화적 특성의 세 가지 차원을 주로 활용한다. 첫째, 일반적으로 농촌은 도시보다 인구의 규모가 작으며, 인구 밀도도 낮다. 둘째, 농촌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민들이다. 즉 농업이 생계수단이자 생활양식이다. 반면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공업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셋째, 농촌은 도시와 비교할 때, 익명성이 낮으며, 분업체계도 낮지만, 주민의 동질성은 높다.
정책 차원에서 농촌은 주로 행정단위를 활용해서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인구 50,000명 이하의 읍·면·군을 농촌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행정적 구분은 때로 이질적인 문화적 특성을 가진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95년부터 시작된 도농복합도시이다. 이 때문에 하나의 도농복합도시 안에 구/동과 군/면이, 그리고 도시적 특성과 농촌적 특성이 병존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변천
영역닫기영역열기1. 전통시대의 농촌
전통사회는 농업 의존적인 사회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작지를 중심으로 한 농촌 마을에 거주했다. 농촌 마을은 거주지일 뿐 아니라 노동력의 협력적 사용을 위한 기본 단위였다. 지역사회의 통합과 효율적인 농업 생산을 위한 제도들이 발달했는데, 그것들이 바로 품앗이, 두레, 계 등이다. 농촌에서 발달한 경제-문화적 제도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과 지역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혈연을 강조하는 집성촌이 많았던 것은 우리 전통 농촌의 특징이었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나라 원시 농촌의 발생을 서기전 3000년에서 서기 4세기 사이로 보기도 하며, 그 근거로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과 경상남도 김해 조개더미 등의 유적을 제시한다.
삼국시대의 국가 제도 완비, 인구의 증가, 촌락의 성장 등은 농업 생산력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백제의 경우 1세기 초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으며, 누에를 치고, 베를 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농촌의 발달은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벼농사의 도입은 가용 식량의 급속한 증가를 가져와 인구 증가에 크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69년 9주 5소경 105군 201현이었던 통일신라의 행정구역은 757년에는 117군 293현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군과 현의 증가는 농업 생산성과 인구 증가의 증거이며, 이에 따라 촌락규모가 팽창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왕조는 성립 이후 보다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촌락에 대한 통제도 이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고려 전기의 대표적인 토지제도는 전시과(田柴科)인데, 이는 관료, 서리, 향인, 군인 등 국가의 공역(公役)에 대한 보상으로 일정한 전시를 지급하여 생계를 보장하고, 사회체계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제도이다.
고려 중기 이후 무신정권에 접어들어 전시과 제도는 와해되고, 대규모 농장을 기반으로 한 장원제도가 자리 잡았다. 장원은 농장(農莊)·전원(田園)·전장(田庄)·별업(別業)·별서(別墅)라고도 불리며, 귀족이나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사전을 의미한다. 장원은 12세기 후반부터 빠르게 증가하여 13세기 후반 고려 말기에 이르면 전국 토지 대부분이 장원 안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원의 확대는 조세 부역의 감소를 가져와 고려의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였으며, 결국 고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은 성립과 동시에 왕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지방 귀족들의 농장을 몰수, 전국의 토지를 왕에게 귀속시켰다. 이를 통해 지방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해체하고, 왕권 강화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과전제(科田制)를 실시하고, 군현제도를 강화하였다. 과전제도는 경작하는 농민들의 지위를 격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세습이 허용되는 공신전, 수신전, 휼양전이 증가하면서 토지의 절대적인 부족 현상이 나타나 과전제는 위기에 처했다. 15세기 후반 세조 때부터는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가 지급되는 직전제(職田制)가 실시되었다. 생산성이 증가되고,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 욕구가 증가하면서 양반지주들에 의한 토지 독점이 심화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토지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전쟁과 사회혼란은 농촌의 지주와 소작농의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켰고, 많은 농지가 소수의 양반층에 집중되면서, 기존의 직전제는 유명무실해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 이앙법 등 농업기술의 발달은 광작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토지 소유구조의 변화가 이뤄졌다. 17세기 이후 지주제가 확대되고, 광작농이 농지규모를 넓혀가면서 자작농이나 작인층이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토지의 소유와 매매가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부농 10%가 전체 농지의 43%를 소유하는 토지 집중화가 나타났다. 조선 말기에는 신분제가 흔들리면서 토지소유와 신분 관계 간의 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일부 양반층은 몰락한 반면 일부 평민들이 부농으로 성장하기도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지배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통치제도들이 마련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제도가 향약이다. 조선 16세기 후반 이후 향약이 안정화되면서 사족-하인(평민, 노비)이라는 신분질서와 지주-소작 관계라는 계급관계가 정착되었다. 향약은 사회규범을 지키지 않은 자에게 제재를 가함으로써, 농촌의 질서 유지와 통제 기능을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향약은 유교적 규범과 권위를 바탕으로 신분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조선시대 농민들의 협동적 질서를 보여주는 제도는 계이다. 지역적·혈연적 상호 협동조직인 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로 자연부락 대부분에는 동계(洞契) 또는 촌계(村契)가 있었다. 또 조선 중기 이후부터 혼상갑계(婚喪甲契), 공계 (貢契), 군포계 (軍布契) 등이 성행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민들의 경제적 상호부조를 위한 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일제강점기의 농촌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는 한반도의 농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 초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일본은 심각한 식량위기를 겪었으며, 도시 근로자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일본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났던 식량 문제 해결과 일본 농민들에 대한 농지 제공이라는 틀 속에서 조선에 대한 농촌 재편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10년부터 조선에 대한 대대적인 토지 조사사업을 실시했다. 토지조사 사업은 경제적 수탈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이를 통해 일본인 정착의 물적 토대를 만들었으며, 일부 조선 양반 계층을 식민지 지주로 포섭하였다. 또 수백만의 농민을 영세소작인으로 전락시켰으며,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 계급이 형성되었다. 일제에 의해 재편된 토지 관계는 기존의 지주-소작 관계를 더욱 심화시키는 식민 주변부적 착취 방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토지 집중화는 결과적으로 약 4%의 지주가 65%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의 80%가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사회체계를 낳았다.
이러한 토지제도의 변화는 농촌 공동체의 사회관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는 농촌 주민의 협동 노동제도인 동(洞) 두레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계는 일제시대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1938년의 조사에 따르면, 상호부조, 금융, 산업 진흥, 오락 등 총 480종에 달하는 계가 있었으며, 그 중 상호부조용 계가 조직수나 참여자 수에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현대의 농촌
광복은 한반도의 소작농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농민들은 극도로 착취적인 지주-소작 제도의 폐해와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특히 북한에서 이뤄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농지개혁은 남한 소작 농민들의 기대 수준을 상승시켰다.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은 지주-소작관계를 해체하고, 농민적 토지소유를 공고히 하여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확립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1945년 미군정은 일제가 점유하고 있던 귀속농지의 분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전체 농지의 13.4%에 해당하는 귀속농지가 경작자에게 매각되었다. 귀속농지를 제외한 일반농지에 대한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 실시되었다.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이 제정·공포되었지만, 농지개혁은 지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 농지개혁은 한국전쟁 이후 사회적 격변을 겪으며 「농지개혁사업정리에 관한 특별법」 공포와 더불어 1968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농지개혁법에 의해 분배된 농지는 1945년 말 소작지 면적의 41.8%에 해당하며, 농지를 분배받은 농가는 167만 1370호로 전체 농가의 76.9%였다.
농지개혁은 자본주의적 소농체제를 만들어냈다. 농촌계층의 동질화가 이뤄졌으며, 영세 자영농들은 보수층으로 자리 잡으면서 집권 여당의 정치적 지원세력이 되었다. 농지개혁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가족농은 현재까지 한국 농촌을 유지하는 주축 농민이다. 그러나 평균 경지면적 1ha 미만의 영세한 농지를 가진 자영농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특히 정부가 수출지향적 산업화 전략을 채택하고, 저임금-저곡가 정책을 펼치면서 농민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농가경제의 궁핍화는 다수의 젊은 인구를 밀어내는 배출요인으로 작용했다.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인구는 도시의 산업 예비군으로 저임금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가 심화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는 이중곡가제와 새마을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농공간의 소득 격차가 심화되자 정부는 농민들에 대한 곡물 수매가격 인상이 필요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출지향적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저임금·저곡가 정책 역시 필요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1969년산 보리와 쌀에 대해 처음 이중곡가제를 실시하였다. 생산자에게는 높은 수매가격을, 소비자에게는 낮은 가격을 책정했던 것이다. 1970년대 이중곡가제는 농가소득 증대와 저곡가 유지라는 정책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했지만, 누적되는 천문학적 적자로 인해 지속될 수 없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 농촌 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1년 새마을운동 부서가 내무부, 농수산부, 상공부, 문교부 등에 만들어져 전국적인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요 사업으로는 농촌주택 개량, 농가소득 증대, 새마을운동 정신의 생활화 등을 꼽을 수 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며, 아직 학계에서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농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농업 경쟁력을 제고시켜 농촌 근대화에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반면 주택개량 사업 등 외형변화에 주력하여 실제 농촌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적으며, 농민을 통치하려던 정부의 정치 전략으로 보는 평가도 있다.
1980년대에 들어 농촌은 더욱 피폐해졌다. 농산물 수입이 증가하고 추곡수매가가 동결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수준은 악화되고 불만은 높아졌다.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한 한국에 대한 농산물시장 개방 압력도 높아졌다. 결과적으로 1986년 18억 달러였던 농산물 수입이 1990년에는 37억 달러로 늘어났다.
열악한 농촌의 현실 속에서 1980년대 이후 농민운동이 이어졌다. 1984년 9월 함평과 무안 지역 농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농축산물 수입 금지를 요구했다. 이어 1985년 고성에서 소 값 폭락에 항의하는 ‘소몰이 투쟁’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정부가 농산물 수입 자유화를 추진하면서, 1988년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연인원 20여 만의 농민들이 270여 회에 걸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정부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 전략과 자유무역주의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이에 따라 농업과 농민은 점점 더 설 곳을 잃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한국 농촌의 미래와 문제
영역닫기영역열기1. 지역 불균형 발전과 농업의 위기
정부의 도시-산업 중심의 발전 전략은 도농간 심각한 불균형 발전을 초래했다. 국민경제의 틀 안에서 공업과 농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수출 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농촌의 가용 자원에 대한 착취를 극대화했다. 농촌의 물적·인적 자원이 도시로 빨려들어가면서 농촌 위기의 구조적 조건이 만들어졌다. 낮은 농산물 가격으로 인해 농가의 소득이 감소하면서 도농격차가 심화되고 농민의 빈곤화를 낳았다. 정부의 산업 기반에 대한 투자도 도시와 산업에 집중되었다. 결과적으로 농촌과 도시의 불균형 발전이 심화되었으며, 농업의 위기와 농촌사회의 붕괴가 이뤄지게 되었다.
2008년을 기준으로 할 때 농가소득은 도시 가구 소득의 65.3%에 불과했다. 또한 농가부채의 악화가 농촌사회를 위협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농가소득에 비해 농가부채가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970년의 농가 소득대비 부채비율은 6.3%였으나, 이후 계속 급증하여 1985년 35.3%, 2000년 87.6%, 그리고 2005년에는 89.2%에 달했다. 그리고 시장개방으로 인한 농산물 가격 하락과 생산비용의 증가가 농가경제를 부채로 몰고 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농촌은 1990년대 이후부터 소위 세계화로 인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가 타결되고, 이어서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되어 농산물 시장이 빠르게 개방되면서 한국의 농업은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게 되었다. 최근 정부와 기업들이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을 적극 추진하면서 농가 경제의 어려움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 유럽연합, 호주 등과의 협정은 국내 농축산물 농가에 큰 피해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2. 농촌 인구 감소와 고령화
농촌 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근대화가 본격화되기 전인 1963년에는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63%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이농, 혼인률의 감소, 출산력 저하 등은 농촌인구의 감소를 가져왔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980년만 해도 농가인구는 1,000만 명을 넘었으며, 이는 전체 인구 대비 28.9%에 해당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 숫자는 계속 줄어들어 2005년 우리나라 농가인구수는 약 343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3%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농가인구는 계속 감소해서 2020년에는 234만 명으로 전체 인구 대비 4.7%로 줄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산업화 초기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했다. 주변부적 포드주의라고 불리는 저임금 산업화 정책은 빈곤에 시달리던 농촌으로부터 엄청난 수의 젊은 인력을 흡수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의 공업단지와 수출자유지역 등에 대량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의류, 섬유, 신발 등 노동집약적 산업의 근로자층을 형성했다.
농촌 인구 유출의 또 다른 유형은 교육 이주였다. 다수의 농가들이 가계가 가진 경제적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주로 아들들을 도시의 학교로 유학시켰다. 이들 대부분은 고등교육을 받은 후, 대도시에서 직장을 갖고 가정을 이루었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1960년대 247만 명, 1970년대 428만 명, 그리고 1980년대 476만 명이었다. 결국 농촌에는 심각한 과소 인구 현상이, 도시에는 인구 과잉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농촌지역의 인구감소는 농업노동력의 양적·질적 하락을 가져왔다.
인구의 감소와 함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농촌 인구의 급속한 고령화이다. 청년층이 줄어들면서 혼인 건수가 감소하고, 이에 따라 자녀 출산율 역시 줄어들었다. 또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농사를 짓는 후속세대의 단절을 초래했다.
1980년 전체 농가인구의 0∼14세 비율은 33%, 15∼64세는 60%,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6.7%였다. 이후 1990년에는 0∼14세 비율이 20.6%, 15∼64세는 67.9%, 65세 이상은 11.5%였다. 유소년 인구의 감소와 노령인구의 증가는 계속되어 2005년에는 0∼14세가 9.8%, 15∼64세는 61.1%, 그리고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29.1%였다. 이는 인구 과소화, 저출산, 고령화 등이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농촌사회의 재생산 구조가 붕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3. 다문화가족의 증가
젊은 여성층의 도시 이주는 농촌에 새로운 사회문제를 낳았다. 농촌에 남은 미혼 남성들이 배우자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혼인율이 떨어졌으며, 혼인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출산력의 저하를 가져와 많은 농촌 학교들이 문을 닫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90년대 들어 일부 농촌 총각들이 만혼 혹은 미혼의 문제를 국제결혼을 통해 해결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대 들어서는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에 거주하던 여성과의 국제결혼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농촌에는 다문화가정이 급증하고 있다.
농촌 지역 국제결혼 추이를 통계청의 자료로 살펴보면 2004년 국제결혼은 1,814건으로 농촌전체 결혼(농촌 결혼 건수 6,629건)의 27.4%였던 것이 2007년(농촌 결혼 건수 7,667건)에는 3,171건으로 41.4%로 증가했다. 이후 그 비율이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국제결혼은 이제 농촌의 중요한 가족 형성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국제결혼은 농촌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우선 결혼한 이주여성들은 농촌 가정에서 아내, 어머니, 그리고 며느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농사일에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에는 다문화가정에 의한 출산이 고령화 문제를 완화하고, 농촌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2005년 현재 다문화자녀수는 12,516명으로 추계되었으며, 이 숫자는 2020년이 되면 13만 명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전체 19세 미만 농가 인구의 거의 절반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하지만 인종, 언어, 문화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 자녀가 출생 성장하면서 앞으로 농촌의 가족, 학교, 지역 등에 장기적이고 심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단일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다문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편 다문화가족의 그늘도 적지 않다. 결혼 이주여성의 인권, 의사소통, 자녀 교육, 사회적응 등의 산적한 과제들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김택규
개정 (2011년)
김철규(고려대학교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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