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농민총동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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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노동총동맹과 분리하여 결성된 농민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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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7년 9월 조선노농총동맹에서 노동총동맹과 분리하여 결성된 농민운동 단체.
연원 및 변천

3 · 1운동 이전 쌀값의 폭등으로 지주들의 부와 토지소유가 급속히 확대된 반면 소농민과 소작민이 대다수인 농민층은 큰 타격을 받았다. 3 · 1운동을 경험한 농민층은 1920년대에 들어와 소작인조합을 결성하고 조직적인 생존권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20년대 초부터 우후죽순격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농민단체들은 1924년 4월 전국에 걸친 통일적 역량을 집중시키려는 전초작업의 일환으로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노농총동맹은 창립 이후 50여건의 노동 · 소작쟁의를 해결하고 특히 노동자 · 농민에게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심어주어 운동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조선노농총동맹은 1925년 11월 19일 제6회 중앙집행위원회 간담회에서 조선노농총동맹을 노동 단체와 농민 단체로 분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추진절차는 서면대회의 방법으로 하고, 그에 관한 일체의 사무는 상무집행위원회가 맡기로 하였다. 1926년 2월 18일 서면대회에서 진행된 분립안에 대한 찬반 투표 결과, 절대 다수가 분립안에 찬성하였다. 영광 · 대구 · 무안 · 광양 · 나주 · 완도 · 진주 등지에서는 이미 노동단체와 농민단체의 분립이 추진되기도 하였다. 1926년 12월 조선노농총동맹은 “노농운동을 지식인의 사상운동이 아닌 · 노동자의 노농운동으로 전환 · 발전시킨다.”는 내용의 「조선노농운동에 관한 신정책」을 선언하였다.

1927년 9월 6일 조선노농총동맹이 농민동맹과 노동동맹으로 분립함으로써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농민총동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인동철(印東哲), 중앙집행위원에는 경기송(慶箕松), 장준(張埈), 정학원(鄭鶴源), 송영섭(宋寧燮), 김복수(金福洙), 서태석(徐邰晳), 신준희(申俊熙), 조경서(曺景敍), 김익두(金益斗), 서철환(徐徹煥), 김용기(金龍基), 한길상(韓吉祥), 안상길(安相吉), 강갑수(姜甲壽), 안준(安埈), 천두상(千斗上), 주병화(朱炳和), 인동철, 김병환(金炳煥), 이경석(李京錫) 등 20명이 선출되었다.

1928년 조선농민총동맹의 가맹단체는 200개 정도였으나 결성 첫날부터 일제는 “두 사람 이상의 집회는 절대 금지하며 농민총동맹의 조직 자체도 인정할 수 없다.”고 탄압하여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조선농민총동맹은 조직체계의 정비와 산하조직의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창립 이후 통일적 지도부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였다. 반면에 천도교 신파측이 창립한 조선농민사는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민족주의자의 지지와 원조를 받고 있었다. 결국 조선농민총동맹은 해체도 하지 않은 채 조직이 쇠퇴해 갔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농민운동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1930년대 농민운동은 지하운동을 펴던 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비합법 주1을 결성하여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노동조합운동사』(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 1979)
『일제하(日帝下) 한국농민운동사(韓國農民運動史)』 (조동걸, 한길사, 1979)
『한국현대문화사대계(韓國現代文化史大系)』 Ⅳ(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1978)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 2·3(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1973)
『最近に於ける朝鮮治安狀況』(朝鮮總督府警務局, 1938)
주석
주1

1930년대에 일어난 혁명적이고 비합법적인 농민 조합 운동. 함남 단천 농민 조합ㆍ함남 정평 농민 조합ㆍ강원도 삼척 농민 조합ㆍ경남 양산 농민 조합ㆍ함북 명천 농민 조합 따위가 있었다. 1937년 명천 농민 조합의 붕괴 이후 약화되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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