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춘경(春景). 서울 출신.
1895년 12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듬해 1월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과 이천(利川)으로 내려가 의병을 일으켰다. 양근(楊根)·지평(砥平) 등지에서 의병 300명을 모병하고, 안성의 의병장 민승천(閔承天)을 창의 대장으로 추대하고 중군장이 되었다.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가 쳐들어오자 1초(哨) 군씩 백현(魄峴)에 매복하였다가 광주 장항(獐項) 장터 부근까지 추격, 무기·군량 등을 노획하였다. 2월 13일 이현(梨峴)에서 적군 200여 명의 습격을 받아 역전하였으나, 부대는 병력의 열세와 혹한으로 흩어졌다.
2월 25일 다시 이현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의 연합의진이 재구성되자 박준영(朴準英)을 대장으로 추대한 뒤 남한산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서울의 친위대와 강화의 주둔 병으로 산성을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였다. 박준영이 관군과 결탁하여 성문을 열어 함락 당하였다.
다시 김하락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영남 지방으로 내려가 안동·의성·청송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며, 이듬해 5월 26일 비봉산(飛鳳山) 일대에서 관군과 접전한 뒤 부하 30여 명과 경기도로 진지를 옮겼다.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의병항쟁을 포기하고 계몽운동에 뛰어들어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또 상동 교회의 전덕기(全德基)·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교육운동에도 종사하였으며, 1900년에는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를 비롯한 각 지방을 순회하며 종교 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칠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각처에서 성토회를 열고 그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구정서(具禎書)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1963년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