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루가치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
이칭
이칭
달로화적(達魯花赤)
제도/관직
설치 시기
1232년(고종 19)
폐지 시기
1278년 이후
소속
몽골제국 지방장관
내용 요약

다루가치는 고려 후기에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이다. 고려에는 1232년(고종 19)에 처음 설치되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후인 1270년부터 1278년까지 개경에 상주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몽골제국에서 정복지의 총독, 감독관으로 두었다가 지방장관으로도 사용된 직명.
임무와 직능

몽골이 흥기하여 주변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획득한 정복지를 감독하기 위하여 마련한 장치였다. 다루가치(darughachi)는 ‘누르다’, ‘진압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다루–(daru–)'에 명사형 접사 '가(gha)'와 ‘종사자’라는 의미의 접미사 '–치(–chi)'가 더해져 우두머리, 수령, 감독관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몽골제국에서 대칸을 대신하여 정복지에 파견되어 군사적 · 정치적 질서를 감독하면서 반란 세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가 몽골이 중국으로 영토를 넓혀가면서 점차 군사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민정관으로서의 성격을 갖추게 되는 등 관료화하였다.

『원사(元史)』 백관지에 따르면, 다루가치는 주5을 비롯한 고위 관청에는 두지 않고 그 예하의 관청에 두었다. 지방의 행정관청은 위로는 제로총관부(諸路摠管府)에서 아래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다루가치를 두었다. 여기서 다루가치는 지방장관을 감독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다루가치는 정복지의 감독, 통치 외에 지방행정의 책임자로 권농, 징세, 사법, 치안유지, 인구관리 등 지방행정 전반에 간여하였다.

한편으로 몽골은 정복지에 대해 속칭 ‘6사’로 불리는 여러 가지 사항을 화친의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다루가치의 설치도 그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고려와의 1차 전쟁이 끝난 1232년 정월에 몽골은 고려의 항복을 받고 강화를 하면서 72명의 다루가치를 40여 성에 설치하고 철수하였다.

고려에서 다루가치는 몽골의 관부로 존재하였다. 이는 다루가치가 아문(衙門)으로 인용된 1300년(충렬왕 26)의 사례나 몽골의 중서성과 첩(牒)을 주고받는 사례 등으로 확인된다. 또 정(正)다루가치 외에도 부(副)다루가치, 경력(經歷)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의 임기는 30개월이었으며, 해유(解由)라는 고과에 따른 평가 문서가 작성되기도 하였다. 고려로 온 다루가치의 관품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상도 유수사(留守司)의 다루가치 정2품, 부다루가치가 정3품이었으므로 고려의 경우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추정한다.

이들 다루가치는 기본적으로 몽골 조정의 명령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였을 것이다. 1271년에는 민간이 소유한 병장기를 몰수하기도 하였으며, 1276년에는 군대 외의 민간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고려에서의 치안유지 활동에 간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1276년에 고려가 사용하는 용어가 주2, 짐(朕), 사(赦) 등으로 몽골과 비교해 참람하다고 지적하여 왕지(王旨), 고(孤), 유(宥) 등으로 수정한 일이 있었는데, 다루가치가 고려의 정치 상황에 적극 개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변천사항

고려에 다루가치가 설치된 것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232년(고종 19)이다. 이때에는 몽골의 1차 침입에 뒤이은 강화를 1월에 맺으면서 처음 고려에 72명의 다루가치가 개경 및 북계 지역에 파견된 시기이다. 하지만 고려가 같은 해 7월에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다루가치의 제거를 기도하여 대부분을 살해하였다. 이후 한 동안 다루가치는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시기는 1250년대 후반에서 1260년까지이다. 1253년 7월부터 5차 침입을 이끌던 예쿠[也窟]는 11월 22일에 사신을 보내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고려가 성벽을 허무는 것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고려는 몽골이 내건 조건에 반대하였지만, 1258년에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결국 다루가치를 설치하는 조건을 수용하여 1260년(원종 1)에 쉬리다이[束里大]와 강화상이 고려에 파견되었다. 하지만 개경 환도에 미온적이던 김준 정권은 환도를 준비한다는 이유로 다루가치의 파견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몽골이 이를 받아들여 다루가치를 철수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1270년부터 1278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몽골은 고려국 다루가치를 개경에 상주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김방경 무고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충렬왕주6로부터 본속(本俗)에 의한 지배라는 주3를 인정받았다. 이에 1278년에 다루가치가 고려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한편으로 고려의 영토였던 쌍성과 탐라 등지에도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였다. 별도의 다루가치가 존재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의 다루가치가 철수한 이후에도 계속 그 존재가 확인된다. 특히 1273년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이후에 몽골이 탐라총관부를 설치하면서 다루가치의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충렬왕 대를 끝으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일본 원정 준비를 점검, 감독하기 위하여 파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의의 및 평가

1232년에 처음 다루가치가 설치될 때에 기록에 따라 40여 성과 14성으로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대체로 개경과 서경을 비롯하여 고려의 서북계 지역 14개 성에 배치된 것으로, 40여 성은 오류로 이해하고 있다.

1278년에 일어난 다루가치의 폐지는 충렬왕이 몽골의 쿠빌라이에게 요청하여 얻어낸 외교 성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부마가 된 충렬왕에게 더 이상 다루가치를 파견하는 것이 몽골의 관습상 불편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었다. 다시 말해 충렬왕이 몽골제국 황실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으로, 온전히 자주적 성과라고 평가할 수만은 없다.

다만, 다루가치가 존재하던 시기에 충렬왕이 부마가 된 이후에는 다루가치와 주4하지 않게 되면서 다루가치보다 의례상 우위에 있었다. 나아가 충렬왕이 다루가치에 대한 고과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려는 다루가치를 통해 몽골제도의 일면을 경험하였고, 이후 고려왕이 정동행성 및 그 승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고명수, 『몽골–고려 관계 연구』(혜안, 2019)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지식산업사, 2013)

논문

김보광, 「고려–몽골 관계의 전개와 다루가치의 치폐과정」(『역사와 담론』 76, 호서사학회, 2015)
조원, 「대원제국 다루가치체제와 지방통치: 다루가치의 장인권과 직임을 중심으로」(『동양사학연구』 125, 동양사학회, 2013)
이개석, 「『고려사』 원종 · 충렬왕 · 충선왕세가 중 원조관계기사의 주석연구」(『동양사학연구』 88, 동양사학회, 2004)
주채혁, 「고려내지의 다루가치 설치에 관한 소고」(『청대사림』 1, 청주대학교,1974)
Paul Pelliot, 민현구 역, 「고려사에 실려 있는 몽고어」(『백산학보』 4, 백산학회,1968)
白鳥庫吉, 「高麗史に見たる蒙古語の解析」(『東洋學報』 18-2, 1929)
池內宏, 「高麗に駐在した元の達魯花赤について」(『東洋學報』 18-2, 1929)
주석
주1

고려 시대에 둔 삼성(三省)의 하나. 문정 15년(1061)에 내사성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2

임금의 명령을 널리 선포함.    우리말샘

주3

고려 후기에 원나라와 고려가 강화 회담을 할 때, 원의 세조가 고려의 의관(衣冠)과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고 한 약속.    우리말샘

주4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동등하게 교제함. 또는 그런 예(禮).    우리말샘

주5

중국 수나라ㆍ당나라ㆍ송나라ㆍ원나라 때에, 일반 행정을 심의하던 중앙 관아. 삼국 시대에 위(魏)나라에서 처음 두었으며, 원나라 때에 상서성으로 고쳤다가 명나라 초기에 없앴다.    바로가기

주6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로 중국 원나라의 시조(1215~1294). 묘호(廟號)는 세조. 중국 이름은 홀필렬(忽必烈). 칭기즈 칸의 손자로, 일본ㆍ중앙아시아ㆍ유럽에까지 원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몽고인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보광(가천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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