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

목차
고대사
제도
신라시대의 관직.
목차
정의
신라시대의 관직.
내용

궁중에서 국왕 혹은 동궁(東宮)을 받드는 일종의 근시직(近侍職)으로 ≪삼국유사≫와 금석문(金石文)에는 흔히 내양자(內養者)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진흥왕순수비 중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磨雲嶺碑)에 보이는 이내종인(裏內從人)은 이와 같은 성격의 것으로 짐작된다. 사인제도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었던 듯하다. 법흥왕 때 순교한 이차돈(異次頓)도 바로 사인출신이었다.

그 뒤 진평왕 때에는 사인직이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상사인(上舍人)·하사인(下舍人)으로 분화되었으며, 역시 사량궁(沙梁宮) 같은 데도 사인을 두었다. 신라통일기에는 중국제도의 영향을 받아 동궁 관속의 하나로서 중사인(中舍人)을 두었는데, 경문왕 때의 명필 요극일(姚克一)은 바로 이 중사인을 역임한 바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흥녕사증효대사탑비문(興寧寺證曉大師塔碑文)」
「대안사적인선사탑비문(大安寺寂忍禪師塔碑文)」
「나말려초 근시기구와 문한기구의 확장-중세적 측근정치의 지향-」(이기동, 『역사학보』 77, 1978:『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집필자
이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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