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원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의하면 태조가 태봉의 조위부(調位府)를 고쳐 삼사로 했다고 한다. 이것은 삼사가 태조 때 설치되고 또 공부(貢賦)를 관장한 태봉 조위부의 후신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삼사는 태조 때 설치된 것이 아니라 성종 때 설치되었다. 그것은 고려 초기의 관직명에 삼사직이 보이지 않고, 성종에서 목종대에 걸쳐 비로소 기록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려의 중앙관제는 성종 때 중국의 제도를 기본으로 하여 정비되었으므로, 이때 삼사도 함께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둘째, 삼사가 공부를 관장했다는 점에서 신라의 조부(調府), 태봉의 조위부의 기능을 계속했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 송나라의 삼사제를 채용한 것이었다. 삼사라는 관서명이나 그 기능으로 보아 이는 송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성종은 당제를 기본으로 삼성(三省)·육부(六部)의 중앙관제를 마련하였고, 송제에 따라 중추원과 삼사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보면 태조 때 태봉의 조위부를 고쳐 삼사를 설치했다는 기록은 오류임이 확실하다.
2. 변천
성종 때 설치된 삼사는 1014년(현종 5) 상장군 김훈(金訓)·최질(崔質)의 난에 의해 혁파되고 도정사(都正司)로 개편되었다. 또한 어사대(御史臺) 역시 금오대(金吾臺)로 개편되었다. 이때 삼사가 어사대와 함께 반란무인의 개혁대상이 된 것은, 이들이 문신들의 세력기관인 동시에 삼사가 백관의 녹봉(祿俸)을 관장했기 때문이었다.
삼사를 도정사로 바꾼 것은 그 명칭으로 보아 지금까지의 불공평하고 수탈을 일삼은 삼사를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15년김훈·최질의 무인정권이 실각하자 1023년(현종 14) 도정사가 삼사로 환원됨으로써 원상을 되찾게 되었다.
삼사는 공식기구에 밀려 단순한 회계사무를 맡는 기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현종 이후 예종 때까지는 세공에 관해 많은 상주(上奏)를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인종부터 원종에 걸쳐서는 삼사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아 그 기능이 제구실을 못한 것 같다.
관제가 전반적으로 크게 개편된 충렬왕 때는 삼사도 여러 면으로 변질되었다. 제도상으로 그 기구편성이 상승, 강화된 것이다.
충렬왕 이후 그 관직이 단독직으로 독립되고 관원의 품질(品秩)과 지위가 상승되며, 삼사원도 도당에 앉아 국정에 참여하게 되고, 관원의 정원이 증가하는 등 기구면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즉, 지금까지 삼사직은 전문직이 아니고 타직이 겸하는 겸직이었지만, 충렬왕 이후 판삼사사나 삼사사 등의 삼사직이 하나의 어엿한 독립직으로 되었다.
지금까지 판삼사사는 추밀원사가 겸하고 삼사사도 육부상서보다 하위에 있었으나, 이제는 서열이 수상(首相)과 아상(亞相) 사이에 놓이게 되고 삼사사도 재상에 끼게 되었다. 또 관원수가 증가해 15인이나 되게끔 제도적인 기구면의 강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로 삼사가 기능면으로도 강화, 확대될 것을 예상했으나, 실제로 관서로서의 기능은 오히려 그 전보다 약화되었다. 고려 후기의 삼사는 녹패나 서명해 지급하였을 뿐 그 기능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본래의 임무였던 중외 전곡에 관한 출납·회계의 기능은 도당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맡게 되었다.
고려 말에는 도평의사사가 최고의 의정기관인 동시에, 일원적인 국무행정기구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종래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했던 삼성·육부의 공식기구는 그 권한을 도당에게 빼앗겨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밀직사(密直司)와 삼사도 관서로서의 직능이 제약을 받게 되었다.
직사가 없이 허설화된 삼사에 대하여 고려 말에는 두 가지 상반된 시정책이 강구되었다. 하나는 삼사를 아예 폐하여 상서성에 병합하려는 움직임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삼사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즉,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민부(民部, 戶部)를 개정해 여기에 삼사·군기감(軍器監)·도염원(都鹽院)을 병합했고, 또 1356년(공민왕 5) 삼사를 폐하여 상서성으로 했으나, 1362년 삼사가 다시 설치되었다.
반대로, 유명무실화된 삼사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건의가 조준(趙浚) 등에 의해 이루어져서, 마침내 1391년(공양왕 3) 삼사로 하여금 중외 전곡의 출납·회계를 관장하게 했으니, 이것은 삼사가 본래의 기능을 되찾았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도평의사사가 일원적인 최고정무기관의 위치에 있는 한 삼사의 기능이 고려 전기와 같을 수는 없었다. 1354년(공민왕 3) 이후 삼사는 도당의 명을 받아 전곡의 출납을 실행했으며, 이러한 상태는 조선 초까지 변동이 없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401년(태종 1)사평부(司平府)로 개칭되었다가, 1405년 호조에 병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