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1986년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아 경기대회이다. ‘영원한 전진(Ever Onward)’이라는 표어 아래 27개 국 4,800여 명의 아시아인이 모여 기량을 겨루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격상된 한국의 지위를 국내외에 선양하고, 세계 규모의 국제스포츠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여 동북아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이 대회는 일시적인 국위선양에 그치지 않고 장차 우리나라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5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된 뒤 35년 만인 1986년 제10회 대회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영원한 전진(Ever Onward)’이라는 표어 아래 27개 국 4,800여 명의 아시아인이 모여 25개 종목에 걸쳐 기량을 겨루었다.
분단국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1만9000명의 각 분야 요원들이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중심으로 33개 경기장에서 활약한 결과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각국 선수단을 수용한 선수촌은 9∼18층의 아파트에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특히 최신 전산장비 및 시설의 활용은 대회 운영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경기종료 후 7분이면 상세한 경기결과를 세계 어디서나 알 수 있도록 한 통신망을 구축하였고, 개 · 폐회식과 식전 공개행사는 우리의 전통문화에 힘이 넘치는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켜 독특한 분위기로 참가선수단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 5만 4,000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은 성공적인 대회개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 이 대회가 특정 소수 체육인만의 행사가 아닌 전 국민의 스포츠잔치였음을 입증하였으며, 우리의 저력을 아시아에는 물론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결과 우리나라는 금메달 93개를 획득하여 예상 목표보다 훨씬 좋은 성적으로 중국에 이어 종합 2위로 아시아 스포츠강국의 위치를 굳혔다. 그 동안 중국이 불참한 역대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두 차례 2위를 하였으나 일본을 누른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가 30억 아시아인의 스포츠 잔치인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아시아권 내에 한층 공고히 하자는 데 기본 취지가 있었다.
따라서,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제10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한편,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불명예를 씻고 아랍 여러 나라 및 중국 ·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국제친선 및 우의를 증진하려는 데 역점을 두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유치한 지 두 달 만에 또다시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이다. 이는 세계 규모의 국제스포츠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나아가서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및 올림픽대회를 통하여 우리 국민의 평화 의지를 아시아와 세계에 분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이념으로 분단된 이 땅에서 평화의 대제전을 치름으로써 긴장과 갈등이 상존하는 오늘의 세계에 화합과 조화의 질서를 새롭게 다지면서 인류의 영원한 목표인 공동번영을 위해 함께 전진해 나가는 중요한 전기를 삼자는 데 의의를 두었다.
대회는 국민 모두의 합심 아래 성공적으로 개최됨으로써 아시아인의 두터운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아시아지역의 영원한 전진과 번영, 나아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아시아인 모두의 결의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 서울올림픽대회를 2년 앞두고 열린 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이 대회의 성패가 곧바로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성패로 연결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리에 치름으로써 대회운영기술 및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굳게 다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1979년 9월 21일 정부 승인을 거쳐 그 해 10월 8일 대회유치 희망을 공식발표한 뒤, 다음해 4월 24일 개최신청서를 지금의 아시아올림픽평의회의 전신인 아시아경기연맹(AGF)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회개최 신청 기한이 경과한 같은 해 9월 8일 이라크가 개최신청을 한 데 이어, 11월 20일 북한 역시 개최신청을 하여 1970년 대회를 반납한 바 있는 우리로서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혔다.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아시아경기연맹 회원국의 국가올림픽위원회(NOC)와 직접 교섭을 벌이는 한편, 외무부의 협조를 얻어 공관의 현지교섭을 강화, 뉴델리 아시아경기연맹 총회에서의 표 대결에 대비하였다. 아시아경기연맹 집행위원회는 1980년 12월 3일 회의를 열고 한국 · 이라크 · 북한의 개최신청을 모두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아시아경기연맹 창설국이면서도 집행위원국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여, 이라크나 북한의 개최신청이 시한과 절차면에서 적법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변할 발언권마저 가지지 못하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아시아경기연맹은 표결에 앞서 부회장 파하드(쿠웨이트)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 3개 신청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대한올림픽위원회는 아시아경기연맹 조사단의 우리나라 방문에 대비, 각종 국제회의를 통해 홍보활동을 벌였으나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1981년 3월로 예정되었던 아시아경기연맹 조사단의 한국 순방계획이 무기한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조사단은 북한을 먼저 방문, 각종 시설을 점검한 결과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으며, 다만 개최권이 북한에 주어지면 시설을 보완할 능력은 갖추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곧 이어 1981년 10월 19일 내한한 조사단은 잠실지구의 스포츠시설과 태릉사격장 등을 시찰하고 북한에 비하여 월등히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이라크 국가올림픽위원회는 이란과의 교전과 시설 부족을 이유로 대회개최가 불가능함을 아시아경기연맹 사무국에 통보하고 표결에서 아랍 여러 나라들과 함께 한국을 지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북한은 1981년 11월 17일 제3국 개최를 고집하면서 평양 유치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결국,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는 한국이 단독으로 신청함으로써 아시아경기연맹은 1981년 11월 26일 68명의 대표가 참석한 총회에서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서울 개최를 확정하였다.
대회준비는 1982년 4월 23일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회(SAGOC)가 발족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 이 조직위원회는 1983년 2월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통합되어 사무처가 사무총장, 사무차장 3명, 1본부장과 1실 13국 58과 규모의 기구가 확정되고, 기능별로 업무를 관장하는 등 세 차례의 대표적인 기구 개편작업을 단행하였다.
1984년 2월 29일 대회기간이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로 결정되면서 준비작업도 본궤도에 접어들었으며, 1985년 4월 볼링경기장 완성과 우승메달 디자인 확정, 대회가 및 팡파르 결정, 성화봉송코스 확정 등 대회 막바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대회조직위원회는 처음 대회규모를 참가 예정국 33개 국, 참가인원(선수 · 임원 · 보도진 포함) 1만1900여 명, 관광객 16만 명으로 각각 추정하고, 대회운영 요원 5만8835명의 확보와 업무별 배치 등 소요인력 파악과 활용방법 등을 잠정 결정하였다. 또, 1,023개 품목의 1978억 원에 달하는 소요물자를 확보하고 이에 대한 관리계획을 세웠으며, 별개의 업무로 분담하여 차질 없도록 준비에 들어갔다.
이 밖에 경기운영요원 6,605명을 확보, 연도별로 해외파견 · 전문가 초청 · 자체교육을 통해 훈련을 실시하였다. 1986 · 1988년 양대회에 필요한 36개 경기장은 기존시설 20개를 보수 활용하도록 하고, 1984년 올림픽 주경기장과 수원실내체육관을 완공했으며, 나머지 14개 경기장을 1986년 6월 이전에 모두 준공하였다.
또, 메인프레스센터(MPC) · 아시아방송센터(ABC) · 아시아선수촌을 개막 직전에 완공하여 모든 시설을 마무리하였다. 대회조직위원회는 대회를 치르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경비를 자체사업으로 조달한다는 원칙 아래, 휘장사업 · 입장권판매 · 기념주화판매 · 기념메달판매 · 복권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대회의 모든 준비상황은 6월 실제의 경기장에서 아시아경기대회와 같은 방식으로 치러진 전국체육대회를 통하여 총점검하였으며, 노출된 일부 시설상의 미비점과 진행상의 문제점을 대회개최 전에 완전 보완, 개선하였다.
1986 · 1988년 양 대회에 투자한 총비용은 직접사업비 1조 3,286억 원, 여건조성 사업비 1조 811억 원 등 모두 2조 4,097억 원에 달하였다. 이는 1964년 동경올림픽의 11조 4,000억 원 규모의 5분의 1에 해당하며,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때의 2조 1,000억 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총투자비용 중 여건조성 사업비 1조 800억 원은 대회 유치 전에 이미 정부의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에 반영해서 추진되어 온 것이다.
또 직접사업비 중에서도 대회 유치 이전부터 추진되어 온 서울종합운동장 등 경기장 건설비 839억 원과 민자(民資)로 충당된 요트 · 승마 경기장, 선수촌아파트 건립비용 등 4970억 원을 제외하면 순수한 대회준비 개최비용은 7477억 원이다. 이 중 시설건설 · 장비구입에 53%인 3931억 원, 행사진행 · 의무 · 홍보 · 수익 사업운영 등에 3546억 원이 투입되었다.
주요 수입원은 텔레비전방영권판매 · 복권판매 · 휘장사업 · 기념주화판매 · 아파트분양 · 입장권판매, 각국 선수단 입촌비 · 기념품판매 등으로 충당되어 양 대회 수익사업은 1986년 5월 말 80.3%가 달성되었다. 텔레비전 방영권 판매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가 95만5400달러(8억5000만 원)의 수입을 잡았고, 서울올림픽에서는 미국 텔레비전의 최소 보장액이 예상보다 적은 3억 달러선에서 타결이 되었지만, 총예산 7477억 원은 무난히 확보하였다. 또, 부대수익으로 적어도 100억 원 이상의 관광수입을 얻었다.
대회에 사용된 33개의 경기장과 54개의 연습장 등은 역대 대회사상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33개 경기장 가운데 새로 지은 것은 올림픽공원 내의 사이클 벨로드롬경기장을 비롯하여 역도 · 체조(배드민턴 겸용) · 펜싱 · 테니스 경기장과 부산 수영만의 요트계류장 등 모두 15개 소이며, 나머지는 기존시설을 확충, 보완하여 사용하였다. 연습장도 수영 · 배구의 새마을본부 체육관, 한강 시민공원 육상장 등 7개만을 신설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각급 학교나 실업팀의 기존체육관으로 충당하였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의 시설은 특히 주경기장과 잠실체육관 · 학생체육관 · 수영장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고, 체조 · 역도 · 펜싱 · 테니스 · 사이클 경기장이 올림픽공원 안에 모여 있어, 선수단의 이동이 용이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주요 경기장(잠실올림픽스타디움)은 10만 관중(입석 포함)을 수용할 수 있는 초현대식의 웅장한 규모로 세계의 어느 경기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에 위치한 선수촌은 5,000여 명의 선수단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아파트 18개동)와 대형식당 · 국제센터 · 종교관 · 병원 · 행정센터 · 본부건물 등의 시설을 모두 갖추었다. 또 1,5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식당은 하루 5,000cal를 기준으로 하여 뷔페식으로 음식을 제공하였다.
국제센터에는 우체국 · 전신전화국 · 자전거수리소 · 쇼핑센터 · 세탁소 · 이발소 · 미용실 · 은행 · 수영장 · 탁구장 · 전자오락실 · 극장 · 디스코테크 등 모든 편의시설을 갖추었으며, 병원은 8개 진료과목으로 30개 입원실을 구비하였다. 종교관에는 기독교(개신교) · 가톨릭 · 이슬람교 · 불교관을 두고 24시간 개방하였다. 식당은 당초 예상보다 3만 명이 늘어난 연인원 23만 명이 이용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선수촌 운영 33일간 편의 · 위락 시설을 이용한 선수와 임원은 17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한국전력 별관건물을 활용한 메인프레스센터(MPC)는 기자실 · 통신송고실 · 회견실 · 등록센터 및 언론사별 개별 사무실과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국내외 보도진의 취재 · 송고 · 사진 등의 주요 업무를 지원하였다.
메인프레스센터는 경기장과 선수촌 등 29개 서브프레스센터(SPC)와 전화 · 팩시밀리 · 종합정보망 등 각종 시설로 연결되어 신속, 정확한 취재를 지원하였고, 경기 결과를 비롯한 정보자료를 원활하게 제공하였다. 또, 사진취재 지원을 위한 현상소와 카메라수리소를 부대시설로 갖추었으며 사진전송기를 설치하였다.
여의도 KBS건물 옆에 있는 아시아방송센터(ABC)에는 30여 개 나라에서 55개 방송기관이 참여, 대회의 생생한 모습을 국내외에 송출하였다. 아시아방송센터는 6월 전국체육대회 때부터 국제신호를 이용한 ‘주관방송’ 제도를 시험운영하고, 이를 이번 대회에 과감히 채택, 깨끗한 영상과 음질 및 음향을 내보내어 큰 호평을 받았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 사용된 각종 전산시스템은 모두 국내 기술진이 개발한 것으로 종합정보망(INS)과 경기정보시스템(GIONS)이 연결, 이용되었다. 478대의 터미널과 228대의 프린터로 구성된 종합정보망은 29개 경기장 · 메인프레스센터 · 아시아방송센터 · 선수촌 등 60여개 소에 설치되었으며,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 사용된 전자정보교환시스템(EMS)보다 빠른 시간(경기종료 후 7분 이내)에 자료를 송출하는 한편, 위성정보통신망을 통해 동일한 서비스를 신속히 제공하였다.
북한의 방해공작 가능성 등 분단국가의 특수상황을 고려한 유례없는 철저한 안전조처가 취해졌다. 특히, 김포공항 폭파사건 이후 경비경호는 더욱 철저히 취해졌다.
고위 임원에서 실무 운영요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회관계자가 검문검색절차를 철저히 준수하고, 금속탐지기와 고성능 엑스레이투시기 · 등록카드감식기 등 각종 최신보안장비의 활용은 물론, 경비견(警備犬)까지 동원하였다. 특히, 선수촌과 메인프레스센터 등 주요 시설물에는 이중삼중으로 검문검색을 실시하여 안전대책에 만전을 기하였다.
선수단과 보도진, 기타 대회관계자들을 위해 전용버스 · 셔틀버스 · 전용승용차 등을 제공하는 한편, 주요 행사장 주변의 일반 교통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여 교통소통에 원활을 기하였다. 특히,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개 · 폐회식 등 대규모 행사에는 시민에게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수단의 이용을 권장하여 교통체증을 덜 수 있었다.
대회기간 중 지하철을 이용한 승객이 평소보다 하루 17만 명 이상이 증가했다. 숙박시설은 선수단을 위한 선수촌 외에 18개 시내호텔을 지정, 객실을 확보하여 보도진 등 대회 관계자의 이용에 아무런 문제점이 없었다.
보건당국은 경기대회를 통해 우리나라의 보건위생 수준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한편, 이를 ‘생활올림픽’의 차원에서 준비한다는 계획 아래 대대적인 작업을 추진하였다. 1985년 3월 보건사회부 환경청, 요식업중앙회 등 14개 유관단체가 ‘생활올림픽추진단’을 결성하고 방역반(14개 반, 28명) · 접객업소반(22개 반, 51명) · 공중변소반(6개 반, 23명) 등을 편성, 광범위한 점검 및 보완 · 개선을 유도하였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 관광업을 해외에 홍보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대회에 참가한 임원 및 선수들에 대한 선전효과 외에도 외국 텔레비전과 신문들이 서울대회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우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으며, 그 효과가 관광에도 크게 파급되었다.
대회 기간중 외래관광객은 모두 14만3668명으로 당초 예상 16만 명에는 못 미쳤지만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하여 8.6%가 늘어난 것이었다. 이로써 한국관광공사는 199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으로 전망하던 외래관광객 200만 명 유치, 외화수입 18억 달러의 목표를 1988년에 앞당겨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 행사에 대비하여 개발한 26개의 관광코스 중에서 서울의 고궁, 민속촌, 강화도 인삼밭, 판문점 등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서울시내 관광코스는 반나절 코스 5개, 하루 코스 3개, 야간 코스 4개 등으로, 종류를 다양하게 하면서 문화유적지와 올림픽시설을 연계하여 각각 그 특징을 살렸다.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많은 종류의 대회기념품을 개발, 생산하였는데, 이 가운데 호돌이인형 등이 특히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대회기간 중 23개 시중은행을 통해 다섯 종류의 기념주화가 발매되기도 하였다.
9월 19일 하오 7시 동대문운동장에서 서울아시아경기대회를 경축하는 전야제가 흥겹게 펼쳐졌다. 2,500여 명이 출연, 국내 쇼무대사상 최대 규모인 대축전이 국내외 가수들의 노래와 율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경축 특별공연이, 잠실 석촌호수 서울놀이마당에서는 민속마당놀이가, 장충체육관에서는 아시안팝페스티발이 벌어졌다. 하오 8시 잠실주경기장과 여의도 강변 언덕에서는 3,000여 발의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아 축제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9월 12일 상오 11시 삼국통일의 얼이 서려 있는 경주의 화랑교육원에서 채화된 ‘아시아의 불꽃’ 성화는 이창훈(李昌薰)이 봉송을 인계받아 2명의 주자가 3㎞를 들고 달린 뒤, 3개 통과경로를 따라 1만6563명의 봉송요원에 의해 전국 61개도시를 통과하는 4,175㎞의 대장정에 들어갔다.
제1경로 ‘화합의 길’은 동해안을 따라 포항 · 대구 · 안동 · 강릉 등 17개 도시를 거쳐 1,078.3㎞를 달려 서울에 이르고, 제2경로인 ‘전진의 길’은 1,159.7㎞로 김해 · 통영 · 김천 · 충주 등 18개 도시를 지나 서울에 이르며, 서해안을 따라 봉송되는 제3경로인 ‘번영의 길’은 626㎞의 항공봉송 구간을 포함 부산 · 제주 · 광주 등 26개 도시를 돌아 서울에 이르는 것이었다.
성화가 하룻밤을 묵는 중계 숙박도시에서는 그 고장 특색을 살린 민속축제가 다채롭게 열렸고, 8박 9일의 여정을 끝낸 성화는 9월 19일 하오 6시 서울에 도착, 서울특별시장에게 인계되어 시청앞 광장에 마련된 성화로에 안치되었다.
1986년 9월 20일 제10회 서울아시아경기대회의 막이 올랐다. 태풍 애비호의 영향으로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렸으나 개회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오후 2시35분, 본부석 앞에 놓인 3개의 대형 북이 울리는 가운데 식전 공개행사의 첫 순서인 「영고」가 펼쳐졌다. 성암여자상업고등학교와 국악예술고등학교 등 966명의 여고생이 원색의 한복으로 경기장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꽃을 피워내자 8만 관중은 갈채와 환성을 보냈다.
이어 전통혼례식을 각색하여 연출한 「청실홍실」특히 외국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오후 3시, 개막 팡파르가 울리고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여고생 연합고적대 행진에 이어 국가가 연주되고 27개 참가국이 입장을 시작했다.
300명의 서울아시아경기대회 휘장 기수단 및 대회 표지판의 입장에 이어 히말라야산맥의 고산국 네팔선수단이 전통의상 차림으로 첫 모습을 나타내었고 레바논 · 말레이시아가 뒤를 이었으며, 하늘색 상의에 흰색 하의 단복을 입은 638명의 우리 선수단이 이민우(李民雨) 선수를 기수로 맨 마지막에 입장하였다.
선수단 입장이 끝나자 인도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카프르가 대회기와 성화봉을 파하드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회장에게 전달하고, 파하드는 다시 서울아시아경기대회 박세직(朴世直) 조직위원장에게 인계하였다.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박세직 위원장의 대회사와 파하드의 환영사에 이어 대회 개막이 선언되었다.
곧이어 군 특전단 장병들의 축하비행과 고공낙하시범이 화려하게 펼쳐지고, 장재근(張在根) · 박미선(朴美善) 두 남녀 최종주자에 의해 성화가 점화되었고, 김호철(金浩哲, 배구) · 김진호(金珍浩, 양궁) 두 선수가 참가선수 대표선서를 하였다. 특히, 식후에 펼쳐진 「신천지」 · 「봄처녀」 · 「고놀이」 등의 공개행사는 우리 전통문화의 흥취와 발전상을 잘 나타내었다.
10월 5일(일요일) 오후 7시, 우리나라가 최종경기인 축구 결승전을 승리로 장식하면서 폐회식이 거행되었다. 8만 관중이 역사의 한 장이 내려지는 엄숙한 순간을 지켜보는 가운데, 참가선수단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며 친선과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아시아올림픽평의회기와 태극기(주최국), 중국의 오성홍기(1990년 대회개최국)가 게양되고, 경기장을 밝히던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가운데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의 마스코트 ‘호돌이’와 북경아시아경기대회의 마스코트 ‘팬더곰’이 등장하여 다음 대회를 예고하였다.
폐회사 · 폐회선언에 이어 대회기가 내려지고 16일간 타오르던 성화가 꺼지자 8만 관중이 흔드는 오색 손전등이 스탠드를 수놓고 불빛이 밤하늘을 영롱하게 밝히는 가운데, 참가 선수들은 「강강수월래」 공연에 맞추어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다음에 서울과 북경대회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전시 · 공연 등 32개 공식행사와 20여 개 비공식행사로 구성된 문화예술행사는, 8월 20일 총체예술인 「동방의 빛과 영광」을 시작으로 막을 올려, 10월 11일까지 53일간 서울 시내 주요 극장과 놀이마당에서 펼쳐졌다.
각종 행사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우리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아시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도록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켰다. 특히, 「동방의 빛과 영광」은 실내공연임에도 불구하고 1,200여 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대규모 출연진을 동원, 건국부터 아시아에서 웅비하기까지의 우리 민족사를 전 4장으로 구성하여 80분 동안 휴식과 단절 없이 일관되게 주제를 표현하였다.
이들 문화예술축전은 외국인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예술을 한껏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예년의 국악제 외에 새로이 국악의 향연과 민속놀이 등을 가미하여 국악의 비중이 매우 높았던 점이 특징의 하나였으며, 대체로 모든 공연이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서울국제음악제라는 이름으로 동경도교향악단(東京都交響樂團), 필리핀의 마드리갈싱어즈합창단, 아시아 정상급 성악가 6명 및 해외에서 활약중인 정명화(鄭明和) · 정명훈(鄭明勳) · 강동석(姜東錫) · 백건우(白建宇) 등을 초청, 국제 규모의 행사가 되었다. 특히, 정명화 · 정명훈 · 강동석 3중주의 밤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14일간의 음악제에 참석한 관객 수는 3만1385명에 달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국립국악원 주최로 마련된 ‘국악의 향연’에는 1만1000여 명의 관객이 입장했으며, 가장 성공적인 공연은 잠실의 서울놀이마당에서 펼쳐진 ‘놀이마당’이었다. 21일 동안 14만9200여 명의 관객이 참여하여 우리의 전통무용과 음악의 진수를 맛보았다. 9월 19일 공연된 판소리 · 사물놀이 · 탈춤마당과, 28일의 사물놀이 · 서해안 대동굿 · 판소리마당이 특히 인기가 있어, 외국인을 포함하여 1만4000명이 관람하였으며, 10월 5일의 마지막 날 공연에는 1만5000명이 넘는 많은 관객이 운집하였다.
53일간 12개 연극단체가 주관한 공연에 3만5310명이 관람하였다. 홍보에 비해 관객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밤으로의 긴 여로」는 첫회부터 관객이 모여들어 5, 936명의 최다 관객을 동원하였고, 국립극단의 「비옹사옹」이 5,238명, 자유극장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3,864명, 성좌의 「초승에서 그믐까지」, 목화의 「태」 등이 많은 관객을 모았다. 특히, 「태」의 경우 마지막회는 입석까지 다 팔리는 성황을 이루었다.
한편, 지방 초청작품 「물보라」와 인도의 세라이칼라초 무용극과 일본의 스코트극단 초청공연 등은 특색이 있었다. 연극제의 관객이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작품의 창작 소재 빈곤과 재공연작품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회기간 중 국립국악원 공연은 3,850명이 관람하였고 유니버셜발레단의 「심청」에는 3,848명, 국립무용단의 「은하수」에 3,599명, 애지회의 발레에 3,846명, 물이랑발레단에 3,448명 등 많은 관객이 관람하는 호황을 이루었다.
무용제의 특징의 하나는 국악기와 신시사이저가 동시에 연주되고 관객들이 무대 위로 올라가 무용단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등, 과거의 경직된 분위기에서 탈피한 점이다. 특히,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소재로 삼아 발레로 구현하고, 남성 무용수들을 많이 등장시키는 등의 변화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경기대회를 전후한 각종 전시행사는 박물관의 고미술전부터 현대미술전에 이르기까지 40여 가지에 달하였으며, 전통과 현대가 골고루 어울려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청자특별전 · 박물관전 · 고미술품전시회 등의 전시행사는 국민에게는 조상의 슬기와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외국인에게는 우리의 찬란한 전통문화의 진수를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개관기념 특별전과 아시아현대채묵화전 등을 비롯한 국제적 규모의 전시행사들은 외국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현대미술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회화 · 조각 등 모든 미술 분야가 총망라된 전시행사들은 특히 국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36개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회원국 가운데 27개 국에서 4,797명의 선수 · 임원이 참가하여 규모면에서 역대 대회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선수단은 1982년 제9회 뉴델리대회 때의 4,500명에 비해 300여 명이 늘어났으며, 참가국 수에서는 일부 공산국의 불참으로 약간 줄었으나 스포츠 강국인 중국 등을 비롯, 우리나라와 미 수교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하여 질적인 면에서도 수준 높은 스포츠잔치가 되었다.
중국은 20개 종목에 걸쳐 역대 대회사상 가장 많은 520명의 선수단을 파견했으며, 이번 대회를 통해 다음 북경대회 개최에 필요한 경기시설과 대회 운영방식 등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갔다. 서울대회는 경기종목면에서도 역시 역대 대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뉴델리대회 때보다 4개 종목이 많은 25개 종목이 치러졌다.
서울대회는 국제회의와 고위 체육계 인사 참여면에서도 사상 최대였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비롯, 파하드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회장, 각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하계올림픽종목 국제경기연맹(ASOIF) 회장 등 270여 명의 국제스포츠계 고위인사가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대회를 참관했으며, 나카소네 일본수상 등 각국의 장관급 인사 160여 명이 대회기간중 방한하기도 하였다.
총 25개 종목으로 올림픽대회와 아시아경기대회는 물론, 역대 국제경기대회사상 가장 많은 경기를 가졌는데(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는 시범종목을 포함, 23개 종목이었고, 뉴델리대회 때는 21개 종목이었음), 올림픽 경기종목 중 근대 5종과 카누가 제외되고 비올림픽 종목인 볼링 · 배드민턴 · 골프 · 태권도가 포함되었다.
볼링과 배드민턴은 제8회 방콕대회와 제4회 자카르타대회에서 각각 주최국의 요청에 따라 채택된 것으로 동남아시아지역에서 성행하는 종목이며, 골프는 제9회 뉴델리대회에서 처음 채택된 것이다.
서울대회에 새로이 추가된 종목은 태권도 · 유도 · 볼링 · 펜싱 등 4개로, 펜싱과 볼링은 뉴델리대회 때 주최국 인도의 요청에 따라 제외되었다가 부활된 것이며, 유도는 일본의 주장에 따라 채택된 것이다.
서울대회의 금메달 수는 모두 269개로 지난 1982년 뉴델리대회보다 73개가 더 책정되었다. 종목별 금메달 수를 보면 육상이 42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34개의 수영이다. 격투기종목 중에서는 레슬링이 20개로 가장 많은 금메달이 배정되었다.
1982년 제9회 뉴델리대회에서는 중국과 일본이 메달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이 대회에서는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중국과 대등한 경기수준을 보였다. 우리나라는 처음에는 65개의 금메달 획득으로 종합성적 2위를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목표는 중국이 일본의 수영 · 육상 금메달을 잠식해 주는 대신 우리나라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고, 중국에 금메달 1개 차까지 육박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가 처음 참가한 제2회 마닐라대회부터 제9회까지 획득한 금메달은 모두 110개인 데 비해 일본은 522개를 획득하였다. 우리나라가 평균 14개를 획득한 반면, 일본은 65개를 획득하여 그 수준 차이는 매우 컸다. 그런데도 결과는 우리가 월등히 우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일본이 대체로 경기력에서 저조하고 그들이 자신있었던 금메달을 중국이 많이 차지한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거의 모든 종목에서 기대 이상으로 분전하여 금메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복싱 · 태권도 · 양궁 · 유도에서 대부분의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탁구 · 배드민턴 · 체조 · 사격 등에서는 예상하지도 않은 금메달을 수확하였다. 우리의 금메달 93개는 뉴델리대회 금메달 28개를 제외하면 역대 대회의 총금메달 수보다 많은 숫자이다. 우리나라는 배구 · 농구 · 조정 등에서만 금메달을 놓쳤을 뿐, 취약 종목이던 육상 · 체조에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는 등 전반적으로 경기력이 향상되었음을 입증하였다.
육상 · 수영 · 양궁 등 경기에서의 좋은 기록은 금메달 이상으로 값진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세계신기록이 11개, 세계타이기록 2개가 수립되는 등 367개의 각종 신기록이 나왔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여자양궁은 박정아(朴貞娥) · 김미자(金美子)가 5개씩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김진호(金珍浩)와 함께 금메달을 차지하였고, 17세의 소년 양창훈(楊昌勳)은 일본과 중국의 백전노장들을 제압하면서 4개의 금메달을 차지하여 총 12개의 금메달 가운데 9개를 획득하였다.
금메달이 가장 많은 육상 · 수영 · 사격에서 우리가 따낸 금메달은 중국과 일본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 16개에 그쳤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각축장이었던 육상과 수영에서 임춘애(林春愛)와 최윤희(崔允喜)의 금메달은 값진 것이었으며, 또 남자육상에서 장재근 · 김복주(金福柱) · 김종일(金鍾鎰) · 김종윤(金鍾允) 등의 금메달도 우리나라 육상이 거두어 들인 큰 수확의 하나이었다. 특히, 임춘애는 800m · 1,500m · 3,000m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 여자육상 중거리의 새로운 강자로 대두되었다.
제9회 뉴델리대회에서 여자배영 100m · 200m와 200m 개인혼영을 석권, 3관왕을 차지했던 최윤희는 이번 대회에서 3관왕 2연패에는 실패하였으나, 일본과 중국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고 100m · 200m에서 다시 우승하여 우리나라 배영이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기록경기 다음으로 금메달 수가 많은 투기 및 개인경기에서도 예년의 대회와 같이 좋은 성과를 거두어 우리의 저력을 다시 한번 과시하였다. 특히, 복싱 · 태권도는 우리가 독무대를 이루었고 유도 · 레슬링에서도 강국으로 자처하는 일본 · 이란을 압도하였다. 8개의 금메달 중 5개 이상을 획득할 것으로 예상했던 일본은 2개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일본보다 2개 적은 2개의 금메달을 차지한 우리나라 유도는 이번 대회에서 세계 최강 일본을 제압하여 서울올림픽에서의 좋은 성적을 예고하였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복싱이 12개 전체급을 석권한 것은 역대 아시아경기대회 개인경기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레슬링에서 획득한 9개의 금메달은 예상 외의 소득이었다. 20개의 금메달 중 우리 선수가 9개, 일본 5개, 이란 4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1개씩을 획득하였다.
우리는 김영남(金永南) · 한명우(韓明愚) · 이정근(李正根) · 안대현(安大鉉) 등에게 금메달을 기대했으나 안대현이 금메달을 놓친 반면, 신예들이 크게 분전하여 당초의 목표를 초과달성하였다. 몬트리올올림픽대회에 참가한 양정모(梁正模)가 광복 후 첫 금메달을 차지하여 유망종목으로 각광을 받았던 레슬링은 무명의 신진들이 두각을 나타내어 이 종목의 앞날을 밝게 하였다.
복싱과 마찬가지로 전체급 우승을 노렸던 태권도는 한 체급을 제외한 7개 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내 종주국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펜싱은 중국이 최강국이며 우리나라는 2개 정도의 금메달을 예상하였으나 전체 금메달 8개 중 4개를 차지하여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과거에 체조종목에서 여자는 세계 정상급의 중국이, 남자는 일본이 독무대를 이루어 왔으나 이번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여자체조 2개 종목에서 세계 수준의 중국선수들을 제쳤고 남자는 일본을 눌렀다. 권순성(權純成) · 서선앵(徐瑄鶯) · 서연희(徐演希)는 독창적 연기를 연출, 우리 체조가 세계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남녀 배구, 남녀 농구가 모두 중국의 벽에 막혀 우승을 못했으나 일부 구기종목은 올림픽 금메달 가능성까지 보여주었다. 축구 · 하키 · 테니스 · 탁구 · 배드민턴 · 핸드볼 등에서 아시아 최강 또는 세계 정상과 겨루어 이겼으며, 만일 배구 · 농구가 우승을 했으면 구기종목을 석권하였을 것이다. 구기종목에서 가장 값지고 감격스러웠던 것은 탁구에서의 중국 격파와 남녀 하키우승이었다.
세계 최강 중국을 누른 남녀 탁구단체전의 우승은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최대의 개가였다. 여자탁구는 1973년 사라예보(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단체전 우승 후 계속 중국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 남녀단체팀이 나란히 중국을 격파한 것은 세계 탁구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사건이었다. 단체전뿐 아니라 남자 개인단식에서 17세의 유남규(劉南奎)는 중국의 세계챔피언을 물리치고 우승하여 세계 탁구계를 놀라게 하였다.
남녀 하키가 세계 최강인 파키스탄과 인도를 누르고 세계 정상에 오른 것 또한 감격적 승리였다. 하키는 그간 국내에서 비인기종목으로 일반의 무관심과 실업팀 하나 없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장해 왔다. 여자하키는 과거 뉴델리대회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바 있어 금메달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남자하키는 과거 전적으로 보아 세계 최강의 쌍벽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메달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배드민턴은 박주봉(朴柱奉)이 3관왕을 차지하는 등 7개의 금메달 중 3개를 획득하였다. 축구는 중동의 강호 사우디아라비아를 누르고 아시아경기대회사상 처음으로 단독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축구결승전은 아시아경기대회 16일간의 열전을 마감하는 대회 최종일 폐막식전에 벌어져 8만 관중을 열광시켰다.
과거 우리나라는 국제무대에서 여자 농구 · 여자 배구 · 여자 탁구 · 여자 양궁 등 주로 여자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어 우리 스포츠를 이끌었으나, 이 대회에서는 남자 탁구 · 남자 하키 · 남자 펜싱 등 남자 선수들의 활약이 이에 못지않게 두드러져 스포츠 한국의 미래를 한층 밝게 하였다.
국내외에서 부분적으로 미흡한 점이 다소 있었지만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시아는 물론, 서방 각국과 공산진영을 포함한 세계 각국은 놀람과 동시에 우리에 대해 큰 호감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상호이해와 신뢰의 바탕이 되어 일시적인 국위선양에 그치지 않고 장차 우리나라 발전에 소중한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성과의 으뜸은 무엇보다 아시아 민족사회에서 스포츠 분야는 물론, 문화 ·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측면에서 선도적 · 지도적 지위를 확립하였다는 데 있다.
이미 아시아경기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 국가의 인사들조차 서울대회가 기획 · 조직 · 시설 · 운영 등 기본적 요소에서부터 서비스 · 환경 등 간접운영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훌륭했다고 평하였다. 이 기회를 통해 아시아는 우리의 지적 역량과 고도의 문화수준을 뚜렷하게 목격하고 체험하였다.
두 번째 성과는 2년 뒤로 다가온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올림픽 유치 당시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국내외의 부정적 견해와 의구심은 이 대회의 성공적 수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올림픽대회 유치를 결정했던 국제올림픽위원회조차 분단국이라는 현실 때문에 우려하였고, 또 이에 편승하리라는 북한에 대한 경계도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서울올림픽 개최를 지지하고 적극적 지원을 했던 점을 자찬할 만큼 이 대회의 성공을 흡족해했으며, 파하드 회장은 서울올림픽대회 개최로 아시아스포츠가 세계로 비약할 것이 확실하다고 전망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또 대내적으로 서울올림픽대회를 향한 국민의 의욕과 의지를 하나로 묶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 동안 국외의 회의론보다 더 심각한 장애는 일부 국민의 1986 · 1988년의 양 대회에 대한 부정적이며 소극적 시각과 인식이었다.
경기운영의 성과 이외 또 하나의 성과는 경기력의 향상과 이를 통한 우리의 긍지와 잠재력의 재발견이었다. 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승전보는 그 동안 열심히 훈련하여 쌓아 온 경기력 향상의 결실이었다. 이는 과감한 투자와 선수들의 집념으로 이루어진 피나는 노력의 대가였다. 대회의 성공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불어넣어 주고 국민을 하나가 되게 하였으며 민족적 긍지를 되살리는 값진 계기가 되었다.
아쉬웠던 점은 자원 배분의 효율을 극대화하지 못한 것이다. 이후 서울올림픽대회를 위하여 대회의 각 분야를 철저히 분석하여 자원과 인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관리방안을 과제로 남겼다. 서울아시아경기대회는 서울올림픽대회의 시금석으로 서울올림픽대회의 성공에 대한 확신과 새로운 과제를 명백히 제시해 준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