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석굴 ( )

경주 석굴암 석굴 전경
경주 석굴암 석굴 전경
불교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 국보.
이칭
이칭
경주 석굴암 석굴, 석불사, 조가절, 趙家寺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북 경주시 불국로 873-243, 석굴암 (진현동)
유네스코등재유산
등록 구분
영어명
내용 요약

경주 석굴암 석굴은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 구조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정교한 계산 속에 배치된 아름다운 불상들은 완벽한 불국토를 연출한다.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전세계의 종교예술사에서도 빛나는 유산이다.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吐含山)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 국보.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부속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1995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제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석굴암의 창건

751년(경덕왕 10)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신문왕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석굴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청하여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개(龕蓋: 감실을 덮는 천장돌)를 만드는데 돌이 문득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에 분노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供養)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신앙의 소산이며, 치정자와 백성이 혼연일치된 민족정신의 응결체이다. 석굴암은 단지 김대성의 개인적인 발원(發願)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기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의 발원이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오악(新羅五岳)의 하나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靈岳)으로 존숭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東岳)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龍)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토함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을 이루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大王巖)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석탈해(昔脫解)가 동해에 상륙하여 토함산정에 오른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곧 동해로부터 서라벌에 이르는 최단통로가 바로 토함산을 통과해야 하며, 또 이 동악의 준령이 신라건국 이래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주는 중요한 군사적인 요새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역사(力士)였던 석탈해는 뒤에 동악의 산신이 되었고, 동해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신라의 국토방위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요충이었으며,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제일의 관문이었던 토함산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감은사(感恩寺) · 무장사(鍪藏寺) · 원원사(遠願寺) 등이 한 집안의 명복, 나아가서는 국가수호를 위한 이념으로 세워졌던 것처럼 불국사와 석불사도 역시 같은 뜻으로 창건되었던 것이다.

동악의 수호신이 된 석탈해, 그리고 동해의 호국대룡이 된 문무대왕, 이들 두 왕에 대한 숭앙의 정은 석굴암을 창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본 일이 없는 심정이었다.

둘째,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와 경덕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경덕왕대는 정치 · 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신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당시의 신라는 통일 초기의 수습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이러한 안정은 신라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평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문화는 국민총화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화엄(華嚴)의 도리를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그 정신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게 하였다.

경덕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진리의 성자이고자 했고, 이러한 정치이념은 조형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다.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여 구축한 석굴암도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과 신심을 지닌 경덕왕의 뜻에 크게 힘입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라기보다 경덕왕의 원찰(願刹)로서, 또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國刹)로서 경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 국민의 염원이었고,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 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석굴암의 역사

석굴암 변천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속하는 자료들 뿐이다.『불국사고금창기 (佛國寺古今創記)』와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가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에 속한다.

『고금창기』는 1703년(숙종 29)에 종열(從悅)이 석굴암을 중수하고 또 굴 앞의 돌계단〔石階〕을 쌓았으며, 1758년(영조 34)에 대겸(大謙)이 중수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수한 규모가 어느 정도의 것인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한, 정시한의 「산중일기」는 중수한 사실과는 직접 관계가 없으나, 기록할 당시의 석굴암의 현황을 자세히 말하고 있어 석굴암의 역사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88년 5월 15일에 정시한이 이곳을 찾았을 때 석굴의 전실과 후실의 석상(石像)들이 완전한 형태로 건재할 뿐만 아니라, 입구의 홍예(虹蜺:무지개 모양의 문), 본존상(本尊像)과 좌대석(座臺石), 주벽(周壁:가장자리의 벽)의 여러 조각들, 천개석(天蓋石)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때까지 석굴의 상태에 이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佛像如生).”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석굴의 보존상황이 온전했음을 여실히 입증하는 중요한 문구이다.

또한, 「산중일기」를 통해서 볼 때 석굴암이 불국사와 골굴암(骨窟庵)과 함께 당시에 잘 알려진 일종의 순례관광(巡禮觀光)코스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산중일기」의 작자 이외에도 많은 승려 · 시인 · 신도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겨주고 있다.

영조 때 남경희(南景羲)는 「우중숙석굴(雨中宿石窟)」과 〈석굴(石窟)」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시기의 이관오(李觀吾)는 「석굴암」을, 최천익(崔天翼)은 「유석굴증등여상인(遊石窟贈登如上人)」이라는 한시를 읊어 당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나타낸 바 있었다.

석굴암의 모습은 그림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입증되고 있다. 근세의 민속화가인 정선(鄭敾)은 1733년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 2권 가운데에 경주의 골굴과 석굴을 그려 넣었다. 이 화첩은 전실(前室)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실 입구에 목조전실을 첨가하는 데 귀중한 자료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200∼300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 유지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선 말기에 와서 석굴암은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다. 1962년에 시작된 대수리 때에 석굴암 부근의 노인들은 이 석굴을 가리켜 ‘조가절(趙家寺)’이라 지칭하였고, 그들의 어린 시절에는 향화(香火)와 공양(供養)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 바도 있다. 일본인들이 우편배달부에 의하여 굴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사실과 무관한 것이다.

1907년경 우연한 기회에 우편배달부가 일본인에게 석실이 있음을 알렸고, 그 말에 따라 발견했다고 전하여, 마치 석굴을 지하동굴에서 처음 발굴한 듯 과장하여 선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오히려 토함산에서 석불이 발견되었다는 극적인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그 뒤 일본인 무뢰한들이 수많은 탑상(塔像)들을 반출해 가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며, 적지 않은 파손행위까지 따르게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소규모적인 반출 및 탈취는 일제에 의하여 석굴 전체의 해체, 운반이라는 계획까지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가 이미 그들의 소유가 되자, 그들은 굳이 석굴을 해체하여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또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반발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1912년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寺內正毅)가 이곳을 방문한 뒤, 총독부는 석굴암 중수를 위한 대책을 수립하였다. 이 시기의 중수는 전후 세 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제1차는 1913∼1915년, 제2차는 1917년, 제3차는 1920∼1923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1차중수는 거의 완전 해체하는 복원공사였다. 이 때 직접적인 공사에 앞서 기초조사가 있었는데, 이 조사는 당시 석굴암의 퇴락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12년 6월 25일자의 현장조사복명서에 의하면, 석굴암은 황폐화되어 절박한 상황에 있다고 보고되었다. 즉,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으로부터 흙들이 들어오고 있으며, 구멍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본존불상까지 파손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1913년 10월에 착공된 1차중수는 그 1차연도에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架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 본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3차연도인 1915년 5월에 최종공정인 석굴재조립공사를 완료하였다.

이 당시 그들은 새로운 재료와 기법으로 등장한 시멘트의 효능을 믿고 이 석조물 조립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오늘날까지도 석굴암 보존상의 커다란 문제거리를 남기는 결과가 되었다.

석조물에 시멘트를 부가함으로써 석조물을 약화시켰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콘크리트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완벽한 정리를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의 교정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간 소요된 공사비는 1만 2,724원 54전이었다고 한다.

1차중수의 결점은 준공 후 2년이 못되어 굴 내의 누수현상으로 나타났다. 누수의 양이 점차로 많아져 1917년 7월에 그 방지를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이것이 2차중수이다.

600원의 공사비를 들여 진행된 이 공사는 콘크리트로 된 돔(dome) 표면에 석회 모르타르와 점토층(粘土層)을 마련하고, 이 원형돔의 외부에 방사선상의 암하수(暗下水)를 설치한 뒤 다시 그 위에 흙을 덮고 잔디를 까는 것이었다. 1917년 6월부터 약 1개월간에 걸쳐 작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공사는 굴 상부 봉토면(封土面)에 대한 응급조처에 그쳐 누수 · 오탁(汚濁)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없었으므로, 그 뒤 3년 만에 다시 대규모의 중수공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차중수는 최초의 중수과정에서 미술품을 손상시켰다는 것과 옛 주위의 경관을 파괴했다는 점 때문에 시행되었다. 굴 입구의 석축 및 홍예(虹蜺: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놓은 석축은 마치 터널과 같이 보인 점이 미술부문의 전문가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2차중수에도 불구하고 누수 및 침수의 현상이 계속되었으며, 굴 내에는 많은 습기가 차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근본적인 결점들로 인해 다시 수리를 행해야만 했다. 따라서 3차중수는 석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적 조건도 전적으로 수정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3일 기공하여 1923년까지 4년간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공사비 1만 6,985원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3차에 걸친 중수 이후에도 결로(結露) · 침수의 현상은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인 보수가 항시 뒤따랐다. 또한 1차공사에서 잘못 배치된 상(像)들과 굴의 구조도 그대로 묵과된 채,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못하였다.

8 · 15광복 후 석굴암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일본인들의 중수에서 빚어진 모순과 그로 인하여 발생된 가속적인 퇴락은 더욱 심해져 갔다.

1961년에 들어서 각계각층의 깊은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석굴암에 대한 조사, 예비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조사의 목적은 주로 석굴을 계속 퇴락시키고 있는 기상 · 누수 등의 자연현상과 불상면의 심한 풍화작용에 대한 조사와 일제시대에 잘못된 판단에서 재조직된 굴 자체의 구조 및 불상들의 위치배정에 대한 검토에 있었다.

여러 가지 측면의 조사와 연구에 이어서 석굴암의 전면적인 중수가 시작되었다. 침수 · 결로 등 습기를 피하기 위하여 굴 내의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고, 그에 따라 굴을 외기와 차단시키고, 인위적으로 석굴의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목조와즙(木造瓦葺:기와를 올린 목조건물)의 전실을 설치하여 외부의 변화 및 영향을 배제시켰고, 지하수를 굴 주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배수구를 설치하였으며, 콘크리트로 덮은 돔을 따라 흐르는 물도 역시 이 배수구를 통하여 처리하였다.

이 밖에도 석굴에 영향을 주는 자연조건을 일일이 제거하고, 일본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수정하였다. 굴 내 조각의 위치에 관하여는 팔부신중(八部神衆:불교를 보호하는 8가지의 신장) 가운데 가장 앞면에 있던 좌우 각 일상(一像)이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마주서게 굴곡지어 배치되었던 것을 다른 신중상과 일직선으로 병렬시켰다.

또한, 이때에 수광전(壽光殿) · 3층석탑 · 요사 등의 부속건물과 유적 등도 보수하였다. 이 복원작업은 1962∼1964년까지 3년이 소요되었다.

석굴암 석실의 구조

먼저 전실에 들어서면 비도(扉道)의 정면에서 본존불을 볼 수 있다. 전실은 너비가 약 3.5칸이고, 길이가 약 2칸 정도 된다. 좌우의 석벽에는 4체(體)씩의 팔부신중이 각각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전면 좌우 석벽에는 입구를 향하여 2체의 금강역사가 서 있어 항상 비도를 지키고 있다.

이 전실의 구조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여러 가지 이설이 있어서, 아직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정을 짓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전실에서부터 몇 걸음 나아가 좌우의 금강역사를 보면서 비도에 들어가면 약 2칸의 넓이에 길이가 1.5칸인 공간이 있다. 이 비도의 양측에는 좌우 2체씩 4체의 사천왕(四天王)이 조각되어 있다.

상부는 아치형으로 덮여 있으므로 원래 전실에 목조건축이 없었을 당시에는 바로 여기서부터 석굴의 내부로 들어간다는 인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석굴의 입구에는 좌우 2기의 석주(石柱)가 있다. 한 변이 8촌인 팔각형 연좌(蓮座) 위에 서 있고, 중앙에도 연판(蓮瓣)의 장식이 가해져 있다. 이 석주는 비도와 굴을 구분짓는 경계의 뜻으로 건립되었다.

굴의 평면은 원형이고 좌우의 지름은 6.8m, 앞뒤의 지름은 약간 좁아서 6.58m이다. 중앙에서 가볍게 뒤로 처진 곳에 높이 약 1.6m, 지름 약 3.7m의 석련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높이 약 2.72m의 그 숭고한 모습에는 자연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굴의 주위에는 10개의 요석(腰石: 굴의 벽을 이루는 돌)이 놓여 있다.

요석의 높이는 약 0.2m, 너비 1.8m, 그 위에 다시 높이 약 2.42m, 넓이 약 1.21㎡의 화강암 15면을 병렬시켜 석벽으로 삼고, 각 면에 엷은 부조(浮彫)의 석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 바로 뒤 중앙에는 십일면관음보살의 입상(立像)이 조각되어 있다.

그 좌우로 각각 5체씩 합하여 10체의 십대제자입상(十大弟子立像)이 조각되었고, 다시 그 좌우로 각각 2체씩의 천(天) 또는 보살상(菩薩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조상이 새겨진 돌 위에 다시 긴 이마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또 한 층의 새로운 다른 세계가 전개된다.

본존불의 바로 뒤 십일면관음의 위쪽으로는 복선단판(複線單瓣: 겹선으로 그린 홑잎의 연꽃)의 광배(光背)가 새겨져 있고, 그 좌우로 각 5개의 작은 감실(龕室: 불상 등을 안치하는 작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는 문수(文殊) · 유마(維摩) · 지장(地藏) 및 기타의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좌우 4체씩 모두 8체뿐이며, 나머지 두 개의 감실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 누군가에 의하여 일본으로 반출된 이래 지금까지 비어 있게 된 것이다.

천장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그 아치는 교묘하게 쌓여진 석재에 의하여 아름다운 조화와 기교의 묘미를 나타내 주고 있다. 본존불상 바로 위에는 하나의 큰 돌을 중심으로 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단선복판(단선으로 그린 겹잎의 연꽃)의 연화(蓮華)를 새겨 놓았다.

이 천개(天蓋: 닷집. 불상 위에 세워진 집 모양의 구조물)에는 전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석굴암을 지을 때 돌이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천신이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얽힌 세 줄의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굴 안의 조상은 모두 24체이다. 그리고 십일면관음보살상 앞에는 크기가 작아도 매우 탁월한 솜씨로 만들어진 5층탑이 안치되어 있었다. 지금은 누군가에 의하여 어디로 반출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것이 일본으로 반출된 사실만은 확실하다. 전실의 조상까지를 합하면 현존하는 조상은 모두 38체에 이른다.

이 숫자가 창건 당시와 같은 숫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비도로부터 시작하여 석굴 내부에 있는 것에만 국한시켜 말한다면 감실 중의 잃어버린 2체를 예외로 하고, 나머지 것은 모두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석굴암의 조각상

본존불

석굴암 본존불상은 그 조각의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며, 전세계의 종교예술사상 가장 탁월한 유산이다.

전실의 중앙에 서서 깊숙한 곳에 안좌한 본존불(本尊佛)을 예배할 때 연화로 된 아름다운 두광은 더욱 본존불의 영광을 드러내고, 힘찬 수법으로 표현한 복선단판의 두광과 본존불 자신의 소박하고 장중한 모습은 신성한 조화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광을 불상에 직접 부착시키는 일반적 방식과는 달리 간격을 두고 멀리 배치하면서도 그 거리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입체적인 조화감을 나타낼 수 있게 한 구성은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다.

반쯤 열린[半開] 눈, 미 그 자체를 나타내는 듯한 온화한 눈썹, 그리고 미간에 서려 있는 슬기로움, 방금이라도 설법할 듯한 자애로운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굽타식의 나발(螺髮:달팽이 모양으로 감아진 머리카락) · 백호(白毫:눈썹 사이에 난 흰 털) 등 하나하나의 부분이 생명력을 충분히 간직한 깨달음의 모습으로 표현된 얼굴은 인자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1913년의 중수 때 비도와 석굴원실과의 중간에 있는 두 석주 윗부분에다 아치형의 양석(梁石)을 가로지름으로써 광배의 온전한 모습을 전실에서 모두 볼 수 없게 되었다. 본존불이 안좌하고 있는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더욱 신비의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본존의 모든 표현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인공적인 부자연스러움이 없이 부드럽게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한 간다라식의 어깨 선, 두 팔과 두 손, 가부좌(跏趺坐)를 한 두 다리와 무릎, 그 모든 선들이 어느 한 부분도 허점을 드러내고 있는 곳이 없다. 본존불의 손은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印相: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땅을 짚어 부처의 영광을 증명하게 하는 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도가 이루어져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몸에 걸쳐진 옷,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로 자연스럽게 늘어진 엷은 옷자락은 역시 탁월한 기교뿐만 아니라, 숭고한 종교성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불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소박성 · 순수성 · 자연성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본존이 경전에 나타나는 어느 부처님을 표현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어 왔고, 대체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견해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 본존불은 그 위치로 보아서나, 또는 불국사와의 관련에서 판단할 때 석가모니불이 아니라, 서방에 위치하는 극락정토(極樂淨土)의 본존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여 멀리 동해로 그 시선을 돌리고 있는 이 본존불, 또 그 바로 뒤에 본원을 이 현세에서 구현하는 보처보살로서의 관음보살이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추정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건 아미타불이건, 결국 그 부처님들이 근본적으로 염원하는 본체는 형상과 언어를 넘어선 일심(一心), 즉 공정하고 강대하며, 편협하지 않고 무상하지 않은 지혜와 자비가 구족된 영원한 ‘하나의 마음’이다.

많은 불전들이 일심의 속성을 아름답게 묘사하였고, 일심의 능력을 무한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본체로서의 불성(佛性), 그것은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은밀한 것이기도 하다.

그 양상과 기능이 때에 따라 보고 듣는 많은 사람들에게 달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이 본존불 앞에 예배드릴 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마음속에 숨어 있는 영원하고 지극히 복되고 자유롭고 깨끗한 마음을 드러내도록 하는 일 이외에는 더 중요한 일이 없는 것이다.

본존불의 석련대(石蓮臺)는 백색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교묘한 형태와 아름다운 조각의 솜씨는 더욱 본존불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며, 안정되고 굳센 느낌을 가지게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신라의 불상좌대석으로는 가장 완전하고 우수한 것이다. 맨 밑에는 평면 원형으로 된 2단 기대(基臺)가 있다. 그 위에 이어서 복련대(伏蓮臺: 꽃잎이 아래를 향해 조각된 연꽃)가 새겨져 있는데, 그 복련의 연판(蓮瓣: 연잎)은 32개이며 매우 웅대하고 화려한 조각 수법을 나타낸다.

그 윗부분은 다시 3단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제일 위의 것은 정팔각형으로서 직접 석련대의 체(體)를 받들고 있다. 또한, 각 모서리에는 기둥[隅柱]를 새겨 놓았고, 다시 그 주위에 5각형 모양의 기둥[五角柱] 여덟 개를 안정시켜서 변화를 주고 있다.

위의 좌대는 밑의 복련대와 서로 대응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그 밑으로 3단을 만들고 위를 향한 연꽃무늬[仰蓮] 32개를 새겨놓고 있다.

그 윗부분은 평평하여 본존불을 모실 수 있게 되어 있다. 전체높이는 약 3.26m, 최하부의 지름은 3.63m, 그리고 윗좌대의 지름은 2.72m이다. 석굴의 본존불상 바로 뒤, 전면을 향한 제일 중앙에 지름 2.24m의 크고 둥근 돌을 새겨 넣어 두광을 만들었다.

그 주위는 36개의 꽃잎을 가진 연꽃이 조각되어 있고, 전체를 오목한 거울면처럼 해서 전실에 서서 본존을 예배할 때 바로 본존불의 두광이 되도록 구상되어 있다.

십일면관음보살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11개의 얼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본존불 바로 뒤에 관세음보살이 오고, 그 본존불 앞으로 좌우에 문수 · 보현의 두 보살이 조화롭게 배열된 석굴암 원실의 배치는 영원한 힘의 원천과 양상과 기능의 질서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조상은 각각 그 하나하나에 조화와 질서가 있고, 그 모든 것은 전체로서 또한 하나의 조화와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조화와 질서는 정적이며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동과 정이 혼연일치를 이루는 조화이며 질서인 것이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보살은 일제 시기에 9면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인이 2면을 꺼내 감으로써 9면이 되었던 것이며, 원래는 11면이었다.

『십일면관음신주심경(十一面觀音神呪心經)』에는 십일면관음의 형상과 의미가 설명되어 있는데, 그 형상은 석굴암 관세음보살상과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인다.

십일면이라고 한 것은 관음보살의 정면인 본얼굴을 제외하고 두부에 부가된 면이 11면이라는 말이다. 경에는 두부 전면에 3면이 있고, 그 좌우에 각각 3면, 그리고 후면에 1면, 정상에 1면, 모두 11면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굴암의 관음은 전면에 화불 1면이 있고, 좌우에 각 3면, 위쪽에 3면, 정상에 1면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이 11면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석굴암의 관음상이 부조이기 때문에 부득이 생긴 변화에 불과하다. 이 11면은 다방면의 기능과 양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앞의 3면은 자상(慈相)인데 선한 중생을 보고 자심(慈心)을 일으켜 이를 찬양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의 3면은 진상(瞋相:화난 얼굴)인데, 악한 중생을 보고 비심(悲心)을 일으켜 그를 고통에서 구하려 함을 나타낸 것이요, 또 오른쪽의 3면은 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이를 드러내어 미소짓는 모습)이며, 정업(淨業:올바른 수행)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는 더욱 불도에 정진하도록 권장함을 나타낸 것이다.

뒤의 1면은 폭대소상(暴大笑相)으로서 착한 자, 악한 자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대도량을 보이는 것이요, 정상의 불면(佛面)은 대승근기(大乘根機:남을 위해 보살행을 닦는 사람)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불도의 가장 지극한 진리[究竟]을 설함을 나타낸 것이다.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그러나 늘 자비로운 웃음을 잃지 않고, 그러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크나큰 미소 속에 중생을 안주(安住)시키려는 대자대비의 의미가 응결되어 있는 것이다.

대범천과 제석천

굴 내의 본존불을 둘러싼 4주에는 본존불 바로 뒤의 십일면관음보살을 중심으로 각각 좌우에 7구씩 입상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입구에 접한 첫 상은 본존불을 향하여 오른편의 것이 제석천(帝釋天)이라는 하늘의 왕이고, 왼편의 것이 대범천(大梵天)이라는 하늘의 왕이다. 이 두 개의 천은 『법화경(法華經)』을 비롯한 모든 대승경전에서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신화적 존재인 불제자들이다.

대범천은 욕계(欲界)를 벗어난 색계(色界) 제일의 단계에 위치하면서 이 사바세계(裟婆世界)를 다스리는 천왕이며, 제석천은 사왕천 다음의 높이에 위치하는 33천의 천왕이다.

대범천의 조상은 그와 한 쌍을 이루는 제석천과 똑같은 양식의 두광, 즉 연주(連珠)로 엮어진 도란형(倒卵形:달걀을 거꾸로 놓은 모양)의 두광으로 장식되어 있고, 또 꽃같이 흰 불자(拂子:먼지떨이처럼 생긴 불구)를 오른손에 쥐어 어깨 위에 쳐들고 있다.

머리에는 두 상 모두 비슷한 보관(寶冠)을 썼고, 각각 석벽의 굴곡에 따라 보살과 십대제자들 쪽을 향하여 얼굴과 몸을 돌리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두 얼굴의 표정에는 오직 정적만이 깃들이고, 거친 욕심이 다 사라져버린 안온한 마음의 경지만이 드러나 있다. 천중의 천인 본존불 앞에 경건하고 의연한 자세를 헝클지 않고 있다.

제석천은 한층 더 높은 색계의 하늘에서 아직도 욕심을 온전히 끊지 못한 천상계의 존재들을 위하여 불자와 금강저(金剛杵: 악마를 항복시키는 지혜의 무기)를 들고 그들을 굽어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금강저는 깨지지 않는[不可壞] 지혜를 상징한다. 한결같이 그 눈을 하계로 돌리고 있는 두 천왕의 유연한 모습은 영원한 평화를 여실하게 표현한 예술의 극치이다.

대범천은 왼손에 군지(軍持: 깨끗한 물을 담은 병)를 들었다. 중생의 번뇌를 털고 씻어내는 도구로써 불자와 물병을 들고 있는 것이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굴 안쪽의 주벽에 새겨진 조상 가운데 입구에서 두번째의 상으로 대범천 · 제석천의 2천과 십대제자의 중간에 위치한 보살상이다. 위치로 보거나, 머리의 관, 구슬 등 의 물건을 보더라도 이 두 조상은 보살상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일본인들은 이 두 조상이 관음(觀音) · 세지(勢至)의 두 보살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낸 일도 있었으나, 확언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고, 다만 보살상으로서만 인식해 왔다.

근래에 이르러는 이 두 보살상을 문수 · 보현의 두 보살로 부르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의 제2상은 그 오른손에 범협(梵莢:범어 경전의 묶음)을 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흔히 보현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문수보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의 제2상은 그 오른손에 보발(寶鉢: 둥근 그릇)을 들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문수와 항상 한쌍을 이루는 보현보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두 천왕이 넓고 평평한 하나의 큰 잎사귀[荷葉] 위에 섰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새겨진 연화대 위에 선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두 천왕과 마찬가지로 두 보살상도 그 몸과 얼굴 전체를 중앙의 본존불을 향하여 돌리고 있다. 이는 굴의 모든 조상이 일심의 표현인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나의 통일되고 조화로운 질서를 갖추고 있는 사실을 나타내는, 깊은 배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두 보살상은 한결같이 원형의 소박한 두광을 지닌다. 머리에는 삼면의 보관을 썼고 귀와 가슴 등에 구슬로 된 장식이 달려 있다. 천의(天衣)는 결코 욕심으로 점철되고 있는 현세의 불행한 과보 속에 얽매어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좌측의 보살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경권(經卷)이므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임을 알 수 있다. 우측의 보현보살은 이 세상에서의 교화라는 그의 원(願)을 계속 충실히 행함을 입증하듯이 손에 그의 행이 원만함을 상징하는 둥근 보발을 들고 있다.

십대제자

석굴암 십대제자((十大弟子: 불타의 가장 뛰어난 10명의 제자)의 부조상은 세계불교미술사상에 있어서도 극히 드문 대형조상들로서, 그 특징 있는 표현과 예술성으로 말미암아 높이 평가받는 조각들이다. 중국에서 또는 그 이전 인도에서도 십대제자상은 많았지만, 이같이 박진감을 갖춘 조상으로 표현되지는 못하였다.

지금은 그 흔적이 잘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일제 때에 몇 차례 수리를 겪었을 당시에는 각 조상이 새겨진 석벽은 모서리들이 크게 손상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일제시대에 수리할 때, 십대제자의 상들이 그 배열에 있어서 원형 그대로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현재에도 적지않은 의심을 가지도록 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어느 상이 과연 어느 제자를 표현하는 것이냐 하는 구체적인 단정을 내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석굴암의 일반적인 구성 원칙에 비추어보아 본존을 둘러싼 5개의 상들이 좌우로 차례차례 교차적으로 배열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좌측 제1상을 사리불(舍利佛)로 보면 우측 제1상은 목건련이 된다.

그러한 순서로 볼 때 우측의 상들은 전면에서부터 제1 사리불, 제2 가섭, 제3 부루나, 제4 아나율, 제5 라후라라 할 수 있다. 또한,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으로 보아서는 제1 목건련, 제2 수보리, 제3 가전연, 제4 우바리, 제5 아난타의 순서로 배정되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 중 특징적인 조각상을 살펴보면, 좌우 첫 번째 두 제자상들이 단연 다른 모든 상에 비하여 가장 연로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고, 또 그 손에 특수한 지물(持物)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우측에서 세 번째의 부루나존자상은 오른손에 정수(淨水)병을 들고 왼손을 위로 올리고, 두 발은 살짝 벌린 채 생각을 하면서 널리 설법을 하고 있는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 달리, 좌측으로 세 번째에 있는 마하가전연은 왼손을 옷 속에 넣은 채 오른손을 올려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으로 둥근 원의 모양을 하고, 셋째손가락을 쭉 펴들어 설법의 상을 표시하고 있는데, 두 발은 활짝 밖으로 벌렸고, 얼굴은 자신에 넘치고 매우 굳은 의지를 가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리고, 우측으로부터 네 번째 아나율은 수행을 하다가 눈이 멀고 천안(天眼)을 얻은 자로서 조각에서도 눈에 이상이 있음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손에 무엇을 쥐고 있는 듯이 표현한 것은 바로 천안의 능력이 주어진 것을 표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좌측으로 네번째의 우바리는 계율 제일의 제자로서 율사(律師)다운 면모로 표현되었으며, 그가 왼손에 가지고 있는 것은 걸식 때 쓰는 바루[鉢盂:그릇]이다.

끝으로, 석굴암 조상 안에서 라후라는 십일면관음보살의 바로 우측에서 오른손을 멀찌감치 활달하게 펴고, 옷자락을 잡은 채 두 발을 활짝 벌리고 정면에서 그 중후한 얼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감실의 조각상

굴 안의 윗단에는 좌우에 다섯 개씩 10개의 반구형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안에는 다양한 모습의 조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이로 인하여 석굴은 더 깊고 넓은 인상을 풍기게 되며, 벽면의 입체감이 굴의 신비성과 장중성을 더 한층 배가시키고 있다.

이는 천연의 암굴이 아닌 석굴암을 중국이나 인도에 있는 천연의 석굴사원보다도 더 잘 조화된 균제미(均齊美)를 가진 천연의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중요한 비방이 되었다.

아랫단에 본존불을 둘러싼 조각상이 모두 입상이었던 것과는 달리, 윗단에는 좌상인 보살상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한결같이 기쁨에 넘쳐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듯한 이들의 모습은 아랫단의 십대제자를 비롯한 조각상들이 경건한 수행과 기도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 모습과 극히 아름다운 대조를 이룬다. 석굴암에는 갖가지 인간의 가능한 덕성과 면모가 다 함께 표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상에 나타난 원만함, 십일면관음상에 나타난 인격의 절정, 대범천과 제석천 등의 천상적 향기,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자비, 십대제자들의 경건한 침묵, 금강역사와 사천왕의 용맹성, 팔부신중에 나타난 형이하학적 능력의 승화, 그리고 악귀와 사귀의 비극적 운명, 이러한 모든 양상 위에 감실 안의 보살들이 보여주는 환희가 더해진다. 좌우 각 다섯 개의 감실은 본존불의 앞뒤를 피한 나머지 벽에만 조성되어 있다.

본존불의 전면 상벽은 아무 손질도 가하지 않은 평면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 뒤 십일면관음보살의 머리 위 널찍한 평면공간에는 연화문으로 장식된 커다란 원형의 두광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이 굴의 중심이 본존불과 십일면관음보살이며, 윗단 감실 안의 보살들은 그 찬미자, 그 천상적인 사자의 임무를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천장은 천공(天空)을 상징한다. 이 감실들이 천공과 지상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사실에서 대승불교의 보살현상을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본존불을 향하여 좌우 양측의 제1감실은 현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공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첫 감실에도 분명히 무엇인가가 봉안되었던 것 같지만, 아무런 자료가 없으므로 정확한 것을 밝힐 수가 없다. 그러나 감실을 만들어 놓고 아무것도 안치하지 않은 채 공간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석굴암의 경우에는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에 옥으로 만든 보살상을 안치하여 해가 본존불의 미간을 비출 때 백호의 반사광이 이 보살상에 비치게끔 하였다고 하며, 일본인들이 반출하여 갔다고도 한다.

우측으로부터 제2상은 다른 상과 마찬가지로 연화대 위에 앉아 있다. 약간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으며, 앉은 자세는 가부좌가 아니다. 극히 편안하게 앉은 모습이 자연스럽다.

얼굴과 머리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잘 알아보기 힘드나 보관을 썼고, 머리에는 영락(瓔珞)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그 장식물이 길게 좌대 위에까지 늘어지고 있다. 오른팔은 굽혀서 위로 올리고 손에 무엇을 들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왼손은 극히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얹어 놓았는데 무슨 인상(印相)을 짓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아하고 원만한 모습이다. 다른 조상들, 특히 아랫단의 조각상의 경우와 같이 천의의 주름이 생동적이다. 높이는 93㎝이다.

우측으로부터 제3상은 왼쪽다리를 세워 그 무릎 위에 팔을 놓고 손가락을 편 손등으로 턱을 받친 채 사유(思惟)하는 상이다. 오른손으로는 좌대를 짚었고, 머리에는 역시 영락이 장식되어 있고 보관을 썼다.

제2상에는 목걸이가 보이지 않았으나, 여기에는 구슬을 낀 목걸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유려하고 규격을 무시한 자연스러움이 있으며, 무엇인가를 경청하는 듯, 또는 명상하는 듯하다.

용모의 아름다움과 또 어깨에 늘어진 머리카락 같은 모습을 들어 이 상을 여인상으로 보기도 하였고, 또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의 유사성을 들어 이 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보기도 한다. 높이는 86㎝이다.

우측으로부터 제4상은 두광의 파손 정도가 제일 심하다. 이 상은 다른 상과는 달리 정면을 향하고 앉아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폈고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펴고 가운데 세 손가락을 가볍게 굽힌 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 위까지 올려놓았는데, 그 손가락 모습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가운데 세 손가락을 굽히고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만을 펴고 있는 듯하다.

우측 4상 중 가부좌를 틀고 있는 유일한 상이다. 그 밖에 머리에 두관을 쓰고 영락으로 장식하였으며, 또 그 장식이 길게 늘어진 것, 천의의 모습 등은 다른 조상과 별로 다름이 없다. 높이는 95㎝이다.

우측으로부터 제5상은 몸을 오른쪽으로 돌린 모습이며, 가부좌를 틀지 않았다. 두관 · 영락 · 천의 등이 모두 다른 상과 같지만, 손가락의 인상만은 특이하다.

두 손 모두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만이 굽혀 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다 펴고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과 평행되게 구부렸고 살짝 손목을 쳐들었다. 그리고 왼쪽 팔은 배꼽 위로 가지고 와 왼손의 손바닥 안을 펴서 보이고 있다. 높이는 90㎝이다.

좌측으로부터 제2상은 우측 제5상과 매우 흡사하며, 몸의 자세가 좀더 앞으로 굽혀져 있다. 그러나 그 굽힌 자세는 매우 유연하며, 좌측 제5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나타낸다.

또한, 손가락도 앞의 상이 가운데 두 손가락을 펴고 나머지 세 손가락을 굽혔던 것과는 달리, 가운데 두 손가락이 굽혀지고 나머지 세 손가락이 펴져 있다. 이 상은 현존하는 상들 중에서 좌측 제3상과 더불어 가장 선명한 선을 보여주는 상이다. 높이는 94㎝이다.

좌측으로부터 제3상은 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놓여져 있으며, 가운데손가락을 가볍게 굽히고 있다. 왼손은 가슴 위에서 보주를 들고 있다. 천의와 두관 · 영락 등은 다른 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정상(頂上)에 화불(化佛: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는 부처)을 지닌 점으로 보아 이 상을 관음보살로 보고 있다. 높이는 94㎝이다.

좌측으로부터 제4상은 원정무발(圓頂無髮:머리를 깎아 둥근 머리를 그냥 남긴 것)의 가부좌상이다. 오른손은 가슴 근처까지 자연스럽게 올렸고, 왼손은 배꼽 위에 늘어뜨린 채 보주를 받들고 있으며, 오른손 손가락으로는 엄지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상은 정면을 직시하는데, 그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극히 엄숙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흔히 지장보살(地藏菩薩)이라고 상정되고 있다. 높이는 89㎝이다.

좌측으로부터 제5상은 다른 조각상과는 전혀 색다른 상이다. 얼굴은 노안으로 보이며, 머리에는 두건을 쓴 것 같고, 옷은 장의(長衣)인 것 같으며, 전체가 완성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이다. 좌대는 연화좌대가 아니라 15㎝의 네모난 좌대[方座] 위에 앉은 자세이며, 허리를 굽히고 오른쪽다리를 세워 좌를 향하여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형태가 속인임이 분명하므로 지금까지 이 상은 유마거사(維摩居士)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두광이나 배광도 없다. 높이는 95㎝이다.

사천왕

사천왕(四天王)은 수미산 중턱의 동 · 서 · 남 · 북 네 지역을 관장한다는 천왕이다. 동방에는 지국천(持國天), 서방에는 광목천(廣目天), 남방에는 증장천(增長天), 북방에는 다문천(多聞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천왕이 있다.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맞이하는 문턱에 좌우 각각 2상씩 병렬된 사천왕의 조각이 있다. 본존을 향해서 우측에 있는 두 천왕상 중 처음에 있는 상이 동방지국천이고, 그 옆의 좌측에 있는 상이 북방다문천이다.

지국천왕은 두 손에 칼을 들고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악귀(惡鬼)를 밟은 모습을 하고 있다.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아주 용맹스러운 무사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 있다. 과거에는 이 조각상에 채색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신라 때의 것이 아니고 후대의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인 조사자들이 기록해 둔 바를 보면, 지국천의 허리 부분과 밟히고 있는 사귀(邪鬼)의 일부에는 빨간빛 · 녹색 · 청색 등의 채색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다문천상은 얼굴을 북쪽으로 돌리고 왼쪽에는 옷자락을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위로 들어올려서 보탑(寶塔)을 손 위에 올려 놓고 있다. 이 보탑은 일제 시기 무렵, 수리할 때에 떨어져 나가서 그 손에 무엇을 들었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지만, 1962년의 대수리공사 때 땅 속에서 그 보탑의 파편이 나옴으로써 다문천의 지물인 것으로 판명되어 현재와 같이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이 두 천왕은 복장도 거의 비슷하고 그들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도 상당히 비슷하다. 악귀의 모습이 이 조상에서처럼 실감나게 표현되기는 흔하지 않은 것이다.

본존불을 향해서 좌측 벽에 있는 두 천왕상 중 처음에 있는 상이 남방증장천이고 그 우측의 것이 서방광목천이다. 증장천은 다문천과 대각선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광목천은 역시 대각선으로 지국천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증장천의 모습은 지국천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나, 증장천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이나 광목천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들은 그 이웃 벽에 있는 악귀의 모습이 서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둘 다 엎드려 있고, 하나는 동남쪽을 향하고 또 하나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광목천상은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서 둘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굽히고 나머지 다른 세 손가락은 폈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발 밑에는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이다. 위의 옷은 갑옷이고 아래 옷은 평범한 옷이지만, 얼굴 부분이 딴 돌로 새겨진 것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나중에 삽입된 것이 틀림없으나, 언제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금강역사

본존불이 있는 굴의 입구 좌우 양쪽에는 웅건하고 용맹한 모습의 매우 역동적인 두 개의 조상이 있다. 이들을 금강역사(金剛力士) 또는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 부르며, 언제나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이 있다. 이 역사가 단순히 힘센 자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춘 존재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의 역사는 입을 크게 열어 “아”하고 소리를 내는 모습이고, 우측의 역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빈틈 없는 방어의 자세를 갖춘 모습이다.

밀교(密敎)에서는 이 역사들에게 많은 신비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입을 열고 “아” 소리를 내는 듯한 역사를 ‘아’금강역사, 입을 다물고 있는 역사를 ‘훔’금강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는 산스크리트문자의 첫째 글자이고, ‘훔’은 그 끝 글자로서 시작과 끝을 표시하는 두 글자이다.

둘 다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은 내린 채, 아무런 무기도 가짐이 없이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전신에 생동하는 힘, 서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날쌘 동작의 순간을 포착한 듯한 옷자락, 무서운 표정, 침범할 수 없는 표정이면서도 조금도 악의가 없는 얼굴, 그것은 신라 무인의 면목을 방불하게 하는 것 같고, 중국이나 일본의 금강역사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일제 때의 제1차수리 때에 굴 내에 쌓인 흙 속에서 금강역사상의 두부 하나와 왼팔 하나, 왼손 하나가 소보탑과 더불어 발견되었다. 머리의 크기는 56㎝, 왼팔의 길이는 47.5㎝, 왼손은 19.6㎝라고 보고되었다.

이는 현존 금강역사상이 여러 차례의 조각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 작품임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이 조상보다도 앞서 있었던 조각상이 파손된 뒤에 새로 조성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팔부신중

전실에 들어서서 좌우 양벽에 각각 4구의 상이 있는데, 그것을 팔부신중(八部神衆) 혹은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권속(眷屬) 또는 불교를 수호하는 신중들의 조상이다.

현재의 조상에 나타난 각 상이 천룡팔부의 어느 상을 나타내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왔지만, 새로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지금 배열된 팔부신중의 순서는 반드시 일반적으로 각 경전에서 열거되는 바와 같은 순서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순서대로 보면, 대체로 부처님을 향해서 우측으로 첫 번째가 가루라(迦樓羅), 두 번째가 건달바(乾闥婆), 세 번째가 천(天), 네 번째가 마후라가(摩喉羅伽)이며,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으로 입구에서부터 아수라(阿修羅) · 긴나라(緊那羅) · 야차(夜叉) · 용(龍)의 순으로 되어 있다.

가루라는 두터운 옷을 입고 신을 신었는데, 왼손에는 삼지창(三枝槍)을 쥐고 있고, 두 귓가에는 새의 날개 모양의 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상에 비해서 훨씬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달바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에는 군지, 즉 깨끗한 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다. 이것은 건달바가 천상에서 지키는 소마의 영약(靈藥)을 담은 그릇으로 봄이 타당하다.

천은 머리 위에 화염을 표시하고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후라가는 오른손에 칼을 쥐고, 왼손은 가볍게 구부러진 손바닥을 드러내보이고 있다. 이 손의 모습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것이 복행(服行), 즉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생태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아수라의 조각은 머리와 발 부분이 없어진 형태로 있으나, 삼면육비(三面六臂:세 얼굴 여섯 개의 팔)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고, 옷은 아수라의 특징 그대로 별달리 입은 것이 없다. 다만 가볍게 부분적으로 천을 감고 있을 뿐이다.

배에는 악귀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악귀를 정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긴나라상은 머리를 기르고 단정하게 서 있으며, 왼손에 삼차극(三叉戟)을 쥐고 있다.

야차상은 머리 위에 사자를 이고 있고 가슴 밑에 밧줄을 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용은 머리 위에 용을 이고 있고, 왼손에는 구슬을 쥐고 있다. 용은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된 신중(神衆)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매우 중요시되었고, 호국의 선신으로도 간주되어왔다.

석굴암의 기타 문화재

삼층석탑

석굴의 동쪽 언덕에는 단아한 모습을 한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다. 일제 때에 도괴(倒壞)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해체한 후 복원하였다가, 1963년 기단 부분이 다시 흙에 파묻혔기 때문에 복원하였다. 기단은 2중이며 모두 8각으로 된 점이 다른 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는 네모난 모양[方形]의 탑신(塔身)이 있고, 그 위에 옥신(屋身:탑의 몸체 부분)과 옥개석(屋蓋石: 옥신 위에 덮는 돌)을 올려놓고 있다. 네모난 모양의 탑신은 현재 경주 남산의 용장리 계곡에 있는 용장사지원형탑(茸長寺址圓型塔)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형태이다.

기단의 높이가 1.2m이어서 탑 전체 높이의 약 5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1층 옥신은 매우 높고 2층 · 3층은 갑작스럽게 줄어버린 듯한 느낌을 주지만, 전체적인 균형은 비교적 잘 조화되어 있다.

3층탑의 위에는 단면이 네모난 노반(露盤:탑꼭대기의 기와지붕 같은 구조물)을 두고, 방형에 가까운 둥근 모양의 복발(覆鉢:탑의 꼭대기에 그릇을 엎어놓은 것같은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놓았으며, 상륜부(相輪部)의 나머지는 없어졌다. 이러한 형식은 신라 탑파에서는 예외적인 것인데, 이 탑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처마는 수평선을 이루고, 추녀의 전각(轉角)은 무척 경쾌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전체 높이는 3.03m이다.

수광전

수광전(壽光殿)은 승방(僧房)으로 쓰이던 집이었다. 이 건물이 창건 당시부터 있어 왔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고, 자그마한 팔작지붕의 건물이었던 것을 1963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개축하여서 현재는 휴게실 겸 관리사무실로 쓰고 있다.

원래는 두 칸짜리 익사(翼舍: 건물에 잇대어서 지은 방)가 있었는데, 그 한 칸은 방으로, 한 칸은 부엌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개축할 때에는 이 익사를 완전히 철거하고 본채만을 수리하였으며, 철거된 자리에는 새로 방을 만들고 마루도 깔아 현재 종무소(宗務所)로 쓰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三國遺事)』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한국의 사찰 2 석굴암』(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
집필자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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