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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漁村)

촌락개념용어

 바다·강·호수에서 수산업에 주로 의존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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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 풍경
분야
촌락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바다·강·호수에서 수산업에 주로 의존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촌락.
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인 데다가 3,305개의 도서를 가지고 있어 해안선의 길이가 2만 6000㎞에 달하며, 수산 동식물의 서식장인 연해의 면적이 157만㎢이고, 한류와 난류가 교류하는 대륙붕상에 좋은 근해어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수산업이 발달하고 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어촌을 형성하였다.
수산통계에 따르면, 1997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어업가구수는 10만 호이고 어업가구원수는 32만 3000명, 어업종사자는 17만 4000명이다. 그러나 어업인구의 80% 이상이 겸업이고 전업으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어업인구의 20% 미만이다. 어민에게는 바다가 비교적 개척의 여지가 많은 생활의 터전이기 때문에, 공동의 대어장에서 자본을 집약적으로 투입하는 대상은 어로장비와 기술 및 지식이다.
미개하고 단순한 어로장비와 기술로 어로활동이 조류와 바람 및 인간의 육체적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고도로 발달된 어로장비와 기술은 어군의 위치를 확인하고 포획하는 데 매우 유리하다. 그래서 어민은 1차적으로 자본을 어로장비와 기술 및 지식에 투자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어촌에서는 일반적으로 자본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도 어로장비와 기술 및 지식의 수준이 낮고 생활수준도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어촌은 거의 대부분 해양의 연안과 도서에 위치하고 있으며, 집촌(集村)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고립된 도서지역의 어촌에서는 공동어장과 어업의 공동경영 및 입호제(入戶制) 등 전통적인 공동체의 유제를 많이 가지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어촌이 형성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어로활동은 인류의 주요 생계방식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선사시대의 패총과 거기서 발견된 석기와 토기의 어망추나 동물의 뼈로 만든 낚시 등의 어구(漁具)로 볼 때, 한반도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에 패류와 해조류의 채취뿐 아니라, 원시적인 어업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원시부족국가시대, 특히 옥저(沃沮)와 삼한(三韓) 지역에서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어업이 주요 생산 부문의 하나로 되어 있었고, 조선술(造船術)도 상당한 정도로 높은 수준까지 이르렀다. 통일신라는 그 영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전국의 연안에서 정치어량어업(定置漁梁漁業)이 성행하였고 어촌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전파됨에 따라 살생을 금하는 교리와 지배층의 이념 및 법령으로 어업을 금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어업의 금지로 인하여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어촌의 영세한 어민들이었고, 당시 발달 도상에 있던 어업기술의 향상과 어업생산력의 발전이 중단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불교의 영향으로 패류와 어류의 채취 및 포획·살생을 금지하는 지배층의 이념 때문에, 어업을 천하게 여기고 어업의 건전한 발달이 저해되었다. 특히 천재지변이 일어난 경우에는 어업금지령이 빈번하게 내려졌다. 예컨대, 『고려사』에 따르면 1043년(정종 9)에는 한발에 의한 재해가 극심해지자 왕은 어촌의 어량어업을 금지시켰고, 1356년(공민왕 5)에도 어업금지령을 내려 어민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어민에 대한 지배층의 가혹한 봉건적 수탈과 왜구의 침략이 어촌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고 어민의 생활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연안어촌의 어획물은 고려 초부터 공세(貢稅)로 징수되었으며, 해안지방의 어촌의 선세(船稅)를 징수함에 있어 배를 소유하지 않은 어민에게까지도 선세를 부과하였다.
즉, 1068년(문종 22)에 어포(魚脯)의 공납을 중지시킬 때까지, 연안어업의 중심지였던 어량소(漁梁所)와 해조류, 특히 미역 생산의 중심지였던 곽소(藿所)에서는 어류와 해조류를 공납하였고, 고종 때에는 지방관리들의 과잉 충성심에서 패류, 특히 가리비(江瑤柱)를 지나치게 잡아 바치게 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여 한 어촌의 50여 호 어민들이 거의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고 한다.
왕실과 권문세가는 염전과 어량을 사점(私占)하고 사세(私稅)도 징수하였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왜구의 침략은 고려시대에 와서 더욱 극심하여 대청도·소청도·강화도·진도·남해군·거제도 등의 도서지방 어촌에서 어획물과 소금뿐만 아니라 식량과 가축까지도 약탈해 갔으며 어민들을 납치해 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어구와 어법·어선이 발달하고 수산물의 가공과 제조기술도 발전하여 어촌과 어업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도서와 연안의 어촌에서는 어량 또는 어전어업(漁箭漁業)과 어망 및 낚시에 의한 어업도 발달하였다.
정치어구인 어량 또는 어전의 분포는 조수의 간조와 만조의 차가 크고 연안의 바다가 깊지 않으며, 간석지가 넓은 서해안의 충청도·황해도·전라도 서부에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동해안에는 자연조건이 어량·어전어업에 맞지 않아 그 수가 가장 적었으며, 남해안은 서해안과 동해안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해안의 어촌에서는 주로 조기와 청어를 잡았는데, 어구와 어법은 어량·어전과 주목망(柱木網)·어조망(漁條網) 등이 이용되었다. 동해안의 어촌에서는 주로 명태·대구·청어를 잡았는데, 주요 어구와 어법은 자망(刺網)·덤장[擧網]·줄시(乼示)·장시(杖示)·주낙[延繩]이었다. 특히 함경도와 강원도 연안 어촌에서는 후릿그물[揮罹網]로 멸치를 주로 잡았다.
남해안의 어촌에서는 고등어 낚시와 멸치 분기초망(焚寄抄網) 어업이 가장 널리 행하여졌다. 해조류는 긴낫 또는 장목(長木)으로 채취하였으며, 패류는 해녀들이 잠수하여 채포하였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해녀들이 40명 또는 50명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전복을 채포하였다고 한다. 수산물의 가공과 제조방법으로는 건제품·염장품·젓갈로 만들거나 간유와 같이 기름을 짜는 방법이 조선시대의 어촌에서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동해안지방의 명태 동건법(凍乾法)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특이한 제조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서해안의 조기어업 성어기에는 한 어장에 수백 척의 어선들과 전국 각지로부터의 어상들이 모여들었는데 도서지방의 어항·어촌에서는 얼음 냉장시설을 갖춘 출매선(出買船)도 있었으며, 파시(波市) 또는 파시평(波市坪)이 열렸다.
이들 어선과 출매선의 선원들과 어상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업과 접객업 등의 상행위가 일시적으로 번창하여 큰 시장·취락이 형성되는데, 그것을 파시 또는 파시평이라고 하였다.
이 파시의 특징은 육지의 농촌시장처럼 일정한 지역에 고정된 정기시장이 아니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조기어장과 함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시장취락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서해의 3대파시는 남으로부터 흑산도·위도·연평도의 조기 파시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어업경영구조는 조선시대에도 어촌의 영세한 가족경영형태와 촌락공동경영형태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비교적 규모가 큰 어업은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제 경영형태로 생성, 발전되고 있었다. 해조류와 패류의 채포 및 낚시와 소형 어량·어전에 의한 생계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어업은 어촌의 영세한 생산수단과 가족노동에 의한 어가경영(漁家經營)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 형태의 어업경영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족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어구를 필요로 하는 어업종목과 어촌의 공유어장에 있어서는 혈연과 지연의 유대 및 생산수단의 공유를 매개로 한 소생산자의 횡적인 협동에 의해서 어업이 행하여지는 어촌공동경영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확대된 어가경영의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본제경영의 형태는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경영주가 어업노동자를 고용하여 급료를 지급하는 형태이다.
급료는 대부분 어기(漁期)별로 지급하지만, 임금제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었던 것 같다. 어업경영주가 고용된 어업노동자에게 어기별로 일정한 급료를 지급하는 고정급제도 있었고, 어획물의 판매대금 중에서 선대(船代)·망대(網代)·연료비·식비·술과 담배 등의 잡비를 공제하고 잔액을 어업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수익분배제도 있었다.
그 중의 어느 형태이건 간에 어업노동자 가족의 생계비와 출가어부(出稼漁夫)의 경우에는 여비 등에 충당하기 위하여 어기에 앞서 어업노동자가 경영주로부터 전도금을 지급받는 전도금제도(前渡金制度)는 흔하였다.
수산물의 유통과정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에 이미 전기적 상업자본을 대표하는 객주(客主)가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본업은 상품을 매매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창고업·위탁판매업·운송업·은행업·숙박업 등의 복잡한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어획물의 집산지, 즉 어선과 출매선이 드나드는 근거지에는 어디에나 객주와 여각(旅閣)들이 있어서 선원들과 어민들을 숙박시키고 그들의 어획물을 보관하는 한편 위탁판매도 하였다. 또한 동시에 영세어민들에게 어업전도금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어망 및 어구 등을 대주고, 위탁어획물을 파는 권리를 독점하였다. 그리고 전도금과 선대물자(先代物資)의 폭리와 고액의 위탁수수료를 거두어들일 뿐만 아니라 근량을 속이는 등 별별 수단으로 어민들을 착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 분산된 영세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은 경영규모가 작고 시장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수산물의 유통과정에 직접 개입하여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지 못하고 객주와 여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객주·여각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수산물 유통과정의 또 다른 기능담당자는 바다의 행상(行商) 또는 수상(水商)인 출매선과 좌고(坐賈)이다.
소규모의 어업에 종사하는 어선은 생산물을 직접 육지에 운반하여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어획물은 대부분 출매선의 손을 거쳐 객주에게 공급되었다. 출매선은 객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어선에 전대하고, 그 어선이 출어할 때 항상 따라다니며 어획물을 매수하여 특약된 객주에게 공급하였다.
그리고 수산물 유통과정의 최종 담당자로서 소비자인 일반민중을 상대로 상행위를 하는 좌고가 있었다. 이들은 점포를 가진 전(廛)·방(房)·가게[假家]를 말하는 것으로 대부분 소규모였고 그들이 취급하는 수산물은 직접 생산자인 어민들로부터 공급받은 것이 아니고 객주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경술국치 후에는 우리 나라의 어촌과 어업이 일제의 침략과 억압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본인 어민들이 기지를 본국에 두고 우리 나라의 해역에 출어하는 통어(通漁) 형태의 어업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이주어촌(移住漁村)은 1906년에 통감부 정치가 시작된 이후부터 건설되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 우리 나라에 이주한 일본인 어업인구는 1만 1417명으로 총어업인구 18만 2319명의 6.3%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이주 어촌은 대부분 남해안과 서해안에 건설되었다. 일본인 어민들은 개량된 어선과 어구 및 어법으로 대규모의 어업을 경영하였으므로, 전통적인 영세어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한국인 어민들에 대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우리 나라의 연안어업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법제상으로도 일제식민지통치의 「어업령」(1911)과 「조선어업령」(1929)을 제정하여 우리 연안 어촌민의 어업권을 제한함으로써 연안어촌과 어업의 발전을 더욱 제약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수산업법」(1953)이 제정되고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침에 따라 연안 어촌민에 의해서 조직된 어촌계를 공동어업권의 사실상의 소유·경영·수익자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수산업협동조합의 기본 조직체인 이동조합에 어촌계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우리 나라의 어촌에 공동체적 특성이 얼마나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가를 잘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행 「수산업법」은 해조류·패류 등의 단순 채포인 제1종 공동어업권, 분기초망·선인망·들망 등의 제2종 공동어업권, 낭장망·삼각망·부망 등의 제3종 공동어업권 등의 공동어업권을 연안 어촌민에게 전유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소득향상을 도모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어선의 대형화와 동력화 및 어구·어법의 발달로 연안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임해공간조성 및 간척공사 등으로 연안 어촌이 줄어드는 한편,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어촌인구가 대규모로 유출되어 전국적으로 어촌 및 수산인구가 감소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즉, 수산인구가 1967년에는 147만 7000명이었으나, 1980년에는 84만 4000명으로 감소하였고, 1990년에는 49만 6000명, 1997년에는 32만 3000명으로 더욱 감소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유형과 산업
어촌의 유형은 수산경제활동에 따라 어로어촌·양식어촌·제조어촌으로 구분된다. 어로어촌은 자연산 해조류와 패류를 채포하고 연체동물과 절족동물 및 어류를 어획대상으로 하는 가장 단순하고 우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연안어업 촌락이다.
양식어촌은 해조류와 패류 또는 어류를 양식하는 어업촌락으로서 우리 나라의 남해안과 서해안은 양식어촌으로 유명하다. 수산물의 가공·제조는 일반적으로 어획물의 양륙지(揚陸地)에서 행하여지기 때문에, 건제품·염장품·젓갈류의 어획물이 양륙되는 어항 또는 연안어촌은 제조어촌의 성격을 띠게 된다.
어촌주민들의 생업 중에서 어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어촌의 유형을 순어촌(純漁村)과 반농반어촌(半農半漁村)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반농반어촌을 다시 주어종농(主漁從農)과 주농종어(主農從漁)의 어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어업공동체의 전개과정에 따라 우리 나라의 어촌유형을 어업공동체 원형의 존립형태와 어업공동체 원형의 변질형태 및 어업공동체 원형의 분해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나라 어업공동체의 전개형태는 어업경영·공동체규제·어업 및 어업권의 종류 등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① 존립형태:어업공동체 원형의 존립형태는 어업경영에 있어 촌락공동체가 지선어장(地先漁場)을 총유(總有)하며 어장을 개인에게 분할하지 않고 공동경영을 원칙으로 공동생산·공동분배의 형태를 취하여 고용노동은 발생하지 않는다. 공동어장의 기본산물에 대하여는 형식적 평등의 공동체 규제가 작용되지만, 부차적 산물에 대하여는 능력과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의 원리가 적용된다.
어업공동체의 성원이 될 수 있는 기본자격 조건은 가구를 단위로 하여, 첫째 그 어촌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거주한 가구, 둘째 그 어촌에 독립가옥을 가지고 있는 가구, 셋째 공동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가구이다. 이 세 가지 자격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가구는 원호(元戶)로서 입호(入戶)할 수 있으며 공동생산물의 한 몫인 원깃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영주가구로서 세 가지 자격조건 중의 어느 하나라도 결격인 경우에는 반호(半戶)로서 입호할 수 있으며, 공동생산물의 반 몫인 반깃을 받는다. 외지로부터 이주한 가구와 원호의 차남 이하인 사람이 혼인하여 분가한 가구가 어업공동체에 입호한 때에는 필요한 자격조건을 갖출 때까지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친 다음 입호료를 지불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현행 「수산업법」이 제1종 공동어업권을 가지고 자연산 해조류와 패류의 단순채포를 주로 하는 채조포패업(採藻捕貝業)을 대표적인 수산업으로 하고, 채취선을 제외하고는 자본을 거의 투입하지 않는다.
② 변질형태:어업공동체 원형의 변질형태에서는 촌락공동체가 지선어장을 총유하지만 어장을 구역별 또는 개인별로 분할하여 개별경영을 원칙으로 하여 개별생산, 개별판매하고 고용노동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공동체 총유의 기본어장은 균등분배하고 주변어장은 능력에 따라 이용하는 개별화가 시작된다. 공동체 규제는 아직도 작용하나 그 강도가 약화되고 폭도 좁혀지고 있다.
입호제도는 지속하고 있으나 외지로부터 이주한 가구와 분가의 입호유예기간이 단축되고 입호료의 지불도 형식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어업공동체에서는 현행 「수산업법」의 양식어업권을 가지고 김·천초·미역 등의 해조류와 고막·굴·전복 등의 패류양식을 주로 하는 천해양식업(淺海養殖業)이 대표적인 수산활동이다.
실제로 김과 같은 해조류 양식장의 분할은 각 호당 균일하게 몇 책(柵)씩으로 제한하고 있어 외관상 형식적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으나, 그만한 양식규모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상당액의 자본이 필요하므로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계층이 발생하는 한편, 능력이 그 이상으로 초과하는 계층도 발생하여 계층의 분화가 나타나며 임금노동이 등장한다.
③ 분해형태:어업공동체 원형의 분해형태는 촌락공동체의 어장총유제가 해체된 상태이지만, 공동어업권만은 수산업협동조합 또는 어촌계가 보유하고 있다. 수산업협동조합 또는 어촌계 소유의 어업권을 개인이 지선어민의 동의를 얻어 행사한다. 따라서 경영형태는 완전히 개별생산·개별판매의 형태를 취하고 고용노동이 행하여진다.
모든 어업활동에 공동체 규제가 작용될 수 없으며,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경영규모의 확장이 가능하다. 입호제도는 완전히 해체되어 경영자는 대부분 지선어민이 아닌 경우가 많다. 현행 「수산업법」의 제2종 공동어업권과 제3종 공동어업권 및 정치망어업권(定置網漁業權)에 해당되는 분기초망·낭장망·대부망 등의 연안망어업(沿岸網漁業)이 대표적인 수산활동이다. 어망의 설치, 즉 생산시설에 자본이 크게 소요되기 때문에 망어업은 연안의 가장 대표적인 자본제어업으로 행하여지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활양식
어촌에서는 해안과 선착장의 접근, 공동작업의 필요성, 평지가 좁은 해안에 위치하고 넓은 마당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입지조건, 기타의 생태적 조건 때문에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주거형태가 밀집하는 경향이 있다.
남녀의 성별분업에 있어서 남자는 바다에서 어로작업을 하고 여자는 해조류와 패류의 채취 및 육지의 농사를 주로 하며, 어업노동 자체도 가족원이 아닌 선원들이 집단을 이루고 공동작업을 하기 때문에 선원들의 지위와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어촌에서는 공동어로작업은 해도 품앗이와 같은 교환노동은 없다. 그 대신 공동생산물의 몫을 나누는 분배체계가 매우 발달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미역의 공동채취에서 생산물의 분배는 어촌공동체의 원호에게 돌아가는 몫인 원깃, 반호에게 돌아가는 몫인 반깃, 채취선 소유자에게 돌아가는 배깃, 채취작업 중에 식사를 제공한 가구에게 돌아가는 몫인 공깃으로 구분하고, 원깃·배깃·공깃은 한 몫씩 계산하며 반깃은 반 몫으로 계산한다.
또 멸치잡이 어선의 어획물을 분배하는 데에는 기본적으로 선장·갑판장·기관장·딸딸이기관장·망잡이·장대잡이·줄잡이·불잡이·잡부 등의 선원들에게 각기 한 몫씩을 나누어 준다. 추가로 선장·갑판장·기관장·딸딸이기관장에게 각기 두 몫씩 더 주고, 앞장대잡이에게는 한 몫을 더 주며, 중간 장대잡이와 뒷장대잡이에게는 반 몫씩 더 준다. 그리고 배를 타지는 않지만 자본을 제공한 선주에게는 20몫, 딸딸이기관주에게는 15몫, 망주에게는 6몫, 음식 제공자에게는 6몫을 나누어 준다.
어촌에서는 가족의 규모도 농촌에 비하여 작다. 그 이유는 노동력의 필요와 작업의 형태 및 가족원을 부양할만한 경제의 규모, 입호제도와 같은 어업공동체 성원의 자격조건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일손이 많으면 최대한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의 잠재적인 수요가 있어 확대가족의 생활이 유리하지만, 어촌에서는 건장한 남자만이 바다에서 공동으로 어로작업을 하기 때문에 농촌과는 사정이 다르다.
더구나 해조류와 패류의 채포 및 양식권을 가구단위로 부여하는 어업공동체의 입호제도는 분가를 조장하여 소규모의 핵가족으로 장남부터 차례로 분가시키고 노부모는 막내아들과 함께 살며, 재산상속도 말자상속(末子相續)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통혼권(通婚圈)도 어촌에서는 폐쇄적인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촌내혼(村內婚)과 도내혼(島內婚)이 빈번하고 사는 관계가 주민들간에 서로 얽혀 있어서 매우 복잡한 혼인체계의 망상조직을 이루고 있다.
특히 우리 나라 서해의 고립된 도서어촌에서는 조혼(早婚)의 관행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어촌의 어민생활은 주로 바다에 의존하기 때문에 항상 위험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돌풍과 풍랑으로 인한 어선의 난파와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어업은 불확실성이 크고 어획의 예측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농업에 비하여 불안정하다. 어획량은 해마다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며, 매일의 어획량조차 예측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두 어선이 함께 출어하여 비슷한 어로장비와 기술을 가지고도 요행에 따라 어획량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이처럼 어업 자체가 투기적인 사업인 데다가 어민들의 생활은 바다와 기상조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어촌에는 농촌에 비하여 여러 가지 신앙과 의례행사가 더 많다. 재앙을 없게 하고 풍어를 비는 서낭굿과 용왕굿을 지내며,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을 때에는 무당을 데려다가 지노귀굿을 행하고, 배를 새로 지을 때는 배성주를 모시고 진수식을 따로 지내며 뱃고사도 지낸다.
뱃고사는 정기적인 것 이외에도 고기잡이가 잘 안될 때,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 수시로 행하여지며, 배를 새로 사들인 사람은 과거의 배주인이 그 배의 대모에 달아 두었던 문종이와 명사실을 떼어버리고 자신이 새로 마련한 문종이와 명사실을 달고 고사를 지낸다. 어선이 출어하여 조업하다가 첫 그물을 올릴 때에도 배 안에서 고사를 지내고 고기가 안 잡힐 경우에는 마을 전체 또는 개인이 고사를 지낸다.
우리 나라의 동해안 여러 곳에는 바다의 여신인 해랑신(海娘神)을 모시는 사당(祠堂)이 많고 거기에다 남자의 생식기를 나무로 깎아 바치는 관습이 있다. 이러한 관행에는 전설이 결부되어 있는데, 그 줄거리는 대개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혼(怨魂)이 동해 바다의 여신이 되어 해랑신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통계로 본 대한민국5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  (통계청, 1998)

  • 한국어업경제사연구  (박광순, 유풍출판사, 1981)

  • 한국어업사  (박구병, 정음사, 1975)

  • 곰소만의 어업과 어촌연구  (김일기,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8)

  • 「한국어업공동체의 존립기반분석」(박광순,『지역개발연구』 14,전남대학교,1979)

  • 「어촌의 생활구조와 어민의 생활태도에 관한 연구」(최재율,『전남대학교논문집』 15,1978)

  • 「농촌과 어촌의 생태적비교」(한상복,『한국문화인류학』 8,1976)

  • 「동해안어촌의 수산지리학적연구」(김연옥·이숙임,『농촌문제논집』 2,이화여자대학교,1976)

  • 「한국의 어촌과 어업에 관한 인류학적연구」(한상복,문교부 『학술연구보고』,1968)

  • Micro-Development of Farming and Fishing Villages(Sang-Bok Han,Development and change,1973)

  • The Effects of Local Enterprise on Social Change in a Korean Fishing Village(Sang-Bok Han,Koren Cultural Anthropology 5,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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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한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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