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촌이 형성되기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어로활동은 인류의 주요 생계방식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선사시대의 패총과 거기서 발견된 석기와 토기의 어망추나 동물의 뼈로 만든 낚시 등의 어구(漁具)로 볼 때, 한반도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에 패류와 해조류의 채취뿐 아니라, 원시적인 어업이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동이전,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따르면, 원시부족국가시대, 특히 옥저(沃沮)와 삼한(三韓) 지역에서 어업이 발달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어느 나라에서나 어업이 주요 생산 부문의 하나로 되어 있었고, 조선술(造船術)도 상당한 정도로 높은 수준까지 이르렀다. 통일신라는 그 영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전국의 연안에서 정치어량어업(定置漁梁漁業)이 성행하였고 어촌도 발달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전파됨에 따라 살생을 금하는 교리와 지배층의 이념 및 법령으로 어업을 금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어업의 금지로 인하여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어촌의 영세한 어민들이었고, 당시 발달 도상에 있던 어업기술의 향상과 어업생산력의 발전이 중단되었다.
고려시대에도 불교의 영향으로 패류와 어류의 채취 및 포획·살생을 금지하는 지배층의 이념 때문에, 어업을 천하게 여기고 어업의 건전한 발달이 저해되었다. 특히 천재지변이 일어난 경우에는 어업금지령이 빈번하게 내려졌다. 예컨대, 『고려사』에 따르면 1043년(정종 9)에는 한발에 의한 재해가 극심해지자 왕은 어촌의 어량어업을 금지시켰고, 1356년(공민왕 5)에도 어업금지령을 내려 어민에게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는 어민에 대한 지배층의 가혹한 봉건적 수탈과 왜구의 침략이 어촌의 건전한 발전을 저해하고 어민의 생활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연안어촌의 어획물은 고려 초부터 공세(貢稅)로 징수되었으며, 해안지방의 어촌의 선세(船稅)를 징수함에 있어 배를 소유하지 않은 어민에게까지도 선세를 부과하였다.
즉, 1068년(문종 22)에 어포(魚脯)의 공납을 중지시킬 때까지, 연안어업의 중심지였던 어량소(漁梁所)와 해조류, 특히 미역 생산의 중심지였던 곽소(藿所)에서는 어류와 해조류를 공납하였고, 고종 때에는 지방관리들의 과잉 충성심에서 패류, 특히 가리비(江瑤柱)를 지나치게 잡아 바치게 하여 이를 견디지 못하여 한 어촌의 50여 호 어민들이 거의 모두 도망하여 흩어졌다고 한다.
왕실과 권문세가는 염전과 어량을 사점(私占)하고 사세(私稅)도 징수하였다. 신라 때부터 있었던 왜구의 침략은 고려시대에 와서 더욱 극심하여 대청도·소청도·강화도·진도·남해군·거제도 등의 도서지방 어촌에서 어획물과 소금뿐만 아니라 식량과 가축까지도 약탈해 갔으며 어민들을 납치해 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어구와 어법·어선이 발달하고 수산물의 가공과 제조기술도 발전하여 어촌과 어업이 크게 확장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경상도지리지』를 비롯하여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리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도서와 연안의 어촌에서는 어량 또는 어전어업(漁箭漁業)과 어망 및 낚시에 의한 어업도 발달하였다.
정치어구인 어량 또는 어전의 분포는 조수의 간조와 만조의 차가 크고 연안의 바다가 깊지 않으며, 간석지가 넓은 서해안의 충청도·황해도·전라도 서부에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었고, 동해안에는 자연조건이 어량·어전어업에 맞지 않아 그 수가 가장 적었으며, 남해안은 서해안과 동해안의 중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해안의 어촌에서는 주로 조기와 청어를 잡았는데, 어구와 어법은 어량·어전과 주목망(柱木網)·어조망(漁條網) 등이 이용되었다. 동해안의 어촌에서는 주로 명태·대구·청어를 잡았는데, 주요 어구와 어법은 자망(刺網)·덤장[擧網]·줄시(乼示)·장시(杖示)·주낙[延繩]이었다. 특히 함경도와 강원도 연안 어촌에서는 후릿그물[揮罹網]로 멸치를 주로 잡았다.
남해안의 어촌에서는 고등어 낚시와 멸치 분기초망(焚寄抄網) 어업이 가장 널리 행하여졌다. 해조류는 긴낫 또는 장목(長木)으로 채취하였으며, 패류는 해녀들이 잠수하여 채포하였다.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해녀들이 40명 또는 50명씩 떼를 지어 다니면서 전복을 채포하였다고 한다. 수산물의 가공과 제조방법으로는 건제품·염장품·젓갈로 만들거나 간유와 같이 기름을 짜는 방법이 조선시대의 어촌에서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동해안지방의 명태 동건법(凍乾法)은 예로부터 전해지는 특이한 제조법으로 우리 나라에서만 볼 수 있다. 서해안의 조기어업 성어기에는 한 어장에 수백 척의 어선들과 전국 각지로부터의 어상들이 모여들었는데 도서지방의 어항·어촌에서는 얼음 냉장시설을 갖춘 출매선(出買船)도 있었으며, 파시(波市) 또는 파시평(波市坪)이 열렸다.
이들 어선과 출매선의 선원들과 어상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업과 접객업 등의 상행위가 일시적으로 번창하여 큰 시장·취락이 형성되는데, 그것을 파시 또는 파시평이라고 하였다.
이 파시의 특징은 육지의 농촌시장처럼 일정한 지역에 고정된 정기시장이 아니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조기어장과 함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시장취락이라는 점이다. 이른바 서해의 3대파시는 남으로부터 흑산도·위도·연평도의 조기 파시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어업경영구조는 조선시대에도 어촌의 영세한 가족경영형태와 촌락공동경영형태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비교적 규모가 큰 어업은 부분적으로나마 자본제 경영형태로 생성, 발전되고 있었다. 해조류와 패류의 채포 및 낚시와 소형 어량·어전에 의한 생계 중심의 자급자족적인 어업은 어촌의 영세한 생산수단과 가족노동에 의한 어가경영(漁家經營)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 형태의 어업경영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족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어구를 필요로 하는 어업종목과 어촌의 공유어장에 있어서는 혈연과 지연의 유대 및 생산수단의 공유를 매개로 한 소생산자의 횡적인 협동에 의해서 어업이 행하여지는 어촌공동경영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확대된 어가경영의 형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자본제경영의 형태는 한 사람 또는 그 이상의 경영주가 어업노동자를 고용하여 급료를 지급하는 형태이다.
급료는 대부분 어기(漁期)별로 지급하지만, 임금제도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었던 것 같다. 어업경영주가 고용된 어업노동자에게 어기별로 일정한 급료를 지급하는 고정급제도 있었고, 어획물의 판매대금 중에서 선대(船代)·망대(網代)·연료비·식비·술과 담배 등의 잡비를 공제하고 잔액을 어업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수익분배제도 있었다.
그 중의 어느 형태이건 간에 어업노동자 가족의 생계비와 출가어부(出稼漁夫)의 경우에는 여비 등에 충당하기 위하여 어기에 앞서 어업노동자가 경영주로부터 전도금을 지급받는 전도금제도(前渡金制度)는 흔하였다.
수산물의 유통과정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에 이미 전기적 상업자본을 대표하는 객주(客主)가 주요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의 본업은 상품을 매매하는 것이었으나, 동시에 창고업·위탁판매업·운송업·은행업·숙박업 등의 복잡한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어획물의 집산지, 즉 어선과 출매선이 드나드는 근거지에는 어디에나 객주와 여각(旅閣)들이 있어서 선원들과 어민들을 숙박시키고 그들의 어획물을 보관하는 한편 위탁판매도 하였다. 또한 동시에 영세어민들에게 어업전도금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자와 어망 및 어구 등을 대주고, 위탁어획물을 파는 권리를 독점하였다. 그리고 전도금과 선대물자(先代物資)의 폭리와 고액의 위탁수수료를 거두어들일 뿐만 아니라 근량을 속이는 등 별별 수단으로 어민들을 착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 분산된 영세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은 경영규모가 작고 시장사정에 어두웠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가 수산물의 유통과정에 직접 개입하여 많은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지 못하고 객주와 여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객주·여각과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수산물 유통과정의 또 다른 기능담당자는 바다의 행상(行商) 또는 수상(水商)인 출매선과 좌고(坐賈)이다.
소규모의 어업에 종사하는 어선은 생산물을 직접 육지에 운반하여 판매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어획물은 대부분 출매선의 손을 거쳐 객주에게 공급되었다. 출매선은 객주로부터 자금을 융통하여 어선에 전대하고, 그 어선이 출어할 때 항상 따라다니며 어획물을 매수하여 특약된 객주에게 공급하였다.
그리고 수산물 유통과정의 최종 담당자로서 소비자인 일반민중을 상대로 상행위를 하는 좌고가 있었다. 이들은 점포를 가진 전(廛)·방(房)·가게[假家]를 말하는 것으로 대부분 소규모였고 그들이 취급하는 수산물은 직접 생산자인 어민들로부터 공급받은 것이 아니고 객주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경술국치 후에는 우리 나라의 어촌과 어업이 일제의 침략과 억압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일본인 어민들이 기지를 본국에 두고 우리 나라의 해역에 출어하는 통어(通漁) 형태의 어업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이주어촌(移住漁村)은 1906년에 통감부 정치가 시작된 이후부터 건설되었다.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 우리 나라에 이주한 일본인 어업인구는 1만 1417명으로 총어업인구 18만 2319명의 6.3%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이주 어촌은 대부분 남해안과 서해안에 건설되었다. 일본인 어민들은 개량된 어선과 어구 및 어법으로 대규모의 어업을 경영하였으므로, 전통적인 영세어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한국인 어민들에 대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우리 나라의 연안어업을 완전히 지배하였다.
법제상으로도 일제식민지통치의 「어업령」(1911)과 「조선어업령」(1929)을 제정하여 우리 연안 어촌민의 어업권을 제한함으로써 연안어촌과 어업의 발전을 더욱 제약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수산업법」(1953)이 제정되고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침에 따라 연안 어촌민에 의해서 조직된 어촌계를 공동어업권의 사실상의 소유·경영·수익자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수산업협동조합의 기본 조직체인 이동조합에 어촌계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우리 나라의 어촌에 공동체적 특성이 얼마나 뚜렷하게 남아 있었는가를 잘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현행 「수산업법」은 해조류·패류 등의 단순 채포인 제1종 공동어업권, 분기초망·선인망·들망 등의 제2종 공동어업권, 낭장망·삼각망·부망 등의 제3종 공동어업권 등의 공동어업권을 연안 어촌민에게 전유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소득향상을 도모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어선의 대형화와 동력화 및 어구·어법의 발달로 연안 수산자원이 고갈되고, 임해공간조성 및 간척공사 등으로 연안 어촌이 줄어드는 한편,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어촌인구가 대규모로 유출되어 전국적으로 어촌 및 수산인구가 감소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즉, 수산인구가 1967년에는 147만 7000명이었으나, 1980년에는 84만 4000명으로 감소하였고, 1990년에는 49만 6000명, 1997년에는 32만 3000명으로 더욱 감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