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하영은 일제강점기 수표교교회 목사, 목사경성지회 검사위원, 사동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자이다. 1879년 황해도 평산 출생으로 1906년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8년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위원, 조선민족당 당수로 활동하였다. 1950년 납북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의 일환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79년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 출생으로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국사(菊史), 다른 이름은 화영(華英, 華泳)이다. 1896년까지 한학을 수학했으며, 동학에 입교해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했다가 만주로 갔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와 남감리교 미국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며 기독교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09년 남감리회 소속으로 전도생활을 시작해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전임했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金永鶴), 최태곤(崔泰崑)과 함께 앳킨스 감독(Bishop James Atkins)에게 집사 안수를 받았다.
상리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여성들 스스로 회(band)를 만들도록 제안해 원산여선교회가 창립되었다.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 콥 성경학원(Alice Cobb Bible School)에서 발족되었다. 앨리스 콥 성경학원은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는데 전도부인과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했다.
1917년 서울 종교교회로 부임해 1918년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 · 1운동 시기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1인으로 활동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한 후 피체(被逮)되었다.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가 그 해 9월 다시 종교교회(宗橋敎會) 목사로 전임되었으며, 1925년 9월 개성 북부교회(1925∼1927)를 거쳐 1927년 9월 다시 수표교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수표교교회에서 1년간 목회한 후 경성기독교중앙청년회관(YMCA)의 종교부 간사가 되어 일했다. 그 사이 1927년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고,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에는 주요한 · 이용설 · 박연서 등과 대책을 강구하던 중 체포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 수표교교회를 사임하였다가 1931년부터 다시 수표교교회 · 상동교회 · 연화봉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맡았다. 1935년 다시 수표교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해 수표교교회 본처목사가 되었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9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이어 조선민족당 당수가 되었다. 1946년부터는 비상정치회의 위원,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정무위원 및 외교협회 이사, 신탁통치반대총동원회 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독립전취전국대회 회장, 조선정치학관 관장 및 조선정치대학 기성회장, 조선통일총본부협의원,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했다.
또한 1947년 12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으며,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에 다녀왔다. 그 해 재단법인 조선정치학관 이사 및 관장이 되었고, 1949년에 조선정치대학(건국대학교의 전신) 학장이 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으로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북한군의 서울을 점령 후 북측에 억류되어 그들의 선전 활동에 동원되었다.
1950년 7월 30일 라디오(서울방송)를 통해 ‘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과 북조선지지 의사’를 밝혀야 했으며, 이후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60년 9월 2일 사망해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87년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재북(월 · 납북) 문학인 작품의 해금 등과 함께 재북 인사에 대한 독립유공 표창이 이루어졌는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