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단양(丹陽). 할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 우길생(禹吉生)이며, 아버지는 단양백(丹陽伯) 우현보(禹玄寶)이다.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1378년(우왕 4) 사헌부 규정(糾正)으로 재직 중에 문과에 급제하고, 중서문하성우정언에 임명되었다. 그 뒤 고려 말까지 삼사판관·전리사정랑(典理司正郎)·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전공사총랑(典工司摠郎)·강원도안렴사(江原道按廉使)·친어군대호군(親禦軍大護軍)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정몽주(鄭夢周) 등의 정적을 제거할 때 연루되어, 관직을 빼앗기고 원지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조선의 개국과 함께 정도전(鄭道傳) 등이 고려의 구신 제거책을 거론할 때 다시 논죄되어, 직첩을 몰수당하고 장(杖)을 맞은 후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방면되었으며, 1398년 직첩이 환급되었다.
1401년(태종 1) 무렵에 우씨 일문이 1399년(정종 1) 이방간(李芳幹)의 난 때 세운 공로에 대한 배려로 사간원좌사간대부에 발탁되고, 이어 통례문판사(通禮門判事)·충주목사·청주목사·예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41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에는 이조참의로서 세공종마(歲貢種馬)의 진헌을 위한 사신이 되어 명나라를 내왕한 뒤 공안부윤(恭安府尹)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윤12월에 전년의 이조참의 재직 중 전서(典書) 강단봉(姜丹鳳)의 과전(科田)을 탈취하고자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12년 우씨 일문이 이방간의 난에 세운 공로를 재평가할 때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추록, 곧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한성부윤에 복직되었다. 1413년에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으나, 같은 해 임지를 벗어나 충청도관찰사 이안우(李安愚) 등과 모여 술을 마신 일로 다시 파직되었다. 곧 안동대도호부사에 복직되었으며, 홍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421년(세종 3) 자헌대부에 승진하면서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를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한 뒤 죽었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