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은지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 우군도총제, 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시호
황호(荒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70년(공민왕 19)
사망 연도
1441년(세종 23)
본관
문화(文化)
주요 관직
이조정랑|풍해도 병마도절제사|동지중추부사|우군도총제|지중추부사|동지중추부사
정의
조선전기 우군도총제, 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문화(文化). 초명은 유은지(柳隱之). 아버지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유만수(柳曼殊)이고, 어머니는 남양군(南陽君) 유홍주(柳洪澍)이다. 첫 번째 부인은 부윤(府尹) 권담(權湛)의 딸, 두 번째 부인은 공조전서 왕승우(王承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1403년(태종 3)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때 우왕비 왕씨(王氏)를 처로 삼은 일로 탄핵되어 봉주(鳳州)에 유배되었다. 그 뒤 사면되어 1408년(태종 8)경 장연진병마사(長淵鎭兵馬使)로 나갔다. 이듬해 풍해도(豊海道) 병마도절제사에 승직하였다.

1412년 1월 총제(摠制)로서 개천도감제조(開川都監提調)를 겸하였다. 같은 해 7월 의흥부(義興府)를 개혁적으로 없애고 삼군별시위(三軍別侍衛), 응양위절도사(鷹揚衛節度使), 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를 설치할 때 별사금우변(右邊)제조에 임명되었다. 1413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1418년(태종 18) 6월 이전에 총제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시위 강화를 위하여 사도(司導)와 좌(左)·우패(右牌)를 각각 별사엄(別司嚴)과 좌·우금위(禁衛)로 개편할 때, 좌금위삼번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에 제수되었다. 1429년(세종 11) 이전에 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에 승직하였다. 1431년 7월 우군 총제를 거쳐 같은 해 8월 함길도순찰사로 파견되고, 곧 총제로 입조했다가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32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34년 6월 이전에 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같은 해 12월 중추사(中樞使)에 체직되었다. 1435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자(陞資: 당하관이 당상관의 자품에 오름.)하면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436년 딸과 손자가 음행을 자행한 일로 인해 전일의 행실을 추궁받으면서 서흥(瑞興)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에 사면(赦免)되고, 1439년 4월에 고신(告身: 관직임명장)을 돌려받았으며, 곧 동지중추부사에 서용되었다가 졸하였다.

학식이 부족하고 방자한 행동으로 공론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탁월한 무예와 전략으로 장기간 시위군을 지휘하면서 태종과 세종대의 왕권 안정에 기여했다. 시호는 황호(荒胡)이다. 묘는 경기도 용인시 구수동(九壽洞)에 있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문화류씨족보(文化柳氏族譜)』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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