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지(引止), 호는 서파(西坡). 윤태산(尹太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잠(尹岑)이다. 아버지는 인수부부정(仁壽府副正) 윤지강(尹之崗)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어효첨(魚孝瞻)의 딸이다. 부인은 목사 김태경(金泰卿)의 딸이다.
1491년(성종 22)에 진사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1497년(연산군 3)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고, 1501년(연산군 7) 사인(舍人)에 승직되었다. 1503년(연산군 9) 집의(執義)에 제수되었고, 생질녀인 숙의 민씨(淑儀閔氏)로 인해 특별히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그 뒤 다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면서 영흥도호부사(永興都護府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대간(臺諫)이 수차에 걸쳐 초자(超資: 정상적인 단계를 넘어서서 품계가 오름) 승직(陞職)이 부당하다고 탄핵했지만, 연산군의 옹호로 부임하였다. 1405년(연산군 11) 지중추부사로서 하등극부사(賀登極副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506년(중종 1) 경기도 관찰사로 파견되고, 곧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면서 파성군(坡城君)에 봉군되었다.
1508년(중종 3)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르면서 공조판서에 발탁되고, 이후 1523년(중종 18)까지 형조판서, 의정부의 좌참찬과 우참찬, 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 대사헌, 함길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두루 지냈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위조된 공훈을 공신록에서 삭제한 사건) 때 공신호를 박탈당했다가,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자 공신호를 복구받았다.
1524년(중종 19) 파성군에 봉군되었고, 1526년(중종 21) 치사(致仕, 정년퇴직)를 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계속 관직 생활을 하였다. 1533년(중종 38) 종1품 숭정대부에 승자하면서 우찬성(右贊成)에 제수되었고, 곧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47년(명종 2) 종1품 숭록대부에 올랐다가 이듬해인 1548년(명종 3) 졸하였다.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지도면(知道面) 예매화리(禮梅花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