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언례(彦禮)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78년(성종 9)
사망 연도
1563년(명종 18)
본관
무송(茂松)
주요 관직
병조좌랑|사간원헌납|병조참의|한성부우윤|공조판서
관련 사건
을사사화
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참의,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언례(彦禮). 윤충보(尹忠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미견(尹彌堅)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 윤징(尹徵)이며, 어머니는 박수신(朴粹信)의 딸이다. 처는 정세걸(鄭世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14년(중종 9) 생원으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20년 병조좌랑(兵曹佐郞)·사헌부지평·사간원헌납을 거쳐 1525년(중종 20) 사헌부 장령에 승진하였다. 1526년 법관으로서 송사(訟事)자를 접대한 일로 인해 좌천되고, 1528년 경성도호부판관에 파견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으로부터 ‘성격과 능력상 피폐한 경성에는 적합하지 못하다’고 탄핵되었으나 중종의 옹호로 부임하였다. 1535년 사표(師表)가 될만한 유신이라 하여 사유(師儒: 성균관의 관직)에 선임되었다.

1538년 통례원좌통례로서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고, 그 상으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39년 참판의 가함(假銜: 외국에 임무를 띠고 수행할 때 현직 보다 한 단계 높은 관직을 임시로 받는 것을 일컬음.)을 띠고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종2품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한성부우윤에 제수되고, 곧 경연특진관을 겸대했으며, 1542년 공조참판으로 옮겼다. 1544년(중종 39)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판윤(判尹)에 제수되고, 1546년(명종 1)에는 공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중종실록』의 수찬(修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이기(李芑)에 당부(黨附: 뜻을 같이 하여 붙음.)해, “조광조(趙光祖)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사류(士類)의 모해(謀害: 모의해 해를 미침.)에 적극 참여하였다. 1553년 연로하다는 이유로 공조판서직을 사직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옮겼다.

1557년(명종 12) 윤원형(尹元衡)의 ‘연로훈신이니 가자(加資: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름)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에 따라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다가 졸하였다.

명종 초·중기까지 정치를 천단한 이기와 윤원형에게 아부하고, 아들 윤옥(尹玉)이 이기의 심복노릇을 해 장기간 공조판서에 재직하였다. 그러나 식견이 짧아 별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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