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병조참판, 충청도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자응(子應)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65년(세조 11)
사망 연도
1538년(중종 33)
본관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주요 관직
지평|장령|사복시정|형조참의|도승지|예조참의|예조참판|충청도관찰사|이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에, 병조참판, 충청도관찰사, 이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응(子應). 윤태산(尹太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암(尹巖)이다. 아버지는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윤준정(尹俊丁)이며, 어머니는 통례원봉례 이효조(李孝祖)의 딸이다. 부인은 현감 유의습(柳義濕)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출사하였다. 1506년(중종 1) 사평(司評)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7년(중종 2) 왕비가례도감(王妃嘉禮都監)의 낭청으로 종사하고 품계가 오르면서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1509년 장령(掌令)이 되고 황해도어사로 파견되어 민정과 군사를 적간(摘奸: 난잡한 행동이나 부정한 사실의 유무를 조사 적발함.)했으며, 다음해 집의(執義)에 승직하였다.

1513년(중종 8)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서 박영문(朴永文)과 신윤무(辛允武) 등의 역모사건을 다스리기 위한 문사청(問事廳)의 낭관에 선임되고, 그 공로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16년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고,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교체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우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으나 ‘추고관(推拷官)으로서 부당하게 교체되었다’는 탄핵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사간, 예조참의를 역임하고 1518년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가 호조참의로 중앙으로 돌아왔다.

곧 형조참의로 옮겼으며, 대사간으로서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는 계문(啓文: 왕에게 구두나 간단을 서식을 갖춰 올리는 글)을 올리고 그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하려 했으나 오히려 도승지에 발탁되었다.

이후 3년간 도승지에 재직하면서 안처겸(安處謙)의 옥사를 추국(推鞫: 왕의 명을 받아 죄인을 신문함.)하고 종2품 가선대부에 승자했다. 근신(勤愼)한 근무로 세상 사람들의 인망을 받았다 한다. 1522년(중종 17) 예조참판에 오르고, 곧 경연특진관을 겸대했으며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파견되고, 사옹원제조를 거쳐 1527년 병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이어 공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을 거쳐, 1530년 이조참판을 지내고 황해도관찰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옮겼고, 1532년 형옥을 살피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되면서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1534년 다시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1538년 전주부윤(全州府尹)에 파견되었다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깨끗치 못함)한 일로 인해 파직된 뒤 졸하였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외서산(外西山) 고곡(高谷)에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파평윤씨족보(坡平尹氏族譜)』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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