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정기(李正己), 아버지 이납(李納)의 뒤를 이어 평로치청절도관찰사 겸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兼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가 되어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전역을 사실상 지배하였다.
그는 청주(靑州 : 오늘날의 山東省 月膠東과 濟南의 동쪽지방)자사(刺史)로 있다가 792년 5월 아버지가 죽자 같은해 8월 정식으로 절도사직을 계승하였다. 절도사로 있는 동안 꾸준히 통치기반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망명자나 범죄자 중 능력 있는 자들을 모아 요직에 임명하고 후대하였으며, 정부가 실시하고 있던 소금 전매제도에 맞서 독자적으로 소금 산지의 확보에 나서 경제력을 강화해 갔다.
그리하여 그의 번진은 당시 여러 번진 중에서 최대의 강성을 자랑하였으며, 당나라 중앙정부에 대해서는 거의 독립적인 태도를 취하여 마치 소왕국과 같은 존재로 군림하였다. 806년 6월에 죽자 그의 이복 동생인 이사도(李師道)가 뒤를 이어 절도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