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공조참의, 이조참의,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언(仲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49년(세종 31)
사망 연도
1490년(성종 21)
본관
광주(廣州)
주요 관직
형조정랑|좌부승지|공조참의|이조참의
관련 사건
갑자사화|중종반정
정의
조선 전기에, 공조참의, 이조참의, 우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중언(仲彦). 참의 이지직(李之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이인손(李仁孫)이다. 아버지는 형조판서(刑曹判書) 이극감(李克堪)이며, 어머니는 창수(倉守) 최덕로(崔德露)의 딸이다. 부인은 판관(判官) 권질(權耋)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음으로 출사하고, 1475년(성종 6) 오위사정(五衛司正)으로서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전적(典籍)에 제수되었다. 이어 형조좌랑,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역임하였다.

1481년 형조정랑 재직 중 옥사를 잘못 판결한 일로 파직되고, 다음해 7월 사면(赦免)되면서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을 돌려받고 경기도 도사에 서용되었으며,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484년(성종 15) 특지(特旨)로 4품에서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에 단계를 뛰어 넘어 오르게 되고, 그 수일 후에는 다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면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으며, 우부승지에 승진하였다. 이후 좌부승지, 판결사(判決事), 공조참의, 우승지를 역임하였다.

1487년(성종 18) 도승지에 승직하고, 양찬(梁瓚)의 불법사를 은닉한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된 뒤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488년 이조참의에 체직되고,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경기도관찰사로 파견되었으며,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졸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사사(賜死)된 숙부 이극균(李克均)에 연루되어 자손이 유배되고 금고되었으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에 신원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학식이 깊어 성종대의 시강(侍講)에 크게 기여하였다. 묘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東良面) 대전리(大田里)에 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눌재집(訥齋集)』(박상(朴祥))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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