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이칭
선승(善承)
시호
장의(壯毅)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4년(선조 7)
사망 연도
1624년(인조 2)
본관
합천
주요 관직
선전관|청하현감|구성부사
관련 사건
이괄의 난
정의
조선시대 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
개설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선승(善承). 절도사 이윤검(李允儉)의 고손이고, 증조가 홍문관수찬 이희증(李希曾)이며, 아버지는 이천수(李天受)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1600년 선전관이 되어 무변(武弁)으로 비변사낭관을 겸하고, 1609년(광해군 1) 청하현감이 되었다가 1612년 조그마한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1618년 성진첨절제사로 나가 방어에 철저를 기한 공로로 절충계(折衝階)에 올랐으며, 임기가 끝나자 함흥별장이 되었다.

1620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오르고 구성부사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군사가 용천(龍川)에 주둔하자 기율이 서 있지 않아 촌야가 소란했으며, 각 읍 수령들이 그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그러나 구성부만은 정령(政令)이 엄하고 분명해 지방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이어 좌영장 때 갑자기 적의 기병이 이웃 고을에 박두했다는 급보가 와서 좌우사람들이 산 속으로 피할 것을 권유했으나, 군사가 먼저 움직임은 옳지 못하다고 거절하였다. 1623년 위장(衛將)이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가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 병영을 설치하자 중군으로 휘하에 있었으나 이괄의 교만하고 방자함을 꺼려하였다.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별장 이순무(李舜懋)와 함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로 탈출했다가 난이 점점 확대되자, 반역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을 자책하고 자결하였다. 뒤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에 추록되고,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그 뒤 다시 우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옥계(玉溪)의 충현사(忠賢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장의(壯毅)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기언별집(記言別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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