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우 ()

석담집 / 가장
석담집 / 가장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예문관응교, 성균관사성,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무백(茂伯)
석담(石潭)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69년(선조 2)
사망 연도
1634년(인조 12)
본관
광주(廣州)
출생지
성주
주요 관직
예조정랑|사간원정언|성균관사성
정의
조선 후기에, 예문관응교, 성균관사성, 공조참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무백(茂伯), 호는 석담(石潭). 성주 출신. 고려의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의 후손이며, 진사 이덕무(李德茂)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준경(李遵慶)이고, 아버지는 증좌승지 이희복(李熙復)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도화서별서 김숭(金崇)의 딸이다. 처음에는 이이(李珥)로부터 수학하였으나 그 사후에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1년(선조 24)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 즉위 초 승정원주서를 지냈다. 1610년(광해군 2) 예문관검열로서 시강원설서를 겸임하고, 이어 사관으로서 정인홍(鄭仁弘)의 비위사실을 직서하였다가 탄핵을 받아 사퇴하였다.

그 뒤 예문관의 대교·봉교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다가 수성도찰방(輸城道察訪)을 지냈고 대북의 전횡이 심하여지자 사직하였다. 1623년의 인조반정 후 예조정랑·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를 거쳤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초유어사(招諭御史)로 특배(特拜)되었다.

이어 예문관응교·사간·성균관사성을 역임하고 1631년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특히 여진이 활발히 자국의 강토를 강하게 넓힐 때 변방의 방어에 힘써 표리(表裏: 왕이 내린 안팎의 옷감)를 하사되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칠곡 사양서원(泗陽書院)과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담집(石潭集)』이 있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기언별집(記言別集)』
『동명집(東溟集)』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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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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