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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식(李俊植)

근대사인물

 일제강점기 국민부 사령관,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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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일제강점기 국민부 사령관,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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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본관은 수안(遂安). 일명 웅(雄)·증손(曾孫)·진탁(辰卓)·휘석(彙碩). 호는 화강(火崗). 평안남도 순천 출신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1921년 윈난성[雲南省]강무당학교(講武堂學校)를 제5기로 졸업하고 만주로 가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였다.
1925년 대한통의부를 비롯한 남만주의 12개 독립운동단체가 모여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자 중앙위원이 되었다. 1927년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이던 오동진(吳東振)이 일본경찰에 잡힌 뒤에는 그 후임이 되었다.
1927년 길림성 신안둔(吉林省新安屯)에서 열린 민족유일당 조직을 위한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8년 국민부(國民府)의 수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여 중앙집행위원회의 군사위원장에 선임되고 8개 중대, 1개 호위대를 통솔하는 사령관이 되었다.
1929년 국민부를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23인 중앙위원 중 1인으로서 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ML파의 길림지방·간도지방 간부로서도 활동하였다. 그 뒤 만주에서의 무장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1930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중국군에 들어갔다.
1933년경 산둥[山東]에 있으면서 한국독립당 주노집행부(韓國獨立黨駐魯執行部)를 조직하였다. 1934년 김철(金澈)·박창세(朴昌世) 등과 함께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를 만들었다. 1937년 일본군의 침공으로 임시정부가 창사[長沙]에서 광저우[廣州]로 이전할 때 중국군 고급장교를 지냈다.
1939년 중국군에서 자진 예편한 뒤 임시정부에 참여해 한국임시의정원(韓國臨時議政院)에서 홍진(洪震)·지청천(池靑天) 등과 13인의 의정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조성환(曺成煥)·황학수(黃學秀) 등과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화북지구 특파단으로 파견되어 모병, 군사훈련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 해 한국광복군이 임시정부 아래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가 되었다가 산시[山西]·다퉁[大同]에 주둔하는 제1지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산시성으로 지대를 이끌고 출발해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조인제(趙仁濟)·이건우(李健宇)·김자동(金紫東)·이석화(李錫華) 등 제1지대 간부와 더불어 타이위안[太原]·다퉁·스자좡[石家莊]·린펀[臨汾] 등지에서 옌시산[閻錫山]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이 해 광복군 제1징모분처(第一徵募分處) 주임위원으로서도 활동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의정원의 비서장이 되고 중령구(中領區) 의원선거회장도 겸하였다. 1943년 광복군총사령부 고급참모가 되었으며, 같은 해 충칭[重慶]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해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 부단장을 맡았다. 국군 창설에 힘써 고급군사훈련반을 졸업한 뒤 대령에 임명되었다가 사단장·군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재향군인회 회장·광복회 회원·한국전력주식회사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하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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