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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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치안 유지를 위해 실시한 통행 금지 제도.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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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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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치안 유지를 위해 실시한 통행 금지 제도.
내용

매일 밤 10시경에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고 통행 금지를 알렸는데, 이를 인정이라 했다. 한편, 매일 새벽 4시에 33번의 종을 쳐서 통행금지 해제를 알렸는데, 이를 파루(罷漏)라고 하였다.

한양(漢陽)에 천도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듬해인 1395년(태조 4)에 도성을 쌓고 4대문(四大門)4소문(四小門)을 내고, 8개의 문을 종루의 종소리에 맞추어 개폐하도록 하였다.

종루는 서울 한복판인 현재의 종로와 남대문로가 교차하는 네거리에 설치하였다. 인정과 파루, 그 밖에 도성 안에 큰 화재가 났을 때와 같은 경우에 종을 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렸다.

인정 때 28번, 파루 때 33번의 종을 울리는 것은 불교의 교리와 관계있다. 인정은 우주의 일월성신 28수(宿)에 고하기 위하여, 파루는 제석천(帝釋天)이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 고하여 그날의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다.

인정과 파루를 알리는 제도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사』 권7에 “ 충혜왕 3년 정월부터 종루의 종을 쳐도 울지 않는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에도 이와 같은 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인정과 파루제도는 조선시대에 비롯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398년에 한성에 종이 걸렸을 때 개국공신 권근(權近)이 종명(鐘銘) 서문에서 “① 새 왕조의 개국이라는 큰 공업(功業)을 후세에 전하고, ②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후세 사람들의 이목을 깨우치게 하며, ③ 넓은 도시와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각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다양하다”라고 하였다.

한편, 인정 이후에 통행하다가 적발되면 경수소(警守所)에 구금하고, 이튿날 곤장을 때렸는데 형벌량은 10도(度)에서 30도까지 어긴 시각에 따라 달랐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시대(朝鮮時代) 한성부(漢城府) 연구(硏究)』(원영환, 강원대학교출판부, 1990)
『서울육백년사(六百年史)』1(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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