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

일본의 국기
일본의 국기
외교
지명/국가
아시아대륙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를 차지하고 있는 섬나라.
정의
아시아대륙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이어지는 일본열도를 차지하고 있는 섬나라.
개관

일본은 일본열도와 홋카이도[北海島]·혼슈[本州]·시코쿠[四國]·규슈[九州]의 네 섬과 이즈제도[伊豆諸島]와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류큐[琉球]열도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어로는 ‘니혼’ 또는 ‘닛폰’이라 하고, 영어로는 ‘Japan’으로 표기한다. 수도는 도쿄[東京]이다. 면적 37만 7915㎢, 인구 1억 2691만 9659명(2015년 현재)이다. 대부분이 아시아몽고인종에 속하고, 선주민족(先住民族)으로 아이누설·코로포크설이 있으나, 최근에는 일본석기시대인이 현대 일본인의 조상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언어는 일본어가 통용되며, 동경어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가 매스컴·교과서·의회·법정 등에서 표준어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독특한 방언이 있어 지위·직업·성별에 따라 언어적 차이가 심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알타이어계통에 속한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막부정치가 끝나고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제도를 확립, 근대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889년 제국헌법을 공포하여,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1890년 7월 제국의회가 성립되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의회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뒤 대륙으로 진출,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함으로써 급격히 자본주의의 발전의 길을 달려 제국주의정책을 노골화하고 약소국을 침략하였다. 대만과 남사할린을 차지하고, 1910년 조선을 침탈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강점, 괴뢰국가를 세웠으며, 1932년 상해사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40년 독일 및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연합군과 싸웠다. 1941년 12월 진주만을 습격,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한때 동남아 일대와 태평양의 주요 섬들을 점령하였으나, 미국의 반격과 일본본토에의 원자폭탄 투하로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군이 점령한 일본은 급격하게 변화하였다. 1947년 5월 3일 전쟁을 부인하는 평화헌법을 공포하였다. 헌법은 천황을 상징화해 버리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밝혔다. 또,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국회 우위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고 사법제도를 독립시켜 권력분립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정권은 가타야마[片山哲]내각(1947.5.∼1948.3.)·아시다[芦田均]내각(1948.3.∼1948.10.)의 중도연립내각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보수당이 장악해 왔다. 1955년 보수합동 이후 현재까지 자유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밖에 사회당·공산당·공명당·민사당 등의 정당이 있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및 비공산권 49개국과 강화조약을 맺어 1952년 4월 주권을 회복함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을 체결, 미국과의 유대를 굳히고, 이어 1956년 12월 유엔에 가입하였다. 일본경제는 종전 후 경제기반의 파괴와 악성 인플레이션, 해외귀환자 등으로 인하여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미군정하의 재벌해체, 농지개혁 등의 개혁으로 경제기반이 재건되었으며, 특히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경기와 특별수요, 미국의 민간경제원조에 힘입어 부흥, 재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눈부신 경제발전으로 국제사회에서 그 지위를 확립하여 미국·유럽공동체와 더불어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다. 2015년 국민총생산은 4조 1233만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2481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2015년의 수출액은 5735억 달러, 수입은 5983억 달러에 이르렀다.

일본의 사회구조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기본권들이 존중되고 있으나 아직도 인정과 의리의 중시, 엄격한 상하관계, 가족주의적인 기업정신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통적인 인간관계가 남아 있다.

일본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하며 서로 다른 문화가 마찰 없이 병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원인은 일본에 보편주의적인 종교와 가치관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보편적 가치가 결여된 현실주의가 일본인들의 생활양식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교체계는 1947년에 개정된 「교육기본법」에 의하여 6·3·3·4제가 채택되어 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며 취학률은 99% 이상이다. 고교진학률도 70% 이상에 달하며 일반적으로 교육열이 높은 편이다.

일본인은 두 가지 이상의 종교를 가지는 사람이 많다. 1999년 현재 종교별 신도수의 비율은 불교가 48.2%, 신도(神道: 자연숭배·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고유종교로, 神社를 중심으로 발달한 神社神道가 주류)가 51.2%를 차지하여 일본의 양대 종교가 되고 있고, 그 밖에 신·구교를 합친 그리스도교가 0.6% 등이다.

광복 이전 우리나라와의 관계

일본, 그것은 우리 겨레와 역사의 천년 숙안(宿案)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은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지리적 관계에서 연유하는 운명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본적인 것은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으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본인과 그 역사에 대하여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앞으로 수세대를 통하여 우리 겨레의 중요한 문제가 한일관계라는 것을 달관하고, 올바른 한일관계의 수립을 위하여서도 지나온 한일관계사에서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야요이문화[彌生文化]와 왜구

신석기시대 일본열도의 최초의 문화는 그 토기의 문양과 모양에 따라 조몬식토기[繩文式土器]의 문화, 줄여서 조몬문화라 한다. 조몬문화는 기원전 3세기∼2세기경까지 수천 년간 계속되었고, 그 유적·유물은 일본열도 각지에서 출토된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어렵채집경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금속기의 발명도 없었다.

한반도에서는 중국 및 북방계통 청동기문명의 영향으로 기원전 3세기경에는 농경 및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문명이 바다 건너 일본에 퍼져간 것이다. 한편,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로부터 북구주(北九州)의 해안지대에 조몬토기와는 계통이 다르며 그보다 높은 기술로 만들어진 토기를 사용하여 도작(稻作)과 금속기를 이용할 줄 아는 문화가 전하여졌다.

이 문화는 그 토기가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야요이문화라 한다. 야요이문화는 이와 같이 조몬문화가 계속 발전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문화, 그것도 비중국적인 북방계 청동기문화와 중국 계통의 철기문명이 전래된 것이다. 이로써 고대 일본의 문화는 비약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의 시작부터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문화 전수자적 위치에 있었다.

수천 년에 걸쳐서 일본열도를 문명의 변강지대(邊疆地帶: 변경지대)로 고립시켜 오던 대한해협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편리한 해상교통으로 말미암아 한반도와 일본을 맺어주는 문명의 통로가 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弁辰條)에 의하면, 변진에서는 철이 특산이어서 마한·진한·예·왜가 모두 와서 철을 얻어가며, 물건을 살 때에는 철을 사용하는 것이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들면서 삼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여졌으며, 특히 백제문화의 동전(東傳)은 현저하였으니, 4세기 말 근초고왕 때 아직기(阿直岐)·왕인(王仁) 등은 처음으로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여 후진적인 일본으로 하여금 한자를 공유하는 유교문명권에 들게 하였으며, 성왕 때인 552년 불경과 불상을 보낸 것이 오늘날 일본불교의 시작이었으니 이른바 일본문화의 양대 지주는 백제문화를 옮긴 것이었다.

그 뒤에도 백제의 많은 예술가·기술자·승려들이 일본에 건너가 지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7세기에는 이러한 현상의 최종열차라 할 만한 대이동이 있었다. 백제멸망 때, 백제인들이 거의 한 나라가 이사를 하듯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이주한 것이다. 그 중에는 한자문명을 풍부하게 지닌 지식인도 많아서 이주하자마자 문부대신과 비슷한 자리에 취임한 사람도 있었고, 또 관리가 된 사람도 많았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관계가 지속되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시대에 동해를 엿보는 왜적이 유일한 근심거리였다. 문무왕은 국태민안을 기원하여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몸소 ‘욕진왜병(欲鎭倭兵: 왜병을 진압코자 함)’하여 동해를 지키고자 대왕암(大王巖) 위에 묻힌 것이다. 대왕암은 문무왕의 웅지이며 왕년의 한일관계를 말해주는 세계 유일의 해중릉(海中陵)이다.

(2) 임나(任那, 미마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은 곧 일본고대사의 한 기둥인 ‘한반도경영설’로서 4세기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200년 이상이나 일본이 가야지역을 식민지로 하여 그곳에 ‘임나일본부’를 두었고, 백제·신라까지 보호국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한반도경영설’은 일본에서 1890년대 초에 정설화되어 일본의 한국침탈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으며, 최근까지도 각급 교과서에서 역설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1972년판 NHK 『고교일본사』에는 광개토왕릉비를 설명하는 항목에서 “압록강 중류 북안의 통구(通溝)에 있다. 당시 조선반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있었고, 야마토(大和) 조정은 미마나의 땅에 일본부를 두었다. 비문에는 391년의 일본군의 진공을 광개토왕이 막은 것을 전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조선에 출병할 수 있는 힘을 야마토 조정이 가지고 있었으며, 야마토 조정의 일본통일시기는 4세기 전반 무렵이라고 생각된다.”라고 되어 있다.

일본의 사서(史書)로는 8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등이 있는데, 조작된 부분이 많아 사료적 의의가 적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것임은 보수적인 일본 역사가마저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 있어서의 고대국가의 형성이 4세기 전반이라는 것과 한반도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실증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자료는 실로 광개토왕릉비문이다. 일본고대사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문이 가지는 의의는 막중하고, 비문이 없이 일본고대사는 성립이 안 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200년 진쿠황후[神功皇后]는 삼한을 정벌하였는데, 우선 신라를 쳐서 항복을 받고 이때 고구려왕·백제왕도 신라에 와서 항복하여, 이로부터 200년간 일본이 가야지역에 미마나라는 직할지를 두었으며, 백제·신라도 보호국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쟁 이전에는 각급 교과서에 대서특필되었던 이른바 ‘진쿠황후의 삼한정벌’의 내용이다.

이는 근거없는 황당한 이야기로 우리측 사료에는 흔적도 없는 사실일 뿐 아니라, 설화 자체가 전혀 신빙성이 없는 조작임은 광복 전에 이미 쓰다(津田左右吉)와 같은 일본인 학자에 의하여조차 주장된 바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전(倭人傳)에 의하면, 일본에는 당시 야마타이국[耶馬臺國]을 비롯하여 무려 30여 개의 소국이 있었다. 역사학의 상식을 따르면 일본열도를 통일하게 될 야마토 국가의 모체가 형성된 것이 5세기,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은 고대국가가 성립된 6세기 말엽이다.

일본이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한 것은 다이카(大化, 645) 이후이니 백제·신라와 비교해 보아도 대략 300년 이상 뒤진 셈이다. 따라서, 이 당시에는 생기지도 않은 야마토 국가가 한반도에 출병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도 광개토왕릉비문을 조작하여 이를 “의심할 수 없는 조선측의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한반도경영’을 날조, 역설해 왔던 것이다.

(3) 기마민족국가설

광복 후 일본의 역사학계는 활기에 넘쳐 사실(史實)의 진실 여부를 가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역작이 발표되었거니와, 그 중 최대의 역작이라 할 것은 학계의 원로인 동경대학의 교수 에가미[江上波夫]에 의하여 주장된 ‘기마민족국가설’이다.

기마민족국가설에 의하면, 3세기경 북아시아에서 활동하던 기마민이 부여·고구려를 거쳐 가야 방면에 정착하고 있다가 4세기 초 낙랑군(樂浪郡)이 멸망하고 백제·신라가 흥기함에 따라 압력을 받게 되자 바다를 건너 북구주로 이동하였다. 그 뒤 다시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진출하여 장차 일본열도를 통일하게 될 국가의 모체를 형성하였다.

이때가 4세기 말엽으로 일본의 천황족(天皇族)이란 가야 출신이며, 천손강림(天孫降臨)이란 가야에서 북구주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는 동북아시아와 가야·야마토 지방에서 출토되는 무기·마구(馬具) 등 고고학적 출토품의 유사성으로 보거나, 일본의 건국신화가 부여·고구려·금관국(金官國)의 그것과 유사한 점으로 보거나, 5세기경의 중국문헌 등을 참고로 할 때 실증된다고 하였다.

이 설은 당연히 큰 충격을 주었으며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꾸준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으로 주장하는 이는 일본인 중에도 없고, 반대로 가야 지방은 일본을 정복한 기마민의 본관(本貫)이었다는 사실이 일본인 학자 스스로에 의하여 주장되고 그 설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설은 또 일본 고대문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국교가 밀접하였던 백제였다는 통설도 상당히 수정하는 것이다.

일본 고고학계에서 20세기 최대의 발견이라 일컬어지는 일본 황족의 능이라고 생각되는 나라현[奈良縣] 아스카촌[明日香村]의 다카마쓰총[高松塚]의 벽화 및 묘제(墓制)가 고구려 계통이라는 것도 크게 기마민족국가설을 보강하는 자료로서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또, 일본이 남한을 경영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분국(分國)이 일본 안에 있었으니, 『일본서기』의 백제·신라의 관계기사는 일본 내 분국에 관한 기술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북한학자의 주장도 있다.

즉, ‘한반도경영’ 문제는 삼국에 의한 ‘일본열도경영’으로 대치되어야 하며, 이들 분국은 한반도의 본국에 대하여 종속적 위치에 있었는데, 야마토 국가의 발전에 따라 이들 분국에 일본부(야마토노 이고도모치)가 설치되었으며, 이 분국의 소멸과정, 즉 야마토 국가로의 흡수합병과정은 4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7세기 전반에 끝났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사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인용된 일본사료 『연대기(年代記)』의 “3세기 말엽 신라병이 대판(大阪) 근처까지 쳐들어오매 일본인이 청화하여 백마(白馬)를 목베어 맹세하니 지금도 백마총이 남아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일본열도 안에 신라계 지방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실증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4) 광개토왕릉비문 문제

한일관계사에서 광개토왕릉비문이 큰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1955년 정인보(鄭寅普)가 비문의 내용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던 중, 1972년 재일교포학자인 이진희(李進熙)가 19세기 말엽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문을 변조하여 ‘한반도경영설’이라는 허구를 사실화하려고 하였음을 상세하게 고발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고 문제해결에도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진희는 『광개토왕릉비의 연구』에서 먼저 비의 발견 경위 및 비석의 현상에 대하여 논급하였다. 즉, 비는 평양 천도 이전 고구려의 도읍이었던 만포진(滿浦鎭) 대안의 집안(輯安: 지금의 集安)에 있고, 집안은 압록강 중류까지 펼쳐진 길이 16㎞의 평야이다. 이곳의 동북우(東北隅)에 서 있는 비는 높이 6.3m, 제형(梯形) 사각주상(四角柱狀)의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은 풍화로 인해 거칠다.

기저부 4면은 평균 1.6m이고, 글씨의 크기가 고르지 않으나 평균 12㎝ 평방의 음각의 깊이는 6㎜로 여기에 총 1,802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비는 1,400년이나 망각되어 오면서 두꺼운 이끼가 끼고 덩굴이 엉켜 자면(字面)은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여말에 이성계(李成桂)의 군사들이 이 근처를 행군할 때에도 금나라 황제의 비라고 알았을 정도였다.

그 뒤 청나라가 입관(入關)한 뒤 만주에 ‘봉금책(封禁策)’을 써서 이 일대는 무인지경이 되었다가, 1870년대에 이르러 봉금책이 풀리고 이곳에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개간작업중이던 농민에 의하여 1880년 발견되었다.

중국인이 탁본(拓本)을 만들기 위하여 비면의 덩굴이며 이끼를 제거하려고 무지하게도 비석을 덮고 있는 덩굴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비면이 상당히 손상되어 귀중한 비문의 자면이 완결(刓缺)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한편, 일본군 참모본부에서는 장차 청일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고 전쟁에 대비하여 청나라의 군비·지리 등을 조사하려고 1880년 10여 명의 장교를 밀파하였다. 그 중 한 사람인 사코(酒匂景信) 중위는 1883년 가을 광개토왕릉비문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을 일본에 가져갔다.

일본군 참모본부에서는 비문을 중시하고 학자들을 모아 6년에 걸쳐 비문을 해독, 해석하여 발표하자, 사학계에서는 다투어 비문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신라침공기사를 결부시켜 비문을 이른바 ‘한반도경영’의 확실한 증거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그들이 주목한 비문은 “百濟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의 대목이다. 일본에서는 이를 “백제·신라는 원래부터 속민으로서 유래, 조공하였다. 그러나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해석하였다.

이때의 왜는 야마토 정권이고 침공은 구주를 전진기지로 삼았을 터이므로 4세기 후반의 야마토 정권은 나라 지방으로부터 구주·한반도 남반부까지를 지배하는 강대한 나라로 추정, 『일본서기』의 기사는 사실이라고 우겨댔던 것이다. 그러나 1913년 현지조사 당시 신묘(辛卯)와 도해파(渡海破) 5자는 거의 흔적만 있는 불명확한 것이어서 조작의 의심이 가는 글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이마니시[今西龍]는 1913년 “불로 손상된 다음 비면은 더욱 거칠어졌고 자획이 결락되어 명료하지 못한 자형(字形)이 많으므로, 깊이 팬 곳은 진흙으로 메우고 또 자형 외의 비면의 요철을 평탄히 하기 위하여 4면에 석회를 바르고 오로지 탁본을 선명히 하는 데만 힘써서 부분적 수보(修補)는 많았고, 문자가 탁공(拓工)의 손에서 나온 것도 있어 고증의 자료로 이 비문을 사용하려는 자는 깊은 경계를 요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의 논문 「광개토경호태왕릉비에 대하여」(1915)에서 지적하였듯이 비문에는 중대한 조작이 가하여졌던 것이다. 이진희는 많은 자료와 정밀한 논증으로, 초기 한일관계를 날조, 왜곡하여 비문을 침략정책에 이용하고자 석회를 바르고 ‘가묵본’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비문을 조작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발표 후 광개토왕릉비문을 둘러싼 논쟁이 날조 쪽으로만 치우쳐 비문의 내용 자체를 캐는 본연의 작업은 다소 뒷전으로 밀린 듯도 하였다.

비문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일본학계의 통설에 대하여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을 의미하는 정인보의 새로운 해석이 1955년 발표되었다. 즉, 전기한 비문은 “왜는 신묘년에 왔다. 이에 광개토왕은 도해파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은 도해파의 주어가 광개토왕이며, 이 주어가 비문에 생략되었다는 것으로 구두점을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서 정반대되는 해석이 된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일인학자 사에키[佐伯有淸]도 “왜가 신묘년에 내하므로 도해하여 백제를 파하였다. 고구려는 신라를 신민으로 하였다.”라고 해석을 내리고 있다. 정인보설을 따르면, 비문이 날조가 아니더라도 이른바 ‘남한경영설’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진희설을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문의 일부, 그것도 중요한 대목의 변조가 천명된 이상 ‘남한경영설’은 거의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따라서 일본고대사, 특히 고대의 한일관계사는 새로운 과학적 토대 위에서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5) 여몽연합군의 정동의 역(征東之役)

통일신라시대 이후 오랫동안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불명확하거나 우호적이었다가 13세기 중엽 몽고제국이 건설되자 불행한 국면을 맞았다.

고려 자체가 오랜 항전 끝에 원나라의 무력에 정복되었거니와, 원나라는 양자강을 방패삼아 저항하는 송나라를 완전히 정복시키고자 우리 나라를 그 기지로 삼아 먼저 일본을 치기로 하여 고려에 조정(助征)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려는 40년간이나 계속된 대몽장기항전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초근목피로써 겨우 연명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부득이 군량이며 선재(船材)를 준비하여 900척의 전선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1274년 3만4000명의 여몽연합군은 대마도를 거쳐 하카타(博多: 福岡)만에 들어갔으나 때마침 태풍을 만나 배가 많이 부서진 채 돌아오고 말았다.

그 뒤 원나라는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로 다시 일본을 치려 하였다. 원나라는 전쟁준비를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14만의 대군을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에서 출동시켰으니, 1281년(충렬왕 7) 고려는 이때에도 전선 900척, 군사 1만 명, 수수(水手) 1만5000명, 군량 11만 석을 부담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카타상륙전이 여의치 않아 해상에서 60여 일이나 싸우던 중 태풍이 일어나 많은 손실을 보고 물러났다.

이와 같은 두 차례 원정의 실패는 몽고군이 해전에 약하다는 점 외에 침공의 시기를 잘못 잡아 태풍의 영향을 입은 탓인데, 일본에서는 이를 두고 일본은 신이 돕는 불패의 나라라는 이른바 신풍사관(神風史觀)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원나라 황제의 의도가 좌절된 것은 실은 몽고지배에 저항하는 고려인이나 중국인들의 활동이 몽고의 의도에 큰 지장을 준 탓도 있었던 것이다.

그 뒤 일본 국내가 내란상태에 빠지자 일본해적들은 연이어 우리 나라 해변을 침구하더니, 고려 우왕이 즉위하였을 즈음에는 고려의 국내정세가 왜구로 말미암아 파국을 방불하게 할 지경까지 되었다.

서해의 조운(漕運)은 두절되고 1,000명이 넘는 왜구의 대집단이 내륙 깊이 쳐들어와 군현을 공함하고 약탈을 자행하여 해변가는 무인지경이 되어버리고, 심지어 예성강 강구(禮成江江口)에까지 들어와 개경조차 여러 번 소동을 일으키게 하니 천도까지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왜구토벌이야말로 이성계의 성망을 높이는 그의 출세의 길이었다. 왜구와 싸워 상승의 명장이 된 그는 1380년(우왕 6) 황산(荒山)에서 왜구의 대부대를 섬멸하여 나라를 재건하였다는 칭송을 들었다.

같은 해 금강 강구(錦江江口)에 침입한 왜구 500여 척의 병선은 최무선(崔茂宣)이 발명한 화포(火砲)의 위력으로 분탕되었고, 박위(朴葳)는 전선 100척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구의 기세를 진압하였다.

(6) 대마도와의 관계와 임진왜란

조선왕조가 창건되자 왜구에 대한 방비를 굳게 하고 사신을 일본 막부에 보내어 왜구를 금제할 것을 교섭하였다. 그리하여 피차의 사절이 자주 왕래하던 중 1419년(세종 1) 왜구가 또 우리의 해변을 엿보자, 그 해 세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도통사(都統使)로 병선 300여 척, 1만7000명의 병력으로 대마도를 공벌하여 적지를 불사르고 돌아왔다.

그 뒤 국교가 끊어져 물자의 공급이 두절되어 큰 곤란을 느낀 대마도주가 우리나라와 교통하기를 간청하므로 웅천(熊川)의 내이포(乃而浦)·부산포(富山浦), 울산의 염포(鹽浦) 등 삼포(三浦)를 열어 내왕하며 무역할 것을 허락하고, 또 삼포에 각각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왜인들의 거류·교역 및 일본 각지에서 오는 사객(使客)을 접대하게 하였다.

또한, 일본 각지의 제후들에게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는 우리 나라의 명목상의 직첩(職帖)을 주어 일정한 제약 아래 서울에 내왕하여 물건을 바치고 무역하도록 편익을 주었다.

1443년에는 대마도주와 약속을 맺고 매년 물자를 얻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보내는 세견선(歲遣船)을 50척으로 제한하고, 매년 우리나라가 대마도주에게 공급하여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이는 왜구 단속과 교환으로 경제원조를 약속한 것으로 계해약조라 한다. 대마도주는 일본과의 모든 교섭을 중계하였으며, 왜인의 진상물은 구리·유황·향료 등이고 우리는 면포·마포·저포·서적·쌀 등을 회사(回賜)하였다.

세종 때 왜인에게 삼포를 연 뒤 거류왜인이 많더니 1510년(중종 5)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 부산첨사를 죽였으므로 이를 진압하고, 그 응징으로서 세사미두를 절반으로 줄이고 삼포 중 내이포 하나만 남겨두었다.

그 뒤에도 가끔 우리 연해의 땅을 엿보는 왜인들의 소소한 침구가 있었다. 일본인은 전통적으로 연해제국을 표략하여 그 보화양백(寶貨粮帛)을 빼앗는 것을 능사로 하였고, 국내가 안정되지 않아 무뢰배는 제멋대로 침구를 일삼았기 때문에 왜구는 우리의 숙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567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일본 각지의 호족들을 평정, 통일하여 국내의 안정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한층 큰 재난을 초래하였다.

도요토미가 왜 ‘임진왜란’이라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는지 일본학계에서도 분명한 설이 없다. 그의 노망 탓이라고도 하고, 혹은 정세에 어두웠던 소치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측 견해는 그가 국내의 안정을 위하여 제후의 무력을 해외에서 소모시켜 버릴 필요를 느꼈고, 또 그의 정복욕이 대륙경략을 기도하게 하였는데, 그 야심의 첫 대상이 방비 없는 우리 나라였다는 것이다.

왜란이 우리에게 준 피해는 매우 커서 7년간 계속된 전란을 통하여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구체적인 숫자를 들면, 왜군의 진군로나 격전지 근처에서는 겨우 “수리(數里)에 1가, 10리에 1가” 정도만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진주목(晉州牧)에서는 전후 격심한 인구감소로 합동(合洞)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112리가 59리로 줄었고 전화 속에 아주 사라지고 만 마을도 여럿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1626년(인조 4) 경연(經筵)에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왕의 문의에 답하여 “난 후의 인구가 아직 평상시의 6분의 1이 못 된다.”고 답변한 데서도 확인된다. 실로 “1현의 인구가 수십에 차지 못하고 1리의 주민이 수명에 불과하였다.”는 기록도 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이요 국력의 쇠잔이라 하겠다.

반면, 일본은 ‘일종의 변태 유학’이라고 일컬어질만큼 문화적·경제적 수혜가 컸으니, 왜란중에 많은 우리의 서적과 활자를 약탈하여 감으로써 처음으로 활자인쇄술과 주자학이 퍼졌으며, 각종 기술자, 특히 도공(陶工)을 다수 데려다가 요업의 새 시대를 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그 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정권을 잡고 우리나라와 수호하기를 청하여 1607년(선조 40)부터 국교가 재개되어 18세기 초기에 이르기까지 12회의 통신사가 내왕하였다.

통신사는 정사에 이조참의가 임명되며 대소의 인원은 500여 명이었고,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將軍: 정권의 우두머리)의 취임 때마다 파견되는 관례였다. 일본측에서는 접대인원 대소 3,000여 명에게 막대한 경비를 들여 문화적 선진국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그 뒤 일본에서는 나라의 위신과 경비로 문제가 일어나 통신사초청은 흐지부지되었다. 대마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경상도 세미의 약 절반을 경제원조로 제공하여 해구 발생의 소지를 막았고, 전반적으로 막부의 쇄국정책과 강력한 통제로 국교 재개 이래 해구문제는 크게 대두되지 않았다.

(7) 강화도조약과 임오군란

우리나라에 대하여 개국을 강요한 것은 일본이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이 미국의 요구에 굴하여 개국하고 격동 끝에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자, 혁명으로 특권을 잃은 무사계급의 실직과 불평이라는 어려운 국내문제를 조선침략으로써 해결하려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그것이 실행될 뻔하다가 구미시찰에서 돌아온 파가 시기상조를 역설하여 중지되었다.

그러나 침략주의는 이미 메이지 정부의 정책이었고 조선이 그 첫대상이었다. 그리하여 급속히 근대적 준비를 마련하는 데 열중하던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개국을 강요할 것을 결정하였으니, 그것은 또 쇄국정책을 단행한 대원군이 실각하고 국내정세가 불안한 틈을 이용하려는 저의도 있었던 것이다.

1876년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는 도발행위의 임무를 띠고 강화 앞바다에 나타나 포격을 하는 한편, 함대를 파견하여 위협하고 주저하는 우리에게 개국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우의정이던 박규수(朴珪壽) 등이 세계정세로 보아 개국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역설하여 드디어 1876년(고종 13)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500년 쇄국의 문을 열어 열국과 국교를 맺는 첫출발을 하였던 것이다.

조약과 그 뒤의 부속 각서에 의하면, 조선은 청나라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국임을 천명하고 일본과 대등한 지위에서 화친해 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으나, 대포의 위협으로 맺어진 조약과 그 뒤의 약정이 우리에게 유리할 리는 없었다. 그것은 치외법권·관세면제 등 특혜와 이권을 일방적으로 내준 불평등조약이었으니 개항 후 일본세력의 침투는 수호조약으로써 약속된 것이었다.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가 문호를 개방하게 된 출발이었다.

수신사(修信使)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일본의 개화에 배울 점이 있음을 강조,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이 일본에 파견되어 그들은 각 부문을 분담, 시찰하고 돌아왔다. 그 결과 신무기가 수입되고 일본인 장교가 초빙되어 신식군대가 편성되었으니 이들 80명의 신식군대를 왜별기(倭別技)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왜별기는 후대하는 반면, 구군대의 병사들의 봉급은 1년이나 밀려 생활이 곤궁하여지자 그들의 불만은 폭발하여 1882년 폭동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실직군인 및 시국에 불만을 품은 자가 가담하여 민씨세도 일파의 가옥을 부수며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공사관을 포위하자,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스스로 공관에 불을 지르고 인천으로 탈주하였다. 기세가 오른 난민들은 왕궁에 난입하여 민비(閔妃)를 찾았으나 민비는 이미 피신한 뒤였다. 이 폭동에서 민씨파의 대신들이 살해되었는데, 이를 임오군란이라 한다. 군란은 일본세력 진출에 대한 반항운동이었다.

개국 이후 일본으로부터 밀려오는 값싼 공장제 면제품은 우리의 수공업을 몰락시켜 자급자족경제를 붕괴시켰고, 실정에 대한 연구도 없이 실시한 일본식 개혁은 사회에 새로운 고뇌를 가져와 여기에 대한 반항이 개혁반대라는 보수적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군란으로 대원군이 정계에 복귀하여 정권을 잡고 모든 개혁을 복구시켰다.

그러나 임오군란은 청으로서도 대망하던 기회였다. 청나라가 외우내환에 고민하고 있을 때 일본은 조선을 개국시키고 일방적으로 세력을 넓혀 청나라의 위신은 추락했었다. 청나라는 그 동안 동치중흥(同治中興)으로 불리는 정치의 쇄신을 단행하고, 잃었던 조선에서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나라는 이에 민비파의 요청에 신속히 응하여 조선 정부의 위급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5,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혼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 갔으며, 청군의 보호 아래 민씨 정부는 재건되었다. 군란 후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을 맺었는데,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공사관 호위를 위한 주병권 승인(駐兵權承認)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8) 갑신정변과 일본의 대륙진출정책

임오군란과 같은 무모한 폭동은 풍파만 일으키고, 도리어 서울에 청·일 양국군이 주둔하게 된 복잡한 사태만 초래하였다. 그 뒤의 정세는 일본을 배경으로 한 개화당(開化黨)과 청나라를 배후로 하는 사대당(事大黨)이 대립하게 되었다.

개화당은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의 신진인사를 중심으로 일본의 유신혁명을 본떠서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루며 근대적 개혁을 단행할 것을 의도하였다. 사대당은 민씨 일파의 고관들로서, 청나라에 의지하여 현상을 유지하려는 세력이었다. 개화당은 다케조에[竹添進一郎] 공사의 장담과 일본측의 원조를 믿는 한편, 청나라는 월남문제로 프랑스와 전쟁을 하여 패전한 뒤라 간섭할 힘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 주둔한 청군의 대병력을 무시하고 서울주둔 1개 중대의 공사관 호위병력만을 빌려 1884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사대당 요인을 습격하고 왕궁을 점령하였으며, 신정부를 조직하여 완전독립의 달성, 공평한 인재의 등용, 상공업의 발전 등을 목표로 하는 정강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서울주둔 청군을 지휘하는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여기에 신속, 강력하게 개입하여 일본군은 패퇴하고 개화당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며 일본공사관은 또다시 불타버렸다. 민중적인 기반 없이 일부 청년귀족이 계획한 혁명은, 믿었던 일본의 원조가 미약하고 정세판단의 착오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쿠데타가 실패하자 곧 사대당 정부가 재건되고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하여졌다.

일본외교는 이 국면을 타개하고자 민활하게 활동하였다. 1885년 이토[伊藤博文]는 톈진[天津]으로 가서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하여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이 철군하고 장래 파병할 때는 미리 서로 알리기로 약속하는 톈진조약을 맺었다. 정변 후 정치적으로는 청나라가 우세한 듯하였으나 방곡령사건(防穀令事件)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적으로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일본세력의 침투는 활기를 더하여 갔다.

한편, 일본은 1890년 아시아 최초의 의회를 개설하였고, 야마가타[山縣有朋] 수상은 의회연설에서 이른바 이익선(利益線) 수호를 천명하였으니, 이것은 주권선에 이웃한 이익선, 즉 조선을 확보하겠다는 것으로 사실상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방향제시였다. 불과 22년 전 개국 후의 새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봉건적 할거로부터 근대적 통일국가로 비약하는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뒤였다.

일본 정부의 지도층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효과적으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여 군수공업에 치중한 근대화가 착착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서양문명을 수용한 교육제도의 정비에 힘써서 의무교육은 벌써 1872년에 시행되었고, 각종 관영 대공장이 신설되더니 드디어 청나라와의 전쟁과 전쟁을 통한 침략으로 나라의 진로를 정하였던 것이다.

(9) 동학혁명운동과 청일전쟁

우리나라에서는 세도정치 아래 극심한 정치의 부패로 민중의 도탄은 극에 달하였고, 동학을 단결의 유대로 하여 봉기한 농민군은 1894년 5월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새 세상을 갈망하며 일어난 동학혁명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을 낡은 왕조가 막을 도리는 없었다. 국왕과 정부는 경솔하게도 청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청군의 출동은 톈진조약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일본군도 출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동학혁명군의 궐기와 승리는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리고 국내적으로 난국에 처하고 있던 일본에게 기회를 준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양군철수를 위한 교섭의 전제로서 동학란 진압의 조건이 꼭 필요하여 농민군에게 양보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으나, 일본은 청나라가 수락할 리 없는 내정개혁공동지도안을 제기하여 거부되자 곧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일본의 필요에 따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상황 아래 김홍집 내각이 조직되고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어 이른바 갑오개혁이 이루어졌다. 일본의 비호 아래 마련된 근대적 개혁이었으나 개혁은 우리 온건개화파에 의하여 구상되고 실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개혁에는 전주화약에서 동학군이 정부에 제시한 폐정개혁안이 많이 반영되었다.

일반적으로 일본이 요구한 바 없는 사회적·제도적 개혁이 많았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갑오개혁은 우리 개화사상의 결실이며 동학혁명운동의 간접적 성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청일전쟁은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부터 진격, 북경(北京)을 위협하자 끝이 났다. 청일전쟁 후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 의하여 일본은 요동반도(遼東半島)와 대만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남만주에까지 지배력을 뻗치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미 시베리아를 경략하고 만주에 진출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일본의 남만주진출에 적극 반대하여 독일·프랑스와 더불어 삼국간섭을 감행, 일본의 요동반도 영유는 동양평화상 용인할 수 없다고 강경한 위협을 가하였다.

이에 대항할 힘이 없는 일본은 하는 수 없이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환부하였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굴복하자 개화당 정부는 동요되고 러시아와 결탁한 민비 일파의 세력이 커졌다.

‘인아거왜(引俄拒倭: 러시아를 가까이 하고 일본을 물리침)’는 정계의 새 깃발이었고 친러파 내각이 세워졌다. 이것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얻은 성과, 즉 조선에 있어서의 우월한 지위가 수포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일본의 세력회복을 위한 비상수단으로 대원군을 다시 내세우고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부랑배들로 하여금 궁중에 난입하여 민비를 시해하고(1895.8., 을미사변) 다시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내각은 양력의 채용, 단발령의 실시 등 개혁을 계속하였다. 왕비의 시해에 놀라고 단발령의 강행에 분격한 민중들은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정세는 어수선하였다.

이 틈을 타서 왕궁을 탈출한 왕은 러시아공사관에 들어가 토역(討逆: 역적을 토벌함)의 영을 내리고 친러파 내각을 조직하였다. 국왕과 정부의 하는 일이란 각종 이권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이고, 러시아공사 웨베르(Waeber,K.)의 위세가 나라를 좌우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외국공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나라의 체면상 말이 아니므로 1년여 만에 덕수궁으로 옮기고, 1897년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정하여 황제즉위식을 올렸다. 겉치레나마 나라의 격이 올라간 것은, 이때 러시아가 만주경영에 치중하고 있어서 러일간의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있었고, 양국이 모두 군주전제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침략에 편리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일본이 환부한 요동반도에 러시아의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등 러시아의 만주경영이 바쁜 틈을 타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진출이 활발하여졌다. 그들은 금광을 강점하고 경인철도·경부철도 부설권을 손에 넣었으며, 심지어 작당하여 인삼포(人蔘圃)를 도채(盜採)해 가는 노골적인 도적행위도 자행하였다.

(10) 러일전쟁과 한일합병

그 동안 청나라에서는 1899년 의화단(義和團)의 배외운동(排外運動: 외국세력을 배척하는 운동)이 만연되더니 북경의 외국공관구역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국·러시아·일본 등의 연합군이 출동, 진압하였는데, 이때 러시아는 대군을 만주에 진주시켜 사실상 전만주를 점령해 버렸고, 철군 요구에 응하지 않으며 압록강 강구로 남하하고 있었다.

격화된 러일관계의 해결을 위하여 한만교환론(韓滿交換論)이 오고가더니 교섭은 결렬되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국은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밀려드는 일본군은 한국을 사실상 점령해 버린 상태에서 한일간의 협약을 강요하여 일본인 재정고문이 실권을 장악하는 보호국적 지위에 서게 하였다.

또한, 일본은 침략에 소요되는 경비마저 한국 국민으로부터 짜내려고 약탈적인 화폐개혁을 감행하여(1905.7.), 일본인에게는 폭리를 취하게 하고 우리 상인과 농민에게는 막대한 손해를 입혔다. 이러는 사이에 일본군은 해륙에서 연승하고 있었으나, 이미 국력은 탕진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계속할 힘이 있었다.

미국대통령 루스벨트(Roosevelt,F.D.)는 일본을 위하여 양국의 강화를 알선하였고, 육군장관 테프트(Taft,R.A)를 동경에 보내어 가쓰라[桂太郎] 수상과 미일비밀협약을 맺었다(1905.7.).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승인하고 미국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승인하여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영국·일본 3국은 동맹관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국은 일제의 한국침략을 승인한 것이었다.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도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함으로써 한국독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조약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이토는 서울에 와서 국왕 이하를 협박,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초대 통감(初代統監)이 되어 내정을 총괄하였다. 이어 헤이그특사사건이 일어나고, 정미7조약(1907)이 맺어지자 거족적 의병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토가 안중근(安重根)에게 암살되자 합병이 급속히 추진되어 전국에 헌병경찰제도가 시행되었다.

철저한 폭압 속에 데라우치[寺內正毅] 통감과 매국역적 이완용(李完用)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어(1910.8.) 독립국으로서의 주권은 완전히 약탈당하게 되었다.

(11) 토지조사사업·임야조사사업·태형령(笞刑令)

망국의 의미를 절감시킨 것은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이다. 토지의 위치·면적과 소유권을 밝혀 과세의 공평을 기한다는 이 사업은 9년이나 걸려 1918년에 끝난 1910년대 최대의, 사업이었다.

그것은 신고주의에 의한 대규모 약탈이었다. 소유권은 그 진실한 소유주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땅이라고 신고자가 신고하면 소유권을 법적으로 승인하여 주는데, 신고에는 지주총대(地主總代)의 인정이 필수조건이었다. 지주총대란 군청에서 동리마다 1, 2명씩 선정한 자들이다.

따라서, ‘토지조사’의 결과가 무엇인지, 신고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농민들에 대하여 신고주의를 실시한 것은 곧 약탈주의를 의미한다. 그 위에 의병항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일제관청에 대한 반감은 신고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면·군의 사무원들이나 그 친척 지주층들은 공유지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남의 토지를 자기 것으로 신고하였으며, 신고한 대로 99.48%가 소유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많은 자작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세습적 경작권을 누리던 경작농민의 경작권이 부인되어, 이른바 근대적 사유제하의 부정기소작인(不定期小作人)이 되어 언제나 지주의 자의로 생활기반에서 밀려나 생사의 기로에 서는 것을 뜻하였다.

비참하여진 소작인의 입장은 터무니 없이 소작료를 올리게 하여 종전에 수확의 3분의 1 내지 5분의 1이던 것이 3분의 2 이상이 되어 생산의욕을 잃게 되었다. 보릿고개나 흉년 때는 초근목피를 찾아 산야를 헤매는 궁민이 넘쳤으니, ‘토지조사사업’은 급격하게 농민의 몰락을 진행시켰고 그것은 또 격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임야조사사업도 1910년대 헌병정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의 임야에 대한 소유관계는 모호하여 공유림이 많았고 대부분 무주공산이었다. 일제는 1908년 「삼림법(森林法)」을 공포하여 임야소유자는 3년 내에 임야의 지적(地積) 및 면적을 간단한 지도를 첨부하여 계출(屆出)하게 하고, 기한 내에 계출이 없으면 무조건 국유로 한다고 하였다.

산림지주들이 낯선 계출에 관심을 가질 리도 없고, 혹 계출하였다 하더라도 서류미비라는 구실로 각하시켜 버려, 계출이 없었던 임야면적은 실로 우리 산림의 90%에 달하였다.

일제는 한 조각 법령으로 9할, 약 1400만 정보에 달하는 임야를 국유림으로 몰수하고, 적반하장으로 우리 협맹(峽氓: 두메에서 농사나 짓는 백성)이 종전과 같이 임야를 이용하면 ‘도벌’로 몰아 가차없이 태형에 처하였던 것이다.

태형은 합병과 함께 신설된 체형인데, 채찍으로 볼기를 맞는 것이지만 사실은 아무데나 마구 때려 왕왕 ‘사형의 집행과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던 우리 민족에 대한 광범한 ‘테러’정책으로, 헌병정치의 실태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활상·영농상 이른바 ‘도벌’은 불가피하였고, 거기에 따라 태형의 고통과 굴욕을 겪는 사람은 격증해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위에 국유림은 일본인에게 대부되어 연고 있는 수천 수만의 조선인의 용익(用益)을 금지하여 사경으로 몰았으니, 임야를 에워싼 분규와 소요는 헌병정치시대의 폭압 아래서도 결사적으로 완강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1910년의 일본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만큼 우리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노골적이고도 성급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토지·산림·어장·광산·요지·동척이민(東拓移民) 등에 관한 분쟁으로 민중의 소요는 연이어 일어났으며 한국민의 일제에 대한 원한은 뼈에 사무쳤다.

(12)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3·1운동은 그러한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결산적 항쟁이요, 종래의 산발적인 항쟁이 제1차세계대전을 매듭짓는 새 기운, 윌슨(Wilson,T.W.) 대통령이 강화조약의 원칙으로 내세운 약소민족해방·민족자결주의 등 14개 조항의 원칙에 고무된 독립선언 선포가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 규모로 폭발한 것이다. 3·1운동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내부의 요인, 즉 일제침탈에 항거하는 의병항쟁 이래의 민족주의를 중시하여야 할 것이다.

기미년 당시 일제관서에 밀려오던 분노한 우리 대다수의 농민들이 윌슨이 누구인지, 민족자결주의가 무엇인지 알 까닭이 없는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과 잔인무도한 압박을 무릅쓰고 남녀·노소·빈부를 막론하고 민족의 전원이 참가한 용감한 거족적 시위는 몇 달을 두고 계속되었으니, 5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났으며, 운동은 국내뿐 아니라 간도·하와이 등 한국인이 있는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해외로 망명한 지사와 그 가족도 많았는데, 같은 해 해외에 있는 모든 애국자들은 상해(上海)로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니, 이후 민족의 정신적 구심력이 되어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을 완화 내지는 어느 정도 시정하였으나 독립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기대하였던 구미 열강의 조선독립에 대한 원조, 국제정의의 발동은 허망한 꿈으로 돌아갔으니, 이 사실은 민족에게 실망과 더불어 각성을 주었다. 3·1운동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동아일보』 등 3개 국문지의 발행 허가, 헌병경찰로부터 보통경찰로의 전환, 「회사령」·「태형령」의 폐지, 집회결사의 조건부 승인 등이 이루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얻은 방대한 경제적 이득에 따라 채무국으로부터 채권국이 된 자기 국력에 대한 자신이 다소 여유 있는 정책, 즉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적 수탈은 이 문화정치 밑에서 오히려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를 일제의 식량기지화하여 대일(對日)미곡수출의 증대를 목적으로 하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 아래 모든 경제는 쌀 단작체제(單作體制)로 형성되어 갔으며, 그 과정에서 과다한 토지개량비는 더욱 자작농의 수효를 감소시켰다. 한편, 대전중의 전시이윤으로 급성장한 일본의 공업자본은 활발하게 조선에 투자되어 막대한 외지이윤(外地利潤)을 올리고 있었다.

그 동안 「회사령」에 묶여 민족자본은 자랄 겨를이 없었으니, 우리는 비싼 일제 공산품을 사 쓰고 헐값으로 농산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식민지적 수탈이 자행되어 더욱 가난하여져 춘궁기에는 산야에서 초근목피를 찾는 농민이 전체 농가의 반이나 되는 심각한 양상이어서 정든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간도로 향하는 조선농민의 수는 해마다 늘어갔다.

일제의 수탈이 심할수록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높아갔으니,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하는 흥사단(興士團)의 활동에 이어 항일민족통일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고 산하 여성단체로서 근우회(槿友會) 등이 조직되었다.

의사들의 의거도 활발하였으니, 나석주(羅錫疇)는 농민착취의 원흉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고, 강우규(姜宇奎)는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습격하여 부임하는 그를 전율하게 하였다.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은 상해의 임시정부가 좌우대립으로, 즉 대통령 이승만과 총리 이동휘(李東輝)의 대립으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만주에서는 김좌진(金佐鎭)·홍범도(洪範圖) 등이 거느리는 무장독립군이 청산리에서, 혹은 압록강과 두만강가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있어서 일제는 아직도 국경수비에 부심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벌어진 한일중학생의 충돌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사건이 부당한 일본경찰의 편파적 처사와 더불어 명확하고 치열한 반제독립학생운동(反帝獨立學生運動)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으니, 신간회원들이 배후에서 적극 활동하였던 것이다.

식민지적 차별대우와 노예교육에 대해 오랫동안 누적되었던 분노는 이 사건을 도화선으로 폭발하여 일제의 탄압으로써도 막을 수 없는 운동으로 타올랐다.

다음해 2월에는 참가교 194개 교, 참가학생수 5만 4000여 명에 달하였으니, 기미년 이후 10년 만에 터진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이었고, 학생층이 독립운동의 선봉세력이었으므로 그들의 외침은 민중의 가슴 속에 잠자던 독립정신을 크게 각성시켰던 것이다.

(13) 전시체제하의 식민지 조선

신흥자본주의국가로서 시장의 협소함에 고민하고 있던 일본은 그 심각한 국내 모순과 경제적 공황을 중국침략으로써 해결하려 하였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이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어 전투는 중국 본토로 옮겨졌으며, 전시태세의 강화에 따라서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항일구국운동과 손잡고 더욱 활기를 띠었다. 1932년 1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가 보낸 이봉창(李奉昌)은 일황을 그 궁성 밖에서 저격하였으며, 그 해 4월에 윤봉길(尹奉吉)은 상해에서 중국침략의 현지 군사령관인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에게 폭탄을 던져 그를 즉사시키고 시게미쓰[重光葵] 대사 등 요인을 쓰러뜨려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4억 중국 민중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일본자본주의의 유리한 투자시장으로서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수력전기를 가지고 있는 조선은 강한 견인력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었다. 이 기운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만주사변으로서, 군사작전의 전개와 군국주의의 성장은 더욱 전쟁을 확대, 장기화시켰는데, 이에 따라 만주·조선·일본을 세 요소로 하는 국방국가(國防國家) 건설이 급속히 진행되었다.

즉, 대규모의 소모전에 대비하여 영토 내의 모든 군수자원의 총동원과 군수공업의 급속한 확충이 요청되었으니, 이러한 일본의 전략적 요구에 따라 조선의 광공업은 약진하였다. 38선 이남에는 주로 경공업, 이북에는 중공업이 성장하였는데, 특히 흥남·원산 지방에서의 대규모 중화학공업의 발전은 눈부신 것이었다.

중일전쟁의 장기화에 따라서 조선은 이제 대륙전진병참기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이름 아래 조선의 전통도, 특수성도, 민중의 소망도 일본의 전략적 요청 아래 무조건 압살되고 전체주의적 박력을 가지고 이른바 ‘황민화운동(皇民化運動: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은 일본국민화한다는 운동)’이 광신적으로 추진되었다.

후진자본주의국가로서 식민지 재분할, 이른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의 건설을 부르짖고 나선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유럽이 전란에 빠지자 독일에 가담하여 1941년 12월 미국·영국과 전쟁을 시작하여 제2차세계대전을 일층 확대시켰다.

전시체제의 앙양에 따라 우리에 대한 그들의 압박은 가히 발악적이었다. 황민화운동은 광적으로 추진되어, 우리말을 배우지도 쓰지도 못하게 하고 공사간에 일본어만 상용하라고 강제하였다.

우리말의 신문·잡지를 폐간시키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징병·징용의 법을 만들어 우리의 청장년을 전쟁으로 내몰아 막대한 인명을 희생시켰다. 징용노무자 수는 조선 내 동원 261만 6000여 명, 일본 및 태평양도서 72만 3000여 명으로, 그 가운데 사할린탄광으로 징용갔던 사람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또, 전시식량을 위하여 농산물의 공출을 가혹하게 강요하고, 우리의 성(姓)도 버릴 것을 강요하는 일본식 창씨개명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한동안 기세를 올렸으나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전과 물량소모전 앞에 그들의 군국주의적 열광도 무력하였다. 더욱이, 새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원자탄이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떨어지자, 이 초절(超絶)할 과학무기 앞에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앞서 미국·영국·중국 3국은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바 있었는데(1943), 포츠담회담에서 이것을 재확인하고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권고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요, 민족의 새날이었다. 잃었던 독립을 다시 찾게 된 기쁨과 민족의 지축을 흔드는 만세소리는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힘찬 감격의 파도를 일으켰던 것이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와의 관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36년간에 걸친 일본의 한국지배는 종식되었으나, 뒤이은 미소냉전의 시작으로 한반도는 분단되어 남북한에 각각 다른 정부가 수립되었다.

(1) 한일관계

한국과 일본은 종전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미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자주적인 외교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정권은 경직된 대일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냉전상황하에서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의 일본의 존재도 의식해야만 하였다. 1949년 1월 주일한국대표부가 설치되었으나, 일본은 여전히 미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과의 직접교섭은 불가능하였다.

1951년 9월 8일 대일강화조약이 조인될 당시 아시아의 냉전상태는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대일평화조약 및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였는데, 그것은 아시아의 공산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일관계는 한국 정부의 평화선(이승만라인) 설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독도영유권문제·일본어선나포문제 등으로 마찰이 계속되었다.

평화선은 맥아더라인이 철폐된 이후 당시 대통령 이승만이 1952년 1월 18일 발표한 해양주권선언에 입각하여 설정된 것이다. 평화선 설정으로 독도는 완전히 한국에 소속되었으며, 1954년 이후 한국이 점유해 오고 있다. 한일국교정상화 단계에서 독도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해결을 보지 못하여 일본에 있어서는 여전히 미해결 영토문제로 남아 있다.

한편, 일본은 방위문제에 있어 한반도의 정세변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1950년 6월 6·25전쟁이 발생하자 맥아더(MacArthur,D.S.) 사령관의 지시에 의하여 제3차 요시다[吉田茂] 내각은 8월에 경찰예비대를 창설하였다. 이는 일본 재무장의 첫단계에 해당된다.

그 뒤 경찰예비대는 보안대로 개편되었다가 1954년에는 자위대로 발전하였다.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은 1951년에 시작되어 14년이 지난 뒤인 1965년에 한일협정의 체결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협정이 체결되기까지의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기는 1945년 8월 종전부터 대일강화조약의 발효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는 1952년 4월까지, 제2기는 1952년 4월 이후부터 1960년 8월까지, 제3기는 1960년 8월부터 한일협정이 발효되는 1965년 12월까지이다.

① 제1기: 일본이 1952년 4월까지는 미군정하에 있었기 때문에 1951년 10월 GHQ·SCAP(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의 알선으로 한일간의 예비회담이 개최되었다. 1952년 2월에는 본회담이 개최되어 재산청구권, 어업, 재일한국인의 국적 및 처우, 선박 등에 관하여 의견이 교환되었다. 그러나 어업문제와 재산청구권의 문제로 회담은 진척되지 않았으며, 1952년 4월 한국대표단이 귀국해 버림으로써 한일회담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② 제2기: 제2차회담은 1953년 4월부터 재개되었으나 7월에 중지되었고, 제3차회담이 10월부터 재개되었는데, 구보타[久保田貫一郎] 일본측 대표가 “일본의 36년간의 한국통치는 한국국민에게 유익한 것도 있었다.”고 발언함으로써 불과 2주 만에 결렬되었다. 그 뒤 4년 만인 1958년 4월 제4차회담이 재개되었으나 이번에는 재일교포북송문제가 발생하였다.

일본측은 재일교포북송문제를 정치문제와는 별개의 인도적인 문제로 간주하고 북송을 추진하였으나 한국측이 반대하였기 때문에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다가 중지되었다.

③ 제3기: 1960년 5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8월에 장면(張勉) 정부가 등장하였다. 장면 정부는 한일회담 타결에 의욕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에 일본측도 호응하여, 이 기회에 다년간 누적되어 온 현안문제들을 조속히 해결하고자 하였다. 1960년 9월에는 고사카[小坂善太郎] 외상이 전후 최초의 공식사절로 방한하였다.

장면 정부하의 한일관계는 크게 호전되어 서적수입, 어학강습소의 설치, 인적 교류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10월부터 제5차회담이 재개되었지만, 회담의 진전상황은 그리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면 정부가 1961년 5월 16일의 군사쿠데타로 붕괴됨으로써 한일회담도 중지되었다. 군사쿠데타 이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朴正熙)는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경제발전을 위하여 일본의 협력이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1961년 10월 제6차회담이 시작되었고, 11월에는 박정희 의장이 일본을 방문하여 이케다[池田勇人] 수상과 회담하였다. 교섭의 초점이 된 것은 청구권문제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견해차가 있었다. 결국 1962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서 이케다 수상, 오히라[大平正芳] 외상과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회담하여 청구권문제를 해결하였다(金·大平合意).

그 내용은 향후 10년간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그 밖에도 3억 달러 이상의 민간신용 공여(供與)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일단은 청구권·경제협력문제가 일괄적으로 해결되었다. 어업문제는 12해리선과 공동규제수역이 설정되어 평화선은 의미를 잃게 되었다.

한일협정을 체결하려는 한국 정부의 의욕과는 대조적으로 야당 정치인과 지식인·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치열하여, 1964년 6월에는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회담은 일시 중지되었다가 12월부터 재개되었다. 1965년 2월 시나(椎名悅三郎) 외상이 방한하여 이동원(李東元) 외무부장관과 한일기본관계조약안에 가서명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① 영사급 외교관계의 개설, ② 한일합병 이전에 체결된 조약의 무효 확인, ③ 국제연합총회결의 195(Ⅲ)에 명시되어 있듯이 한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의 공인 등이었다.

6월 22일 기본관계조약, 어업협정, 청구권, 경제협력협정,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문화재·문화 협정, 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등의 조약에 서명하였고, 대부분 12월 18일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한일관계는 경제협력을 축으로 하여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무역을 비롯한 경제교류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경제발전과 더불어 대일경제의존현상과 만성적인 수입초과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동경에서는 야당 정치인 김대중납치사건(金大中拉致事件)이 발생하여 일본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74년 8월에는 재일한국인에 의한 박정희대통령저격사건으로 대통령부인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하여 반일데모가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한일관계는 극도로 긴장되었다. 9월 시나 특사가 방한하여 긴장관계를 완화하는 조짐을 보였으며 1975년부터 관계가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일간의 불편한 관계는 일본측의 일방적인 역사해석을 둘러싸고 야기되기도 하였다.

1982년과 1986년에 발생한 교과서왜곡사건은 한국·중국 등 아시아국가들의 대일감정을 악화시켰으며, 일본의 신국가주의의 발흥에 우려를 표시하였다.

1984년에는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이 한국의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황궁에서 개최된 환영만찬석상에서 천황은 “금세기 일시적으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일본과 한국간의 관계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재일한국인문제이다. 종전 직후 일본에는 약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경영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현재 재일한국인은 약 70만 명 가량에 달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종전 후부터 평화조약 발효 때까지는 재일한국인들은 일본국적을 가진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일한국인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정지시키고, 1947년 5월 2일에 공포된 외국인등록령을 재일한국인들에게도 적용시켰다. 주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는 1951년 개최된 제1차 한일예비회담에서 재일한국인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다룰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겨우 7만 명 정도의 재일한국인들만이 직장을 가지고 있었고, 6만 명 정도가 일본 정부로부터 생활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측은 대일평화조약 발효일을 기하여 재일한국인의 일본국적을 무효화하고 한국국적을 취득하게 하여, 그 뒤부터는 재일한국인들도 일반 외국인들처럼 대우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측은 재일한국인들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어떤 경우에도 일반 외국인들과는 다른 지위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양국의 견해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한일국교정상화조약에서 해결을 보았다.

그 내용은 ① 협상대상의 재일한국인은 종전 전에 일본에 건너온 뒤 계속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국민 및 일본에서 태어난 직계비속으로 한다.

② 영주권허가 부여의 범위는 협정발효 5년 후까지 태어난 자까지로 한다.

③ 직계비속의 거주에 관하여는 협정발효 25년 후까지는 정부간의 협의에 의한다.

④ 영주자, 퇴거강제는 일반 외국인과는 다른 별도의 규정에 의한다.

그러나 2000년 현재까지도 재일한국인들의 법적 지위는 충분히 보장되어 있지 않다. 선거권·피선거권을 여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 여러 면에서 까다로운 일본 국내법의 피해를 입고 있다. 최근 크게 부각되고 있는 지문날인거부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재일한국인문제 외에도 구 소련 영토인 사할린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인문제는 아직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제2차세계대전 중 일본 정부에 의하여 강제 징용되어 탄광과 군수공장에서 일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그러나 귀환길이 막혀 그대로 사할린에 잔류하고 있는데, 1966년 당시 4만3000명에 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기까지에는 광복 후 20년이 걸렸으며, 한국의 국가원수가 일본을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은 국교정상화 이후 19년 후의 일이었다.

이와 같이, 한일관계는 극히 밀접하면서도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상태로 전개되어 왔다. 지금도 경제적 불균형 등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적인 분야보다 우선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두 나라 사이의 상호이해의 구축이다.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서는 민간교류의 확대가 필요하며, 바로 그럴 때 편견과 불신감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일통상면에서 2015년의 경우 일본의 대한수출은 256억 달러, 수입은 485억 5000만 달러로 출초현상을 보이고 있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389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다. 그뒤 양국 정상의 빈번한 교류와 경제협정의 체결 및 대일문화개방으로 양국은 새로운 관계로 접어들고 있다.

1998년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페이지를 연 한해였다. 10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국빈 방일을 통해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한·일 양국은 새로운 차원의 우호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공동선언에 일본이 처음으로 공식문서를 통하여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사회와 반성을 표명함으로써, 한·일 양국이 20세기의 불행하였던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한·일 양국은 2년 5개월간의 교섭을 거쳐 1998년 11월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른 새로운 한·일 어업협정에 서명하였다. 우리나라는 또한 과거사 극복을 위한 주도적 조치로서 1998년 4월 구 군대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지원금 지급을 결정하였다.

한편, 냉전이후 새로운 안보환경에 부응하고 양국간 안보면에서의 협력과 신뢰를 강화하기 위하여 1998년 6월 제1차 한·일 안보정책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양국 국민간 상호이해와 우호협력 증진을 위한 미래지향적 사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는 1998년 10월에 그동안 규제되어 온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부분적 개방을 실시하였으며, 청소년 교류사업, 2002년 월드컵 공동주최 계기 문화행사 등 각종 협력사업을 추진해 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2001년 또 다시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이 불거져 나오면서 한·일 파트너쉽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한편, 유엔 해양법협약 체제에 부응하기 위한 한·일 어업협정 개정교섭이 1998년 10월 김대중대통령의 일본 국빈 방문을 계기로 최종 타결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한·일 어업협정이 1998년 11월 28일 일본 가고시마에서 양국 외무장관간에 서명되었으며, 양국의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거쳐 1999년 1월 22일 정식 발표되었다.

김대중정부 출범 직전인 1998년 1월 23일 일본측의 일방적인 어업협정 종료 통고로 인하여 한·일 양국관계가 일시적으로 경색되는 등 어업문제가 한·일 양국의 최대 현안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8년 10월 김대중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새로운 어업협정이 타결됨에 따라 한·일 양국은 유엔해양법협약에 기초한 새로운 어업질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새로운 한·일 어업협정은 앞으로 발효될 한·중, 일·중 어업협정과 더불어 한반도 주변의 수역에서 한·중·일 3국간 새로운 해양질서를 형성하는 기축이 될 것이다. 한편, 연안국의 광범위한 권리를 인정하는 신 해양질서가 정착됨에 따라 우리 어업도 어족자원 보호와 연안어업 육성 등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어 우리나라를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주도적인 조치로 1998년 4월 구 군대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정부지원금 지급을 결정하였다. 이는 한·일 우호협력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과거사 문제가 더 이상 걸림돌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 따라 우리나라가 한·일 관계를 주도적으로 타개해 나가기 위한 결단이었다.

또한 일본 ‘기금’측에 대해서는 피해자 및 관련단체가 반대하는 일시금 지급을 중단하고, 관련단체와의 대화를 통해 사업의 전환을 모색해 가도록 촉구하였다.

그리고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시범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에 100명 수용규모의 요양원을 건립하여 1999년 3월 한국·일본·러시아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개원식을 거행하였으며, 안산에 건립중인 500세대 아파트는 1999년 말 완공, 2000년 초 입주 예정이다.

한편,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안보문제에 관한 의견 교환과 군사적 신뢰구축 및 투명성 제고 등을 위한 한·일간 안보대화의 필요성은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으나. 국내외적 여건의 미성숙으로 그동안 큰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냉전종식 이후 한반도 주변정세의 변화와 새로운 미·일 방위협력지침 채택에 따른 미·일 안보체제의 성격 변화 등으로 인해 한·일 양국 간 안보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되었고, 1998년 김대중대통령 방일 시 양국 정상간에 발표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쉽 공동선언’에서 안보분야에서의 상호 이해와 국방 분야 교류의 확대, 강화에 합의하는 등 한·일간 안보협력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정례적인 안보협의 채널로서 한·일 외교 및 국방 당국이 참여하는 제1차 한·일 안보정책협의회가 1998년 6월 개최되었다. 한편, 한·일 양국 국방장관과 방위청장관간의 교환 방문, 국방당국간 연례회의 개최 등 군사면에서의 교류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양국간의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안보·군사 면에서 양국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투명성을 확보해 나감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는 한 차원 높은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서는 활발한 문화교류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아래 그동안 규제되어왔던 일본 대중문화에 단계적으로 시장을 개방해 나가기로 하였다.

우선 제1단계로 1998년 10월 일본 영화, 비디오 및 만화 등의 일부 개방을 실시하였으며, 앞으로도 단계적이되 상당한 속도록 개방을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은 한·일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를 촉진시키고,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는 한·일 양국간의 국민교류 증진을 위한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며, 현재 양국은 월드컵 계기 문화행사의 공동개최, 사증발급 및 입국심사 간소화, 스포츠교류 강화, 산업 및 문화교류제 개최, 관광분야 협력 등에 관해 협의해 나가고 있다.

한·일 양국은 또한 1999년부터 연간 1,000명 규모로 취업관광 사증 제도를 실시키로 하고, 2000년부터 100명의 한국 유학생을 일본의 25개 국공립 이공계 대학에 유학시키기로 하였으며, 1999년부터 10년간 1만명을 목표로 한·일 중·고교생 교류를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1995년 11월 및 1996년 6월 한·일 정상회담 시 양국간 공동 역사연구에 합의한 이후 4차례의 양국 운영위원간 회의를 거쳐 1998년 9월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제1차 한·일 역사연구촉진 공동위원회 전체회의 및 한·일 역사포럼’이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역사연구의 활성화, 연구자료의 공개 및 정비 방안 등이 논의되었으며, 1999년 9월 제2차 회의를 개최하여 양국 정부에 정책건의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2)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

한반도 내에서의 분단과 대립은 재일한국인사회에 그대로 반영되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과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조직이 공존하고 있다. 종전 후 재일본한국인단체들이 합동하여 1945년 10월에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그 뒤 친일파 및 민족파를 배제하고, 또 한국신탁통치안에 찬성하자 조련에 반대하는 박렬(朴烈)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 10월 조선거류민단을 결성하였다. 이것이 민단의 전신이다.

1948년 9월 한국국회에 6명의 업저버를 파견하였으며, 10월에는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개칭하였다. 재일교포북송반대·한일회담 등을 추진하는 데 힘썼으며, 현재에도 재일한국인들의 대표기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6년 조련이 북한의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맹하였고, 일본공산당도 조선부를 설치하여 일본민족전선의 일익으로 조련구성원들을 가입시켰다. 그러나 1949년 조련은 주일미군사령부로부터 해산·재산몰수명령을 받았으며, 한덕수(韓德銖) 등 간부 25명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 뒤 재일통일민주전선 등으로 여러 차례 조직을 바꾸었다가 북한 남일(南日)의 “재일조선인운동의 책임과 재일조선인은 공화국 공민”이라는 성명에 보조를 맞추어 일본공산당의 재일조선인 당원들이 이탈하여 1955년 5월 조총련을 결성하였다.

결성 이후 한덕수가 계속 대표자로 있으며,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은 1948년 3월까지 일본인 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하여 각종 학교를 설치, 이른바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GHQ의 민간정보교육국은 조선인학교가 정치교육에 이용되고 있다고 간주하고, 문부성에 지시하여 재일교포들의 자녀들을 일본인학교에 의무적으로 취학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야마구치현[山口縣]·오카야마현[岡山縣]·오사카부의 재일교포학교의 폐쇄를 명령하였다.

이 조처에 대하여 오사카·고베[神戶]에서 항의대회가 열렸는데, 특히 고베에서는 1948년 4월 24일 수천 명의 재일교포들이 현청을 포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교섭 결과 조선인학교의 폐쇄명령 철폐, 사건에 대한 불처벌 등을 약속하였으나, GHQ 코베 사령관은 이 사건의 배후에 일본공산당이 있다고 하여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관계자들을 체포하였다.

5월 3일 조련측과 일본 정부가 타협을 보아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조선인학교는 극히 소수만 남게 되었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하였으나, 정경분리정책에 입각하여 북한과의 경제적·기술적 교류를 실시해 오고 있다.

특히, 1970년에 접어들면서 국제질서가 다원화되고 한반도 내에서도 남북대화가 시작되는 등 긴장완화조짐이 보이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은 아직 북한을 승인하지는 않았으나, 한반도 내의 두 개의 정부를 인식하여 북한에 대해서도 각 분야의 교류폭을 넓히고 있다.

현재 북한과 무역에 관한 조약(1965.8.)·어업협정(1984.11.∼1986.12.)·잠정어업협정(1987.12.∼1989.12.) 등을 체결하고 있으며, 민간방송과 북한중앙방송위원회간의 방송자료교환협정을 맺고 있다.

또한 1991년 1월부터 수교회담을 진행하고 있으나 쌍방간의 입장차이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고, 미·북 관계가 개선될 경우 양국관계가 급진전될 가능성도 있다. 통상면에서는 1995년의 경우 일본의 대북한수출이 3억 1000만 달러, 수입이 2억 7500만 달러였다.

일본 안의 우리 문화

(1) 문화사적 관계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일본의 건국신화 중에 아마테라스대신[天照大神]의 아우인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 하늘로부터 신라국의 소시모리[尸茂利]는 곳에 먼저 내려왔다가 다시 일본열도의 이즈모[出雲]로 왔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이 전승은 일본인 및 일본어, 그리고 일본문화의 기원을 상징하고 있는 신화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문화적인 관계는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으나, 구석기는 동아시아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종적으로도 현재의 인류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지지 않으므로,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서기전 3세기∼3세기)에 이르러 우리나라와 본격적인 관련을 맺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최초의 농경문화였던 야요이문화는 기원전 300년경에 북구주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농경에 관련된 일련의 기술은 모방에 의하여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한 생활기술을 체득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주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구주지역에서 특히 발달한 묘제인 지석묘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기반식 지석묘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다른 형태의 묘제, 즉 석관묘나 옹관묘 등도 우리나라 묘제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부장품도 다뉴세문경·세형동검·동모·동과를 비롯하여 마제석검·반월형석도 및 각종 옥제품 등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그 문화의 계통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기에는 금속기의 제조기술을 비롯하여 베틀을 사용한 직조기술 등이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분시대(古墳時代: 4세기∼6세기 혹은 7세기 말)에 들어오면 양국의 관계는 더욱 긴밀하여지는데, 먼저 이 시기에 한자가 전래되어 일본은 진정한 역사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또, 고분시대 후기에는 분묘의 부장품이 주로 한반도 계열인 마구(마면·등자·운주·행엽·재갈 등)와 무구(각종 대도 및 갑옷·투구), 스에키[須惠器], 관 및 금제귀걸이·관옥 등의 장신구 등으로 크게 변화한다.

묘제에 있어서도 5세기에 들어서면 한반도 계열의 횡혈식 석실이 널리 보급된다. 또, 일본의 고유한 고분형태로 간주되던 전방후원분에 대하여서도 최근에는 한반도기원설이 제기되어 논의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헌을 통하여서도 한반도 계열의 문화가 유입되는 당시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한자문화 수용과 관련된 아직기와 왕인에 대한 전승을 시작으로 하여, 스에키 제조와 관련된 도부(陶部), 마구(馬具)제조와 관련된 안부(鞍部) 및 화부(畵部)·금부(錦部)·경작부(鏡作部)·옥작부(玉作部)·단부(鍛部) 등의 명칭을 가진 선진기술보유자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활동한 사실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538년경에 백제의 성왕이 노리사치계(怒利斯致契)를 보내어 불경과 불상을 전하였으며, 이후 일본에서는 아스카문화[飛鳥文化]라고 불리는 불교문화가 꽃피게 된다. 일본 최초의 사찰인 호코사[法興寺]의 창건에도 백제에서 온 사공(寺工)·노반박사(鑪盤博士)·와박사(瓦博士)·화공(畵工) 등이 참여하였다.

이 무렵 일본으로 건너간 승려들 중에는 역법과 천문지리·둔갑술 등을 전한 백제의 관륵(觀勒),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한 고구려의 담징(曇徵), 쇼토쿠 태자[聖德太子]에게 불경을 강론한 고구려의 혜자(慧慈), 혜자와 함께 ‘삼보(三寶)의 동량(棟梁)’으로 불리던 백제의 혜총(慧聰) 등이 있었다.

한편, 한문 및 유학경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전달한 오경박사로서 단양이(段楊爾)·한고안무(漢高安茂)·마정안(馬丁安)·왕유귀(王柳貴) 등이 백제로부터 교대제로 파견되었는가 하면, 역박사(易博士)·의박사(醫博士)·역박사(曆博士) 등도 파견되었다.

이처럼 기록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경우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착하였는데, 814년에 성립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기나이에 분포한 1,182씨족 중 3분의 1 정도가 한반도 계열의 도래씨족이다.

그 중에서 후대까지 크게 활약한 씨족은 하타씨[秦氏]와 가라씨[漢氏] 등이다. 특히, 하타씨는 8세기 말에 이르러 헤이안경[平安京]의 건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야요이시대 이래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일본열도로 건너온 수많은 한반도 계열의 이주민들은 유학·불교 및 각종 문물의 전달과 수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의 일본문화의 방향설정과 그 독자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헤이안경이 완성되고 시대가 흘러가자 일본은 점차 고립화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이른바 도래계 씨족의 중요성도 감소하게 되자, 일본사회 속으로 녹아들어가 일본사의 표면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류는 양국의 국내상태 등을 이유로 1274년과 1281년에 여몽연합군이 일본정벌을 감행할 때까지 단절되었다. 14세기에 들어서면서 왜구가 우리나라 해안에 출몰하게 되자 양국의 사신왕래가 재개되었다.

1404년에 아시카가[足利義滿]가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양국의 선린외교관계가 다시 수립되었으며,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멸망할 때까지 60여 회의 일본국사가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이들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대장경 등의 불경전래 및 무역이 이루어졌다. 이때 일본사신이 가지고 온 물품은 염료와 후추·물소뿔 및 은·구리·유황 등이었다. 조선측에서는 이에 대하여 면포·저포·마포와 같은 섬유류와 인삼·꿀·잣 등의 특산품을 주었다.

특히, 일본의 구리는 조선시대에 활자를 대량으로 주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조선의 면포는 일본에서 고급옷감으로 무사와 귀족들이 소중히 여겼다.

그 밖에 교역품이 아닌 대장경과 불상·불화·종 등을 회사품으로 주었는데, 특히 대장경을 구하려는 일본측의 노력은 『존해도해일기(尊海渡海日記)』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지대하였으며, 현재의 야마구치지방의 수호(守護)였던 오우치씨[大內氏]에게 준 것만도 11부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린의 관계는 임진왜란으로 한동안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통하여 일본은 조선 전적 및 활자·도자기를 약탈하는 한편, 주자학과도 접하게 된다.

서적 등의 반출은 도요토미의 치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으며, 당시의 최고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들로 하여금 약탈한 서적을 평가하게 하는 동시에, 안코쿠사[安國寺]의 에케이[惠瓊]를 조선에 파견하여 서적의 반출을 지도하게 하였다. 당시 남산에 있던 활자고(活字庫)를 습격하여 활자를 대량으로 반출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최초의 활판인쇄물인 『고문효경(古文孝經)』을 간행하였다.

또, 이삼평(李參平) 등으로 대표되는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아리타[有田]·가라쓰[唐津]·하기[萩] 등지에 자리를 잡고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포로가 되어 아카마쓰[赤松廣通] 밑에 억류되어 있던 강항(姜沆)은 일본 근세유학의 시조로 불리는 후지와라[藤原惺窩]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후지와라의 제자 하야시[林羅山]에 이르러 비로소 일본의 유학이 불교와의 혼재상태를 벗어나 주자학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후 전개된 일본의 주자학은 이황(李滉)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임진왜란에서의 패배로 도요토미 정권이 망하고 도쿠가와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려는 일본측의 노력으로 국교가 재개되고 1811년까지 통신사가 12차례에 걸쳐서 파견되었다.

일본의 지식인이나 화가·의원 등은 이 통신사 일행과 만나 시문을 담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을 조선문물을 받아들이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행렬이 머무르는 숙소를 찾아와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문인들이 담론한 기록에 관하여 일본의 『통항일람(通航一覽)』에서는 백여 책에 이른다고 하였다. 양국의 의원들의 담론에 관한 일본측 기록으로는 『상한창화집(桑韓唱和集)』·『상한의담(桑韓醫談)』·『상한필담(桑韓筆談)』 등이 전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조선의 의서 중에서 『의방유취』·『동의보감』 등이 일본 의원들의 필독서에 속하였던만큼 의원들의 이러한 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와 일본은 2,000년 이상의 긴 교류관계를 맺어왔으며, 기본적으로는 선린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일합병은 그러한 선린관계를 파괴한 사건이었으며, 이 시기에는 우리의 문물을 대량으로 약탈하였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약탈해 간 문물 중에 대표적인 것은 서적과 활자였는데, 도쿠가와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약탈한 조선서적을 중심으로 후시미데이정문고[富士見亭文庫]와 스루가문고[駿河文庫]를 설치하였다.

그 소장본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63부 1,493책이 조선의 전적이며, 그 밖에도 손케이가쿠문고[尊敬閣文庫]·모리문고[毛利文庫] 등에 조선본이 남아 있다. 활자의 경우에는 임진왜란의 총사령관격이었던 우키다[宇喜多秀家]가 20만 자의 조선 동활자를 도요토미에게 바쳤다고 전하며, 지금도 일본의 출판사에 그 활자가 일부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더욱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우리의 문화재를 약탈하였는데, 특히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등에 기호가 높아 민묘 등을 파헤쳐 도굴하기도 하였으며, 고분에 대하여서도 발굴이라는 명목으로 유물을 파내고 보고서나 유물보존을 제대로 하지 않고 개인소장품이 되거나 출토지 불명상태로 일본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2) 유형문화재 및 무형문화재

현재 일본에는 고고학적인 유물에서 시작하여 불상·불화·불경·회화·서적·활자·도자기와 같은 조형물뿐만 아니라 언어나 노래·신화·전설 등에도 한국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

고고학적인 유물로는 야요이시대의 토기·청동기를 비롯하여, 고분시대의 각종 무기와 스에키, 철제품의 재료이자 부의 상징이었을 철정(鐵鋌)과 같은 고분의 부장품 중에는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모두 밝히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칠지도(七支刀)는 백제에서 제작되었음이 명문에 나와 있으므로 확실하게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칠지도는 한일외교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당시 백제가 가지고 있던 철 가공과 금 상감의 기술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이다. 현재 나라의 이시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존중이며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불상으로는 일본 최고의 불상조각으로 간주되고 있는 고류사[廣隆寺]의 미륵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다. 종전에는 일본 국보 제1호로 불리던 이 작품은 그 형태에 있어서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흡사하여 우리나라 고대불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뿐만 아니라, 목재도 당시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삼나무가 아니라 적송(赤松)이며, 목재를 가공한 방식도 달라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천황가의 보물창고인 쇼소원[正倉院]에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신라금 2점과 그 밖의 많은 식기류와 가위 등의 생활도구가 전하고 있다.

불경으로는 1006년에 필사된 『대보적경(大寶積經)』이라는 고려시대 초기의 사경(寫經)을 비롯하여 고려사경 20부, 조선사경 8부가 경도(京都)박물관 및 사가(佐賀)박물관, 그리고 여러 사찰에 남아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 현전하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사경 30부와 맞먹는 것이다.

불화로는 다이온사[大恩寺]의 오쿠만다라[王宮漫茶羅], 우에스기신사[上杉神社]의 아미타삼존도(1309) 등 80점의 불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려불화가 60점 정도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도 지온원(知恩院)의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1323), 사이후쿠사[西福寺]의 관경변상도, 세이호사[正法寺]의 아미타여래상이 있다.

그리고 교쿠린원[玉林院]의 아미타여래상, 가쿠린사[鶴林寺]의 아미타삼존상, 마쓰노오사[松尾寺]의 아미타팔대보살상(1320), 호온사[法恩寺]의 여래삼존상(1330), 다이토쿠사[大德寺]의 세 점의 양류관음상(楊柳觀音像)을 비롯하여, 죠라쿠사(長樂寺)·다이산사[大山寺]·교신사[鏡神寺]·호쇼사[豊乘寺]·세이슈라이코사[聖衆來迎寺]의 양류관음상, 엔가쿠사[円覺寺]의 지장보살상, 닛코사(日光寺)의 지장십왕상 등을 들 수 있다.

또, 조선종으로 통칭되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종으로는 833년 기년명이 있는 쓰루가[敦賀] 조구신사[上宮神社]의 신라종을 비롯하여, 904년에 주조된 우사[宇佐] 하치만궁[八幡宮]의 종, 나가토[長門] 잇구신사[一宮神社]의 종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고려시대의 종으로도 히로시마의 쇼렌사[照蓮寺]의 종(963), 사가 에니치사[惠日寺]의 종(1026), 대판 가쿠만사[鶴滿寺]의 종(1030), 시가[滋賀]의 엔조사[園城寺]의 종(1031), 하카타의 쇼텐사[承天寺]의 종(1065)을 비롯하여 명문이 없으나 뛰어난 작품들이 그 밖에도 여러 점 전하고 있으며, 그 수는 50여 개에 이른다. 조선시대까지의 우리나라 종의 총수가 180여 개임을 생각하면, 일본인들의 조선종을 구하려는 노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고려청자와 이조백자로는 많은 명품들이 일본 각지의 박물관과 개인소장품으로 현존한다. 특히, 동경박물관과 오쿠라[大倉]컬렉션·아타카[安宅]컬렉션·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이 한국도자기의 중요한 수장처이며, 개인소장품까지 합하여 어느 정도의 도자기가 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도자기 중 고려차완이라고 불리는 다기가 일본의 와비차도(0xCB30び茶道)의 유행과 더불어 널리 애용되었는데, 현재도 일본 다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고려차완은 조선시대에 민요에서 제작된 것이 대다수이며, 이도[井戶]·미시마[三島]·아마모리[雨漏]·하케메[刷毛目]·가타데[堅手]·고히키[粉引]·고모가이[熊川] 등으로 그 형태나 특징에 따라 분류되며 그 중에서도 이도차완을 가장 으뜸으로 친다.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喜左衛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도차완을 비롯하여, 쓰쓰이즈쓰[筒井筒]·호소카와[細川]·시바타[柴田]·에치고[越後]라는 이도차완 등 9점의 차완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일품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500점 이상에 달한다.

회화로는 강희안(姜希顔)의 「북극자미궁(北極紫微宮)」, 김홍도(金弘道)의 「맹호도」·「수원성의식도」·「출산석가도」, 김시(金禔)의 「목우도(牧牛圖)」·「설경산수도」·「산수도」, 해애(海涯)의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 이암(李巖)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변상벽(卞尙璧)의 「고양이」, 이상좌(李上佐)의 「설산기려도(雪山騎驢圖)」 등이 일본에 전하고 있다.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나라 덴리대학[天理大學]에 소장중인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이다. 이 밖에도 통신사를 수행하였던 화원으로 최경(崔涇)·고운(高雲)·이기룡(李起龍)·김명국(金明國)·한시각(韓時覺)·박동보(朴東普)·최북(崔北)·이의양(李義養) 등의 작품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의 회화로 간주되고 있는 작품 중에도 조선회화일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물이나 유적 이외에도 일본의 신화나 언어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영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천손강림신화」는 하늘에서 천황가의 조상이 구주지역에 처음으로 내려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구성이 우리나라의 단군신화 및 가야의 신화와 유사하다.

특히, 천손이 내려온 곳이 구시후루다케[久志布多氣]라는 전승이 있는데, 이는 가야의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곳이 구지봉이었다는 점에서 지명의 유사성을 엿볼 수 있다.

또, 그 천손은 신성한 이불[眞床追衾]에 싸여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것도 수로왕신화와 동일하다. 이러한 유사성을 근거로 일본의 「천손강림신화」는 가야인들이 구주지역으로 진출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으며, 기마민족의 일본정벌과 관련시키는 입장도 있다.

또,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법구조가 유사하여 가장 친연성이 있는 언어로 분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의 어휘 중에 우리말과 공통되는 경우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수사의 경우에도 셋을 나타내는 일본어의 ‘미’가 백제어에서 ‘밀(密)’로, 다섯(이츠)이 ‘우차(─次)’, 일곱(나나)이 ‘난은(難隱)’, 열(도)이 ‘덕(德)’이므로 서로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다.

그 밖에도 된장(미소)이 우리말에서 ‘밀조(密祖)’, 솥(가마)이 ‘가마’, 섬(시마)이 ‘사마(斯麻)’, 곰(고마, 구마)이 ‘구마(久麻)’ 등으로 일치한다. 또, 일본 고대의 행정구역명칭인 군(郡)에 대한 훈이 ‘고리’로 우리말의 ‘고을’과 일치하며, 일본의 지명인 ‘나라(奈良)’도 국가를 뜻하는 우리말의 ‘나라’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며, 그 밖에도 많은 사례들이 확인되어 있다.

(3) 한국연구 및 출판

일본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야요이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지속되어 온 것이므로, 일본의 한국연구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치밀하다.

일본 최초의 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이미 고구려·백제·신라·가야 등의 이름이 나타나며, 일부 기록들은 『삼국사기』 등이 전하는 내용보다 자세한 점도 있다. 이는 일본이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본의 승려 손카이[尊海]가 대장경과 불상을 구하기 위하여 왔다가 기록한 『존해도항일기』는 일본인에 의한 최초의 조선기행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조선사신에 대한 통역관으로 활약한 바 있는 아마모리[雨森芳州]는 우리말을 배우기 위한 회화교본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저술하였으며, 이 책은 메이지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말 입문서로서 일본에서 소중히 여겨졌다.

그는 부산의 왜관에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하여 5년 동안 체류하였으며, 경상도방언까지 숙달하였다고 한다. 또, 조선의 역사와 풍속을 연구하여 『조선풍속고(朝鮮風俗考)』(1720)·『교린제성(交隣提醒)』(1728)을 각각 저술하고, 조선과의 외교를 선린관계로 이끌어가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 아라이[新井白石]도 『동아(東雅)』(1717)에서 일본어와 조선어를 비교하여 그 어원을 밝히는 연구를 하였으며, 스스로도 조선어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쿠가와시대에 양국어의 단어를 비교하는 등 조선어를 연구한 문헌은 35책에 이르며, 『충구발(衝口發)』(藤井貞幹, 1781), 『왜훈간(倭訓栞)』(谷川士淸, 1830)도 그러한 저술의 하나이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이황의 저술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이 1651년에, 『자성록(自省錄)』이 1665년에 간행되는 등 이황 저술의 거의 대부분이 일본에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선린관계에 기본을 둔 관심과 조선에 대한 연구는 메이지시대에 이르러 크게 변질되고 정한론(征韓論)의 주장이 등장한다. 정한론은 요시다[吉田松陰]·사이고[西鄕隆盛]·기도[木戶孝允]·이타가키[板垣退助] 등에 의하여 주장된 조선침략론으로, 일본을 대국으로 성장시키고, 또 강력한 중앙집권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많은 사족(士族)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조선에 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증대되어 메이지시대에 출간된 조선관계 서적만도 547권에 이르며, 조선지도도 30종 이상 출간되었다.

단순한 견문기를 비롯하여 조선의 역사, 위인의 전기와 외교·경제산업·교육·문예·종교 등 조선의 여러 분야에 대한 정보가 일본에 소개되었는데, 일본인의 저술 이외에도 외국의 저술이나 조선의 문헌을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교린수지』 등이 다시 간행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풍속지적 성격의 『조선사정(朝鮮事情)』(1876)·『조선기문(朝鮮紀聞)』(1895)을 비롯하여, 조선의 상황을 자세하게 조사한 『한국총람(韓國總覽)』(1907)·『신찬조선사정(新撰朝鮮事情)』(1909)·『조선지(朝鮮誌)』(1911)와 조선역사를 개관한 『조선사(朝鮮史)』(林泰輔, 1892)가 있다.

그리고 한일고대사에 관련된 논문을 모은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吉田東伍, 1893), 조선시대만을 다룬 『조선근세사(朝鮮近世史)』(林泰輔, 1901)·『조선연표(朝鮮年表)』(森潤三郎, 1904)·『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細井肇, 1901), 정한론의 문제를 다룬 『정한평론(征韓評論)』(佐田白茅, 1875)·『정한론실상(征韓論實相)』(煙山專太郎, 1907)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조선의 농업·임업·어업·광업·양조업·잠업·제염업·연초재배 등 모든 산업 분야와 시장·화폐·금융에 관한 보고서가 계속 나왔으며, 우리말을 익히기 위한 여러 가지 교재도 출간되었다. 이러한 연구야말로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민지화하는 기초작업으로서 진행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조선총독부의 주관하에 보다 전문적인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고고학 분야에서는 1910년대부터 시작된 전국적인 지표조사 및 발굴보고서인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報)』·『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가 있다. 역사 분야에서는 사료 중심으로 편찬한 『조선사』(전37권)가 있다. 그 밖에도 조선의 민속·종교 등에 대한 각종 조사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조선의 연중행사』(1911)·『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1919)·『부락제(部落祭)』(1927)·『조선의 유사종교 朝鮮の類似宗敎』(1925)·『조선의 점복과 예언(朝鮮の占卜と豫言)』(1926)·『조선의 수수께끼(朝鮮の謎)』 (1911)·『조선의 속담집(朝鮮の俚諺)』(1926)·『조선의 복장(朝鮮の服裝)』(1927)·『조선의 향토오락(朝鮮の鄕土娛樂)』(1931)·『조선풍속자료집설(朝鮮風俗資料集說)』(1937)·『풍속관계자료촬요(風俗關係資料撮要)』(1939∼1942) 등 다수의 조사자료가 정리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궁극적으로 식민지통치를 위하여 쓰여졌다. 역사 분야에서는 일선동조론·만선사관·정체사관에 입각한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식민지지배의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가나자와[金澤庄三郎]·시라토리[白鳥庫吉]·키다[喜田貞吉]·이마니시[今西龍]·이케우치[池內宏]·쓰다[津田左右吉] 등의 역사학자, 아리미쓰[有光敎一]·가야모토[榧本杜人]·우메하라[梅原末治]·하마다[濱田耕作]·사이토[齋藤忠]·하라다[原田淑人] 등의 고고학자, 건축사의 세키노[關野貞], 『조선어학사(朝鮮語學史)』(1920) 등을 집필한 오구라[小倉進平]·마에마[前間恭作]·고노[河野六郎], 철학의 다카하시[高橋亨] 등을 들 수 있다.

일본의 패전 이후의 연구는 기본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연구방향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고학의 경우에는 일본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한국고고학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 것이므로 거의 대부분의 연구자가 양쪽을 동시에 연구하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오카자키[岡崎敬]·모리[森浩一]·니시타니[西谷正]·아즈마[東潮]·오다[小田富士雄] 등을 들 수 있다.

역사분야에 있어서는 고대사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임나일본부문제를 중심으로 한 논고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저술한 스에마츠[末松保和], 『일본서기조선관계기사고증(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등 다수의 저술을 낸 미시나[三品彰英], 『임나일본부와 왜(任那日本府と倭)』의 이노우에[井上秀雄]를 비롯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한국고대사 및 한일관계사의 연구를 하고 있다.

특히 일본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도 부분적으로는 한국사관계의 논문을 쓰는 경우가 많다. 하타다[旗田巍]·니시지마[西島定生]·사에키[佐伯有淸]·우에다[上田正昭]·나가쓰카[中塚明]·야마오[山尾幸久]·다케다[武田幸男]·사카모토[坂元義重]·기무라[木村誠]·다나카[田中俊明] 등의 많은 학자들이 한국사에 관한 논문을 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일고대문화교류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문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 한국문화 연구의 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일본문화의 원류를 찾으려는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역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언어·민속·신화·불교·유학·예술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또, 일본 내에는 조선학회와 조선사연구회가 있어 각각 『조선학보(朝鮮學報)』와 『조선사연구회논문집(朝鮮史硏究會論文集)』이라는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다.

특히, 『조선학보』는 1952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하여 한국학관계 논문 소개의 창구가 되어 왔으며, 『조선사연구회논문집』은 해마다 지난해의 한국학관계 연구문헌목록을 제공하고 있다.

1987년의 경우를 보면, 한국에 관한 단행본이 100여 권, 역사관계 단행본 60여 권, 역사관계 논문이 400편 이상 발표되거나 번역되었다. 한국학관계목록으로 가장 종합적인 스에마쓰의 『조선연구문헌목록』(1864∼1945)과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외한국사문헌목록』(1945∼1986)을 참고하면 일본의 한국학연구의 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어학 분야에서는 가나자와가 일한양국어 동계론을 주장한 이후 한일양국 언어의 문법체계 및 어휘 등을 비교연구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고노의 『조선방언학시고(朝鮮方言學試考)』(1945)·『조선한자음연구(朝鮮漢字音硏究)』(1968) 등의 연구서를 내었고, 이후 간노[菅野裕臣] 등의 연구자가 있다.

특히, 1963년에는 처음으로 오사카외국어대학에 한국어학과가 생겨 많은 연구자를 배출하게 되었으며, 1986년에는 22년의 작업 끝에 『조선어대사전』을 편찬하였다. 21만 어휘를 수록한 이 사전은 인명·지명·역사·제도·동식물·경제 등 각 분야의 전문용어 등도 수록하는 한편, 현대어와 조선시대어, 표준어와 방언도 항목으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사전의 편찬이야말로 일본의 우리말 연구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민속 분야에서는 아키바(秋葉隆)의 연구가 두드러지는데, 『조선무속의 현지연구(朝鮮巫俗の現地硏究)』(1950), 『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1954) 등을 저술하였다. 신화에 대하여는 미시나의 『일본신화론(日本神話論)』(1970), 『건국신화의 문제(建國神話の問題)』(1971), 『일본신화전설의 연구(日本神話傳說の硏究)』(1972), 오바야시(大林太郎)의 『일본신화의 비교연구(日本神話の比較硏究)』(1974) 등을 들 수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건너와 현지조사를 하는 연구자도 늘고 있다.

사상 분야에서는 불교와 유학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불교의 가마다(鎌田茂雄)의 『조선불교의 절과 역사(朝鮮佛敎の寺と歷史)』(1980)와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1987)·『신라불교사서설(新羅佛敎史序說)』(1988), 다무라(田村圓澄)의 『백제불교사서설(百濟佛敎史序說)』(1979), 『고대조선불교와 일본불교(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1980), 에다(江田俊雄)의 『조선불교사의 연구(朝鮮佛敎史の硏究)』(1977)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다무라의 글은 백제불교의 일본전래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한 연구인데, 일본의 한국학연구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자학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아베(阿部吉雄)의 『일본주자학과 이퇴계(日本朱子學と李退溪)』(1965)와 『이퇴계―그 행동과 사상(李退溪―その行動と思想)』(1977)을 들 수 있다. 이는 이황이 일본주자학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 연구이며, 1965년에는 이퇴계연구회가 창립되었다.

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것은 한국의 연구성과들이 신속하게 일본에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고고학 및 역사관계 서적을 많이 출판하고 있는 가쿠세이사(學生社)의 예를 보면, 『무녕왕릉』·『천마총』·『신라의 고미술』·『백제의 고와(古瓦)』 등 국립박물관에서 간행된 책을 비롯하여, 『백제고분연구』(강인구), 『신라의 고분』·『백제의 고분』·『가야의 고분』(이상 김기웅), 『한국통사』(한우근)이 있다.

그리고 『한국사의 재검토』(독서신문사), 『한국상고사의 쟁점』·『한국사의 신시점』(이상 천관우), 『한국고대사론』·『신라정치사회사연구』(이상 이기백), 『한국고대국가발달사』(김철준), 『한국민족문화의 기원』(김정배), 『비교고대일본과 한국문화』(천관우·김동욱 편), 『한국동족촌락의 연구』(김택규), 『한국신화의 연구』(김열규), 『조선의 샤머니즘』(유동식),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최재석), 『한국민속학개론』(이두현), 『고구려의 벽화고분』(주영헌) 등이 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 및 북한에서 나오는 해당 분야의 중요한 저술들이 거의 망라되어 번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번역물을 통하여 일본 내의 한국학연구의 저변이 확대되고 있으며 일반인의 관심도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古事記」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한일회담백서」(대한민국정부, 1965)
「日本と朝鮮の二千年」(, 井上秀雄·上田正昭 編, 1969)
「日本外交史 28」(鹿島硏究所出版會, 古澤淸次? 監修, 1973)
「日本に殘る古代朝鮮」(段熙麟, 倉元社, 1976·1978)
「日本文化と朝鮮」(李進熙 -NHK, 1980)
「日本外交 30年」(外務省戰後外交史硏究會, 1982)
「戰後日本外交史 Ⅱ」(石丸·松本·山本, 三省堂, 1983)
「戰後日本外交史 Ⅵ」(山本剛士, 三省堂, 1984)
「日本外交と對外紛爭」(れんが書房新社, 五味後樹·長谷川雄一 編,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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