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효익(孝翼), 호는 쌍봉(雙峯). 경주 출신. 고려의 명신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군자감주부 삼외(三畏)이다.
일찍이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장현광은 그의 비범함에 감탄, 붕우의 예로 대하였다. 또,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이기도 하다.
정구는 그의 행동거지가 범상하지 않음을 보고 월성에 인물이 났다고 하였다. 1634년(인조 12) 거의 60의 나이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1636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이듬해 금정도찰방(金井道察訪)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643년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나 수개월 후 노환으로 사퇴하였다. 그 뒤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삼성산(三聖山) 아래에 집을 짓고 산천과 벗하며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자득(自得)하는 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후학양성을 소임으로 하였다.
일찍이 글을 지어 서원의 학생들에게 학문을 시작하기 이전에 입지(立志)부터 할 것과, 독서하는 데 문자에 구애되지 말고 성현들이 전하고자 하는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배우지 못한 유생들에게 제사지내는 법을 익히게 할 목적으로 『문묘사향지(文廟祀享志)』를 지었으며,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단군·기자 이래 신라·고려의 고사를 잘 알게 하고자 『역년통고(歷年通攷)』를 지었고, 설총(薛聰)·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 등 삼현(三賢)의 사적(事蹟)이 산실(散失)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서악지(西岳志)』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