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가구(可久)
시호
제안(齊安)
이칭
계림군(鷄林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2년(세종 14)
사망 연도
1481년(성종 12)
본관
경주(慶州)
주요 관직
이조판서|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에, 경상도관찰사, 이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가구(可久). 정인검(鄭仁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염(鄭濂)이고, 아버지는 사예(司藝) 정지년(鄭知年)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51년(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54년(단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장원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고, 1455년(세조 1) 2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6월 경연사경(經筵司經)으로 있으면서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를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1459년 6월 승문원부교리로서 한가한 관직에 제수하여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한관독서(閑官讀書)의 혜택을 입었다. 이 후 감찰·이조좌랑·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1466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곧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에 올라 계림군(鷄林君)에 봉하여졌다. 그 뒤 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를 거쳐 1471년(성종 2) 3월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1472년 경상도관찰사를 겸하였고, 1474년 공조판서에 승진,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 1476년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7년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학문이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명성이 있었다. 시호는 제안(齊安)이다.

참고문헌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전고대방(典故大方)』
『한국인의 족보』(일신각, 1977)
집필자
한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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