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아버지는 참봉 조언(趙堰)이며, 어머니는 부사 강희신(姜姬臣)의 딸이다. 어려서 정두(鄭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한 뒤 천거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 이 때 이황(李滉)의 문하생들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 등과 교유하였다. 그 뒤 사도시직장(司䆃寺直長)·상서원직장(尙瑞院直長)·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장례원사평 등을 역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양지현감(陽智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가 하사되었으며, 1587년 금구현령(金溝縣令)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모집에 진력하였고, 그 해 가을 단성현감을 지냈다. 1596년에는 함양군수가 되었는데, 다음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을 받고 안음현감 곽준(郭䞭)과 함께 의병을 규합,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수축하고 가족까지 이끌고 들어가 성을 지키면서 가토오(加藤淸正)가 인솔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기개가 높고 해학을 즐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함안의 덕암서원(德巖書院), 안의의 황암서원(黃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시호는 충의(忠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