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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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잡는 재래식 정치망.
이칭
이칭
줄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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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물고기를 잡는 재래식 정치망.
내용

조선시대의 대표적 대규모 어망이었다. 경상남도 연안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경상남도지방의 고로(古老)들은 이를 ‘줄살’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과거 이를 줄시 대신에 줄살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줄(乼)’은 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한자이며, ‘시(矢)’는 살을 뜻한다.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밝히기 어려우나, 영조 때 이미 중요한 어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됨에 따라 만들어진 「균역해세(均役海稅)」에는 어조(漁條)라는 것이 보이는데, 이를 설명한 내용과 기타 문헌자료를 통해볼 때 경상도지방의 어조는 줄시를 포함한 정치망이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정조 때에는 경상도지방에서 거액의 설치비가 드는 줄시가 설치되고 있었음을 전하는 자료가 『비변사등록』(정조 1년 5월 16일)에 보인다.

그 상세한 구조와 어법 등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헌에 의하여 비로소 밝혀진다. 1908년에 발행된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 (제1집)에 의하면 어망은 원망(垣網)·수망(袖網)·어포망(魚捕網)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접안(接岸)한 어류가 외양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육지를 향하여 방사형으로 전개한 좌우 양그물이 수망이고, 어류를 장방형의 어포망에 유도하기 위하여 중앙 부분에 설치한 것이 원망이다. 원망은 새끼, 수망은 갈피(葛皮)와 새끼, 어포망은 갈피로 만들었다. 어망을 고정시키는 데 밧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줄시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경상남도의 거제도 및 가덕도 부근에 가장 많이 설치되었으며, 주요어획물은 대구와 청어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일본 어업자가 많이 와 고기잡이를 하면서부터 보다 능률적이었던 일본식 정치망인 대부망(大敷網)이 많이 사용됨에 따라 줄시어업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사용되고 있지 않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서 발달된 재래식 정치망을 대표하는 중요한 어망이었다.

참고문헌

『한국어업사』(박구병, 정음사, 1975)
『한국수산업사』(박구병, 태화출판사, 1966)
『한국수산지』1(농상공부, 1908)
집필자
박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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