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천군 ()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태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평안북도 태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
평안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정의
평안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운산군, 동남쪽은 영변군, 서쪽은 구성군, 서남쪽은 정주군, 남쪽은 박천군, 북쪽은 삭주군과 창성군에 면한다. 동경 125°20′∼ 125°40′, 북위 39°46′∼ 40°51′에 위치하며, 면적 620.09㎢, 인구 5만 5602명(1943년 당시)이다. 9면 82동리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태천면 북부동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남쪽의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방이 산과 구릉으로 둘러싸였고 그 중심지는 분지형(盆地形)의 태천면이다. 즉, 동북부에는 향적산(香積山, 762m)과 삼각산(三角山, 937m), 서남쪽에는 임천산(林泉山, 239m), 북쪽에는 이화산(梨花山, 737m) 등이 솟아 내평(內坪)이라고 하는 태천면을 둘러싸고 있다.

창성·삭주 방면으로 흘러내리는 대령강(大寧江) 상류는 태천 부근에서 구성 방면으로 내려오는 천방강(川坊江)을 합하여 영변군과의 군계를 따라 계속 남류한다. 내평 일대는 땅이 기름져 이 군의 주요 생산지대 및 거주지가 된다. 북부 내륙에 위치한 만큼 한서의 교차가 심한 대륙성기후가 뚜렷하며, 연평균기온 8.1℃, 1월평균기온 -11℃, 8월평균기온 24.5℃이다. 연강수량은 1,278㎜로서 남해안·영동지방과 함께 우리 나라 3대 다우지의 하나이며, 강우량의 배분이 7·8월의 두 달에 집중된다.

역사

[고 대]

이 군에서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뿐 아니라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도 아직 발견되지 않아 이 시대에 사람이 살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인접한 의주군 미송동에서 신석기시대 유물 및 주거지가 발견되고, 의주군 미송동·원하동·신암동에서 청동기시대 유물 및 주거지가 발굴되고 있으며, 같은 압록강 유역인 벽동군 연송동·용연동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유물·유적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늦어도 청동기시대에는 이 군에 사람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인근의 철산군·영변군·위원군·강계군·희천군 등지에서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발견되는 것은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성립, 한사군의 설치, 고구려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도 종족 및 문화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곳은 고구려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그 영토에 편입되어 군현이 설치되었을 것 같으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발해시대에는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에 속하여 있었다.

[고 려]

발해가 망한 뒤 이곳은 한동안 거란·여진족의 근거지가 되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진정책을 써서 성종 때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여 많은 지역을 수복하였다. 이곳은 본래 광화현(光化縣 또는 寧朔, 連朔)이라 하다가 969년(광종 20) 성을 쌓고 이듬해태주(泰州)로 고쳐 방어사를 두었는데, 이는 이곳에 진을 설치하여 거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거란과의 3차에 걸친 큰 전쟁을 치른 뒤 완공시킨 천리장성은 압록강구로부터 태주를 지나 함경남도 정평에 이르는 국방요새였다.

1174년(명종 4)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일어난 3년 후에 그 나머지 무리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 군을 비롯하여 가산·영변·개천·순천은 한때 그들의 소굴이 된 일이 있었다. 1216년(고종 3) 거란의 금산·금시왕자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침공하여 왔을 때 이곳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231년 여몽전쟁 때 몽고병을 피하여 해도에 들어갔다.

1232년 몽고군이 강화도를 공략하려고 포로로 잡혀온 태주 향호(鄕戶) 변려(邊呂)에게 수로(水路)를 물었을 때 뱃길이 험하다고 대답하여 적이 이를 믿고 물러갔으므로 상장군을 수여하여 그 충절을 치하하였다. 1261년(원종 2) 육지로 나왔으나 가주(嘉州)에 예속되었다. 1366년(공민왕 15) 다시 태주를 설치하여 무주(撫州)·위주(渭州)를 영속시켜 지주사를 두었으나 1381년(우왕 7) 2주를 환원시켰다.

[조 선]

1413년(태종 13)태천군으로 개편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세종 14) 호구는 278호, 615명이었고, 군정은 익군 141명, 수성군 4명, 선군 69명이었다. 1473년(성종 4) 승려가 부모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 현으로 강등되었고 관아가 지금의 태천면 동부리로 옮겨졌으며, 군인은 정과(停科)를 당하였다. 1697년(숙종 23)에 정과가 풀렸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759년(영조 35) 6면으로 나뉘어 있었고 호구는 2,908호, 1만 2595명이었다. 1811년(순조 11)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의 주동인물이었던 김사용(金士用)·변대익(邊大益)은 이 군 출신이며, 한때 이곳이 반란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근 대]

1871년에 편찬된 『태천읍지』에 따르면 8면으로 늘었고 호구는 2,215호, 1만 1933명이었다. 1895년의주부 태천군으로, 1896년평안북도 태천군으로 개편되었다. 1904년 동학당이 정부의 비정을 개혁하고자 진보회를 조직하고, 모두 단발할 때 이 군에서는 9월 3일 당시 개천대접주 문학수(文學洙)가 회원을 인솔하고 이 군으로 들어오던 중 관군의 사격으로 태천면 왕정동 검암노상(檢巖路上)에서 크게 패하였다. 그 뒤 이 참상을 잊지 못하는 천도교인들이 검암노상에 순도비를 세웠다.

1943년 호구는 9,731호, 5만 5602명이었다. 이 군의 인물로서 김인상(金麟祥)·선우 협(鮮于浹)·김익호(金翼虎)·백지눌(白志訥)·백홍조(白鴻祚)·박문일(朴文一)·박문오(朴文五) 등은 7현으로 꼽히며, 그 중 선우 협은 학문이 탁월하며, 저서로 『돈암전서 遯菴全書』가 있다. 1919년 3월 31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수천 명이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벌였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1920년 연통제의 군감으로 배동린(裵東麟), 참사로 김병도(金炳濤)가 임명되었다. 무장독립단의 활동은 무장공성단조직사건(武裝共成團組織事件)과 김이호(金利浩)의 집을 습격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나정구(羅正龜)·박태열(朴泰烈)·백인해(白仁海) 등은 무장독립단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순국하였다.

유물·유적

서성면 산성동의 농오리산성(籠吾里山城)은 고구려시대 어구(於九)라는 사람의 지도 아래 을해년(乙亥年)에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성벽은 길이 20㎞, 높이 3m이다. 성곽의 동서쪽에는 누마루형 장대(將臺)가 있는데 둘레가 6m이며 작은 반월형을 이루었다. 북쪽의 장대 역시 누각기단(樓閣基壇)형식으로 길이 9m, 너비 4m이다. 서면 내하동·관봉동·덕흥동에 걸쳐서 연이어진 성곽은 길이 1,090m, 높이 150m이며 흙과 돌을 혼합하여 축성하였다.

강동면 덕산동·풍림동·구성동, 동면 상풍동을 연결하는 28㎞에 이르는 석성이 있는데, 이 성곽은 창성군 장성의 문지를 지나 이 군의 강동면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영변군과 박천군을 지나 청천강가에서 끝나는 성으로 높이는 1m에서 3.5m에 이르며, 너비는 1.5m에서 6m에 이르고 있다. 이 밖에 강동면 구성동에 주위가 2,181m에 이르는 고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동면 송현동의 양화사(陽和寺)를 비롯하여 강동면 송북동의 송림사지(松林寺址), 장림면 신상동의 수종암지(水鐘庵址) 등이 있다. 양화사는 묘향산의 말사로서 872년(경문왕 12)에 창건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1729년(영조 5)에 보수되었다. 누정으로는 척서정(滌暑亭)·사의정(四宜亭)·탁영정(濯纓亭)·협수대(挾水臺)·창랑대(滄浪臺) 등이 남아 있다.

선사유적으로는 동면 학봉동·상단동의 선돌이 있다. 학봉동선돌은 삼각형에 가까운 선돌로 높이가 3.1m이며 상단동선돌은 높이 2.7m, 두께 55㎝로서 상단부가 뾰족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거석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에 동면 선화동·상풍동, 강서면 마장동·봉천동, 장림면 신상동 등지에 지름 10m, 높이 2.72m에 이르는 석총들이 산재한다. 산성의 발굴조사는 1957년 북한측에서 서성면 용상동의 산성을 발굴하여 고구려의 석조물과 석각물에 대한 발표를 하였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482년(성종 13)에 세워진 문묘와 태천향교가 있다. 서원으로는 희현재(希賢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오산서원(烏山書院)이 있다. 각 동리에는 1915년의 통계에 의하면 33개의 서당이 있었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8년부터 유지들에 의하여 사립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여 태천면의 견심학교(見心學校), 원면의 증익학교(增益學校), 동면의 옛 장수재(藏修齋)를 교사로 한 명성학교(明誠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강동면의 홍종주(洪鍾疇)가 사재로 1908년에 세운 명심학교(明心學校)는 한때 학생수가 100명에 이르렀으며 1934년 명심공립간이학교로 전환하였다. 한편, 명성학교는 1921년 학봉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이 군에서 생산되는 칠(漆)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나전칠기(螺鈿漆器)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1934년 칠공예학교가 설립되었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45년 3월에 이보익(李普翊)의 사재로 태천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45년 당시의 교육기관으로는 국민학교 9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종교상황은 불교사찰 2개, 천도교교당 1개, 개신교교회 2개가 있다.

산업·교통

이 군의 주산업은 농업으로 이제까지는 주로 밭농사가 중심이 되어 조·콩·옥수수·수수·대마 등이 많이 산출되었는데, 천방강의 수리시설이 완공된 뒤부터는 1,900ha의 논이 증가되고 쌀의 생산량도 격증하였다. 부업으로 누에치기 및 소·돼지를 사육한다. 수공업으로 명주·면포 등의 직물과 칠기의 제조가 비교적 성황을 이룬다. 광업으로는 흑연·금 등이 산출되는데, 그 중에도 곡곡령(曲曲嶺) 남쪽의 사금 채취가 한때 유명하였다.

상업활동은 『임원경제지』에 의하면 1830년대 이 군에는 5일장으로 관전장(館前場)이 3·8일, 원면의 원장이 2·7일에 열렸다. 또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902년경에도 읍내장과 원장이 있었다. 1923년에는 사설의 태천장과 공설의 소시장이 있었다. 이 지방은 교통이 불편하여 거래는 활발하지 못하였으나 주로 거래된 물품은 쌀·콩·명주·면포·주단·소 등이었다.

상인들은 가까운 박천·창성·삭주 등지에서 모였다. 식량자급을 못하는 창성 등지에서는 이곳에서 식량을 구입해 갔으며, 목초가 풍부하여 태천목장이 있어서 소·말의 거래가 많았다. 1926년에는 태천장, 원장이었던 사포장(沙浦場), 석우장(石隅場)이 있었다. 〈嚴永植〉

교통은 각종 도로가 내평의 중심지인 태천면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통하고 있다. 동쪽으로 영변, 서쪽으로 남시(南市), 서남쪽으로 정주, 남쪽으로 박천, 북쪽으로 창성, 동북쪽으로 운산 방면으로 각각 통하는 신·구도로가 있다. 이 군의 명승지로는 태천팔경(泰川八景)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오산청송(烏山聽松):오산의 노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 ② 옥포완사(玉浦浣紗):옥포의 맑은 물에 빨래하는 아낙네. ③ 용대완월(龍臺翫月):용대에 올라 멀리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으며 하는 달구경. ④ 사의송객(四宜送客):사의정에 올라 떠나는 손을 그리워함. ⑤ 내야관가(內野觀稼):내야에서 들려오는 풍년가. ⑥ 별암해화(鼈巖蟹火):별암에서 밤에 게 잡는 불빛. ⑦ 창랑귀범(滄浪歸帆):창랑대에서 돌아오는 배구경. ⑧ 양화모종(陽和暮鐘):양화사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

읍·면

[강동면 江東面]

군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6,389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용성동이다. 송북리에 삼각산이 솟아 있고 그 지맥이 동남방향으로 뻗어 있다. 이 삼각산에서 발원한 송림강(松林江)은 강서면에서 흘러온 북강과 용성동에서 합류하여 협수대에 이르러 황화천(潢華川)과 구림천(九林川)과 합류한다. 또한, 여름에는 북강(北江)의 수력에 밀려 역수(逆水)하는 천방강(川坊江)과 협수대에서 만나 관강(串江)을 이룬다.

이 면은 적유령산맥의 줄기들이 뻗어 있어 산지가 많아 농업보다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약간의 밭농사가 이루어진다. 유적으로는 구성동에 고성이 있으며, 명승지로는 송림사와 협수대가 있다. 용성(龍城)·신봉(新峰)·송남(松南)·송북(松北)·천계(天溪)·덕산(德山)·풍림(豊林)·구성(舊城)·덕화(德化)·약성(若城) 등 10개 동리가 있다.

[강서면 江西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4,460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마장동이다. 적유령산맥과 천마산의 지맥이 뻗어 있는 곳으로 덕림동에 이화산과 구봉산이 있다. 삭주에서 발원한 계반령천(溪畔嶺川)과 등구령천(等九嶺川)이 합류하여 형제천(兄弟川)을 이루어 면을 관류하며, 원탄(院灘)에 이르러 창성군에서 흘러오는 시채천(侍寨川)과 합류하여 북강을 이루며 강동면으로 흘러간다.

이 면은 주변의 산지를 배경으로 임업이 발달하였으며, 내륙산간지역으로 밭농사가 활발하며 주요 농산물로는 조·콩·수수·옥수수 등이 산출된다. 교통은 태천∼청산장 간의 3등도로가 지나고 있다. 마장(馬場)·봉천(鳳川)·용봉(龍鳳)·덕림(德林)·덕평(德坪)·상평(上坪)·은창(銀倉) 등 7개 동리가 있다.

[남면 南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인구 6,2906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송우동이다. 천강이 창랑대를 경유하여 동면으로 흘러 경계를 이룬다. 또 면의 남서 경계지역에는 임천산이 솟아 있으며 여기에서 발원한 탑현천(塔峴川)은 원면으로 흘러간다. 이곳에 있는 고개로는 삼봉동의 곡곡령과 안식현(安息峴), 은곡동의 은장령(銀藏嶺), 학림동의 살포당현(薩浦堂峴), 부흥동의 도덕현(道德峴)이 있다.

비교적 저평한 지대를 이루고 있어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와 그 밖에 조·콩·수수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교통은 박천∼태천 간 2등도로와 정주∼태천 간의 3등도로가 지나고 있다. 유적으로는 신암동에 김동윤기적비(金東潤紀蹟碑)와 송우동에 선산백씨종가(善山白氏宗家)가 있으며, 명승지로는 선암동에 창랑대가 있다. 송우(松隅)·학림(鶴林)·선암(仙巖)·신암(新巖)·삼봉(三峯)·은곡(銀谷)·가덕(加德)·부흥(富興)·대흥(大興)·용두(龍頭) 등 10개 동리가 있다.

[동면 東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7,713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학당동이다. 송현동에는 향적산이 있고 원흥동에 기우산(祈雨山, 760m)·지령산(地靈山), 학봉동에 퇴라산(退羅山), 선화동에 거문산(巨文山) 등이 연이어 있다. 한편, 창랑대를 지난 관강이 광성동에 이르러 용두강(龍頭江)이라고 불리며, 향적산에서 발원한 동창포(東倉浦)를 합류하여 박천에 이르러 대령강으로 불리게 된다. 또 영변군과의 경계에는 동창천(東倉川)이 흐른다.

산지가 많은 지역이므로 주로 밭농사를 하며, 조·콩·옥수수·수수 등이 산출된다. 주변의 산지에서는 목재가 많이 산출된다. 교통은 영변∼태천 간의 3등도로가 면의 서남부를 지나고 있다. 명승지로는 송현동의 향적산에 양화사가 있으며, 천강 일대에 천리장성이 있다. 학당(鶴塘)·선화(宣化)·고암(古巖)·풍산(豊山)·학봉(鶴峰)·선덕(宣德)·연중(延中)·상단(上丹)·원흥(院興)·연흥(延興)·흥평(興平)·송천(松川)·송현(松峴)·광성(光城)·상풍(上豊) 등 15개 동리가 있다.

[서면 西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7,561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내하동이다. 천마산의 유맥이 청룡산(靑龍山)을 지나 면의 서부에 있는 덕화산(德化山)과 내마산(內馬山)에 이어지며, 대덕산(大德山)을 형성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임천산에 이어진다. 고개로는 내하동의 석고개·지경현(地境峴), 덕상리의 뱀고개, 임천리의 탑현(塔峴) 등이 있다. 임천산에서 발원한 간강(間江)은 협수대에서 흘러오는 북강과 월봉동에서 합류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와 조·콩·수수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특히 덕상동에는 덕상저수지가 있어 수리시설도 양호한 편이다. 교통은 남시∼태천 간의 3등도로가 면의 북부를 가로지른다. 내하(來賀)·월봉(月峯)·관봉(觀鳳)·대흥(垈興)·신송(新松)·청계(淸溪)·덕흥(德興)·덕상(德祥)·운룡(雲龍)·임천(林泉) 등 10개 동리가 있다.

[서성면 西城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4,823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송귀동이다. 삭주천마산맥(朔州天摩山脈)이 팔영령(八營嶺)을 지나 산성동까지 뻗어 견산(見山)·마산(馬山)과 송귀동의 무시운대(霧市雲臺)를 이루며 검은산(儉隱山)에 연결된다. 고개로는 용상동의 퇴유령(退踰嶺), 관룡동의 안대현(安臺峴), 송곡동의 장현(長峴) 등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며, 그 밖에 조·콩·수수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마산에서는 비석재(碑石材)가 많이 산출된다. 교통은 구성∼태천 간의 3등도로가 지나고 있다. 송귀(松貴)·용상(龍祥)·산성(山城)·강북(江北)·송곡(松谷)·관룡(觀龍) 등 6개 동리가 있다.

[원면 院面]

군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인구 4,454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안심동이다. 덕산동에는 정주와의 경계를 이루는 고현령(高峴嶺)이 있고, 깎아세운 듯한 단애인 샘베루가 임광동에 있다. 서면의 임천산에서 발원한 탑현천이 송백·덕산·임광동을 거쳐 박천에서 발원한 가지천(加之川)과 합류하여 관강 하류로 유입된다.

산간지대에 위치한 저평한 지대로 토질이 비옥하여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와 조·콩·수수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교통은 정주 및 납청정∼태천 간의 3등도로가 지나고 있다. 안심(安心)·속흥(俗興)·임광(林光)·덕산(德山)·신흥(新興)·송백(松栢)·원풍(院豊) 등 7개 동리가 있다.

[장림면 長林面]

군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인구 7,312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환현동이다. 장흥동에 두모산(頭帽山)이 있고 진남동에 묘산(猫山)이 있으며, 이들 산은 단애와 절벽 및 험한 고개들이 있다. 고개로는 마장령(馬長嶺)·환풍고개·덕고개·옥현(玉峴)·청토골고개 등이 있다. 원면으로부터 흘러드는 탑현천이 동류하여 관강 하류로 유입한다.

비교적 저평한 지대로서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와 조·수수·콩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교통은 박천∼태천 간의 2등도로가 면의 서부를 지나고 있다. 유적으로는 환현동에 김창욱기적비(金昌旭紀蹟碑)가 있다. 환현(還峴)·환하(還賀)·첩남(帖南)·태흥(泰興)·마평(馬坪)·운석(雲石)·진남(鎭南)·신상(新上)·장흥(長興)·취흥(取興) 등 10개 동리가 있다.

[태천면 泰川面]

군의 중앙에 위치한 면. 인구 6,299명(1944년 당시). 면소재지는 북부동이다. 서부동에는 오산(烏山)이 있고 그 동쪽으로 오산의 일맥이 장사형(長蛇形)으로 이어져 끝부분에 협수대가 있다. 고개로는 월은령(月隱嶺)·달마치(達麻峙)·석현(石峴)·작현(柞峴) 등이 있다. 면의 중앙부는 저평한 지대로서 넓고 비옥한 내평을 이루며 그 중앙을 대령강이 흐르고 있다. 우기에는 내평 일대가 물에 잠겨 바다와 같이 되기도 한다. 적유령산맥과 서남부의 천마산유맥(天摩山流脈)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와 조·수수·콩 등의 잡곡이 산출된다. 교통은 북부동을 중심으로 영변·구성·박천·정주·청산장 등지로 각각 통하는 2등도로와 3등도로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유적으로는 서부동에 내천향교, 삼두비(三頭碑)와 김도선기념비(金道善紀念碑)가 있으며, 명승지로는 태천팔경과 서부동에 삼양공원(三陽公園) 등이 있다. 북부(北部)·동부(東部)·서부(西部)·남부(南部)·북안(北安)·왕정(旺井)·남흥(南興) 등 7개 동리가 있다.

광복 후 변천

평안북도 중부 내륙지대에 있는 군. 동쪽은 운산군·영변군, 서쪽은 구성시, 남쪽은 박천군·운전군, 북쪽은 대관군·동창군에 접하고 있다. 면적은 736㎢, 인구 10만 2874명(1996년 추정)이다.

1952년 12월 태천면·동면·서면·남면·원면·강동면·강서면·서성면·장림면 등 9개 면이었으나 1954년 10월 영변군의 용흥동이, 1958년 6월 대관군의 개혁동, 동창군의 양지동과 용전동이 태천군에 각각 편입되었다.

행정구역은 태천읍(泰川邑)을 비롯하여 태천읍(泰川邑)을 비롯하여 송태(松泰)·용상·내하·운룡·임천·신봉·덕흥·은흥(銀興)·송원(松院)·신광(新光)·안흥(安興)·취흥·환현·마현(馬峴)·진남·용흥(龍興)·상단·학봉·학당(鶴塘)·덕화·천계·풍림·마평·은덕(銀德)·덕천(德川)·개혁(改革)·용전(龍田·양지(陽地) 등 1읍 28개 이가 있으며, 군 소재지는 태천읍이다.

[자연환경]

이 군은 산지가 많은 지역이며, 주변에서 가운데로 가면서 점차 낮아져 하나의 분지가 되어 있다. 군의 가운데에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하천은 대령강을 비롯한 중소 규모의 하천들이 많이 있고, 덕상·송안·임천 등 관개용 저수지들이 있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8.5℃, 1월 평균기온은 -10℃, 8월 평균기온은 23.8℃이다. 이 군은 우리 나라에서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으로서 연평균강수량은 1,338㎜이다. 첫서리는 10월 7일경, 마감서리는 4월 1일경에 내린다. 산림은 군 전체면적의 65%를 차지하며, 식물 분포에서 특이한 것은 옻나무가 많은 점이다.

[산업·교통]

이 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과 공업이며, 주로 농업을 위주로 한다. 경지면적은 군 넓이의 30% 정도이고, 그 중 논은 35%를 차지하는데 여기에서 옥수수·쌀·콩 등이 생산되며 옥수수 생산이 가장 많다. 가축으로는 소·양·토끼·돼지·오리·닭 등을 기르며, 광복 전에는 과일밭이 거의 없었으나 현재는 700여 정보의 과수원이 조성되어 사과와 기타 여러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공업은 취흥광산과 옷공예품·식료·방직·편직·피복·종이·목재가공·철제·제약·기계부문 등의 지방산업공장이 있다. 특히 공업제품은 오래 전부터 이 지방의 명산물로 널리 알려졌으며, 옻칠한 가구제품과 각종 무늬를 놓아 만든 귀중품함 등도 생산한다. 이 밖에도 초물주단·돗자리 등의 초물제품도 명산물로 알려져 있다.

교통망으로는 태천∼구성 간, 태천∼영변 간의 철도와 신의주∼개천 간, 운전∼벽동 간, 정루∼태천 간의 도로가 있다.

덕화약수·소니골약수·용전약수가 유명하다. 유물·유적으로는 상단동에 옛 건축물인 양화사와 용오동산성이 있고, 홍평·선암·풍산·송천에는 선돌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태천고등중학교와 태천남자고등중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북한지지요람』(통일원, 1993)
『인물의 고향』-북한편(중앙일보사, 1991)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태천군지』(태천군지편찬위원회, 1981)
『북한문화재 실태와 현황』(문화재관리국, 1985)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노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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