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관악산의 지맥인 금주산[일명 虎巖山] 정상에 위치한 산성이다. 산성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자 했던 삼국의 쟁패 및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고자 했던 신라군사의 활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군사의 주둔지가 되기도 하였다.
1989년과 1990년 두 차례에 걸쳐 산성과 한우물(천정[天井] 또는 용추[龍湫]라고도 불림) 등에 대해 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이후 한우물은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다. 이곳은 근래까지 조선왕조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른바 해태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실제로 산성 유적의 동북쪽 끝에 그 짐승을 형상화한 석상이 있다. 이 석상은 한우물의 각자(刻字)로 보아 석구(石狗)로 추정된다.
산성은 조그만 봉우리를 최고봉으로 하고 있으며, 성 내부는 비교적 평탄한 면을 이루고 있다. 산성의 동북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험준한 봉우리들로 막혀 있으며, 서북·서남·서쪽은 안양천(安養川)을 끼고 발달한 넓은 평지를 이룬다. 또 산성터 정상에서 날씨가 맑은 날 서쪽을 바라보면 멀리 소래·군자 일대의 해안선이 보인다. 또 북쪽으로 한강을 건너 용산과 남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조망된다.
이러한 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볼 때 안양과 금천 일대의 평야를 관할하는 요새지로서 서쪽의 해안과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암산성을 중심으로 한강 남북 일대에는 많은 산성과 토성이 있는데, 이들의 축조 시기는 서로 약간씩 다르더라도 삼국통일기에 들어서면서 각 지역을 방어하는 주요 관방시설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실제로 발굴 조사된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산성(二聖山城) 유적과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어 확실한 신라성으로 보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 고적조에 “호암산고성(虎巖山古城)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한 못이 있는데 가뭄이 심하면 비내리기를 하늘에 빌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산성의 축조 시기와 축성 목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두 차례의 발굴과 지리적 입지조건을 통하여 호암산성의 역사적 사실을 살필 수 밖에 없다.
호암산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성벽의 총 연장은 약 1.25㎞이고 성벽은 표고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진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산성터 안에서 확인된 유구는 우물터 2개소와 건물터 4개소이다. 발굴된 두 우물터는 호암산성이 처음 축조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이 출토되어 성의 축조 시기를 유추할 수 있다.
기존의 한우물인 제1우물터는 최근까지 조선시대에 쌓아올린 석축이 남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석축지(石築址)가 확인되었다. 연못터의 내부 퇴적토 조사에서 나타난 층위(層位)에 따르면, 지표 아래 30㎝까지는 백자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그 아래에는 유물이 거의 없는 굵은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모래층은 연못이 사용되지 않던 시기에 토사가 유입되어 형성된 것이다. 또 이 모래층 아래에 교란되지 않은 뻘층이 계속되고 여기에서는 통일신라의 유물만 출토되었다. 그 아래에는 유물층이 없고 자연 암반 위에 점성(粘性)이 강한 점토(粘土)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목제 손잡이에 철제날이 끼워진 월형도끼와 토기 등 통일신라시대 유물의 중심연대는 대개 7∼8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제2우물터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원래 금천 일대는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당시의 지명은 전하지 않고 한강 유역이 고구려에 편입되었을 때 잉벌노현(仍伐奴縣), 통일신라 경덕왕 때에는 곡양현(穀壤縣)으로 불렸다.
그런데 명문 중 잉벌내의 ‘내(內)’는 나(那)·노(奴) 등과 같이 지명 끝에 붙어 때에 따라 훈독 또는 음독되는 것으로, 지(地) 또는 천(川)이나 천변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잉벌노와 잉벌내는 동일 지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명문의 ‘역지’는 인명이고, ‘내말’은 신라 17관등명 가운데 11위인 나마(奈麻)의 별칭으로 금석문에 자주 나오고 있다.
한편 757년(경덕왕 16)에 잉벌내현이 속해 있던 한산주가 한주로 개칭되고 그 영현(領縣)으로 1소경과 27군 46현의 군현 정비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때 토착지명이 한자풍으로 개칭되고 있다.
따라서 명문이 새겨진 유물로 보아 산성의 축조 하한선은 경덕왕 16년이 된다. 호암산성의 입지조건으로 미루어 672년(문무왕 12)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남한산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관련된다.
주장성은 한강에서 경기도 광주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에 대한 방어와 공격에는 적절한 요새이지만, 지형상 관악산이 가로막혀 서울에서 수원으로 향하는 적은 방어할 수 없다. 여기서 서해안과 한강 북쪽이 한눈에 조망되는 관방시설이 요구되는데, 그 지역이 바로 호암산성이 된다. 따라서 당시 이 일대에서 당나라 군사와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신라는 호암산성의 입지를 충분히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산성 안 제1우물터의 석축구조가 674년에 만들어진 안압지의 석축구조와 거의 유사하여, 산성의 축조 시기가 문무왕 때로 나당전쟁에 대비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 석축구조는 축조 당시의 원형이 남아 있는 남동쪽 모서리의 경우 모두 13단으로 쌓여 있으며, 석축의 맨 아랫단은 20㎝ 가량 내어 쌓고 위로 가면서 들여쌓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데, 이러한 축조방법은 안압지의 축조방법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호암산성 발굴에서 고려시대의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중국 화폐인 희령원보(熙寧元寶)가 주목된다. 희령은 북송(北宋) 신종(神宗)의 연호로 1068년에서 1077년까지 사용되었으므로 고려 문종 연간에 해당된다. 이 때는 고려와 송이 활발한 대외무역을 하던 시기로, 당시의 화폐가 호암산성에서 발견됨으로써 고려시대 국제무역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