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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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경주 대릉원 일원 중 황남리 고분군의 황남대총 북서면
경주 대릉원 일원 중 황남리 고분군의 황남대총 북서면
고대사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 돌무지덧널무덤 · 쌍무덤.
이칭
이칭
황남동 98호분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 돌무지덧널무덤 · 쌍무덤.
개설

황남동고분군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만 2,908㎡이다. 이 고분군 내에 있는 황남대총의 일련번호는 ‘황남동 98호분’이다. 황남대총은 1973년 7월과 1975년 10월에 문화재관리국 조사단이 발굴조사하고,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붙여진 별칭으로 황남동에 소재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의미다.

내용

현재 외형이 복원되어 있는 황남대총은 2개의 원분(圓墳)이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분(瓢形墳)으로 동서 지름 80m, 남북 지름 120m, 남분 높이 22m, 북분 높이 23m에 이르는 신라 최대의 봉토분(封土墳)이다. 황남대총 남분의 피장자는 남자, 북분의 피장자는 여자이며 신라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봉토와 봉토의 기저부(基底部) 주위에 쌓은 바깥 둘레돌[護石]의 남·북분 연접상태로 볼 때, 먼저 남분이 축조되었고 뒤에 북분이 남분에 잇닿아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분 각각 봉토의 중심부에 덧널과 돌무지[積石]가 설치된 고신라 특유의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두 고분 모두 돌무지 부분 내부에서 나무기둥을 줄지어 세웠던 기둥구멍과 기둥 사이를 연결했던 횡가목(橫架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목조가구(木組架構)를 먼저 설치하고 그에 맞춰 돌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돌무지 부분 안에 설치된 이러한 목조가구는 고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을 계보상으로 북아시아 덧널무덤과 더욱 가깝게 접근시키는 중요한 근거로서 주목받고 있다.

남분의 돌무지 부분 안에는 으뜸덧널[主槨]과 딸린덧널[副槨]이 동서로 배치되어 T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장축방향은 으뜸덧널이 동서로, 딸린덧널은 남북으로 두었다.

으뜸덧널은 원지표를 약 45㎝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한 바닥 위에 세운 내외 2중의 덧널으로 되어 있었다. 바깥덧널[外槨]은 동서 길이 6.5m, 남북 너비 4.1m, 높이 약 3.5m이고, 안덧널[內槨]은 동서 길이 4.7m, 남북 너비 2.3m, 높이 약 1.8m이다. 안·바깥덧널 사이에는 잔자갈이 채워져 있었다.

안덧널의 가운데에는 내외 이중의 널[木棺]이 동서로 놓여 있었다. 바깥널[外棺]은 동서 길이 3.6m, 남북 너비 1m, 높이 약 0.8m이다. 안에 칸막이를 세워 동쪽은 껴묻거리 수장부[副葬品收藏部]로 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안널[內棺]이 안치되어 있었다.

안널 안에서는 60세 전후의 남자로 판단되는 피장자의 유골 일부가 출토되었다. 또한 이와 함께 피장자가 착장했던 금동관·금제관드리개[金製冠垂飾]·금제목걸이·유리구슬을 꿰어 만든 가슴장식, 금제허리띠[銙帶]와 띠드리개[腰佩]등의 장신구, 금동장고리자루큰칼[金銅裝環頭大刀]1개가 출토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는 윗부분에 금제관식·금동관·은관(銀冠)·은모(銀帽)·금동신·은제허리띠와 띠드리개·금은반지·금귀걸이 등의 장신구와 10여 개의 금은장고리자루큰칼, 은제정강이가리개[銀製脛甲]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각종 금속용기, 칠기(漆器), 봉황머리모양병[鳳首形甁]등의 유리용기 등이 담겨 있었다. 바닥부분에는 쇠솥과 각종 토기들이 놓여 있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윗부분의 바깥널 뚜껑 위에도 금동제 정강이가리개, 비단벌레날개로 장식된 금동허리띠 등이 놓여 있었다. 바깥널과 안덧널 사이의 잔자갈층 위에서도 각종 토기와 철기가 출토되었다.

으뜸덧널 내부에서는 순장(殉葬)된 것으로 보이는 20대 여자의 유골 일부도 발견되었다. 바깥덧널의 뚜껑부분에도 금제귀걸이를 비롯한 각종 장신구와 토기, 철제무기, 마구류가 배치되어 있었고, 새무늬[鳥文]가 새겨진 청동제거울 1점도 출토되었다.

딸린덧널은 으뜸덧널과 3m 두께의 냇돌벽을 사이에 두고 그 서쪽에 설치되었으며, 규모는 남북 길이 5.2m, 동서 너비 3.8m, 높이 약 1.3m이다. 흙바닥에는 각종 껴묻거리가 여러 겹으로 쌓여 있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7구분의 안장틀[鞍橋]과 거기에 부속된 각종 마구류, 300여 점의 철제무기와 이기(利器), 1,500여 점의 각종 토기가 출토되었다.

그 중 안장틀을 비롯한 1세트의 마구는 모두 용(龍)무늬가 투조된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500여 점에 달하는 쇠투겁창[鐵矛]는 형식이 10여 종이었다. 쇠스랑·가래끝 등의 농기구도 30여 점 포함되어 있었다.

북분은 남분의 북쪽 끝 봉토 일부를 절개하고 축조한 돌무지 부분 가운데에 장축을 동서로 둔 덧널이 하나만 설치되어 있었다. 동서 길이 6.8m, 남북 너비 4.6m, 높이 약 4m 규모의 외덧널[單槨]로 되어 있는 덧널의 바닥은 지반을 약 50㎝ 파고 냇돌과 잔자갈을 깔아 구축되었다.

덧널 안에는 동쪽을 제외하고 잔자갈로 쌓은 너비 80㎝, 높이 55㎝의 ‘ㄷ’자형 석단(石壇)이 돌려지고 그 안에 널이 놓여 있었다. 널은 남분과 같은 구조의 이중 널으로 길이 3.3m, 너비 80㎝, 높이 약 80㎝였다.

바깥널의 서쪽 부분에 안치된 안널 안에서는 동쪽에서부터 금관과 3쌍의 금제관드리개, 금구슬과 유리구슬로 된 목걸이, 금제허리띠와 띠드리개, 11개의 금팔찌, 12개의 금반지 등 피장자가 착장했던 각종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안널에서는 장신구만 출토되었으며, 허리띠의 좌우 양편에 5쌍의 귀걸이형 장신구가 띠드리개와 함께 수장되어 있어 이채로웠다.

바깥널의 동쪽 부분인 껴묻거리 수장부에서는 윗단에서 각종 장신구, 그 아래에서 금은장고리자루큰칼, 타출무늬은잔[打出文銀杯]등의 금속용기, 4개의 유리잔, 중국 육조시대의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 등이, 바닥부분에서 쇠솥과 각종 토기, 그림이 그려진 가락바퀴[紡錘車]가 출토되었다. 타출문은잔

덧널 뚜껑부분에도 각종 장신구, 토기,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마구류 등이 부장되어 있었다. 북분의 출토유물은 남분에 비해 장신구가 월등히 많은 반면, 무기와 마구가 적었다. 또한 피장자가 큰칼을 착장하지 않은 대신 덧널 내에서 가락바퀴가 출토되어 피장자가 여자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껴묻거리 수장부에서 ‘부인대(夫人帶)’의 명문(銘文)이 있는 은제허리띠의 끝장식이 출토된 것도 이 고분의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뒷받침해준다. 결국, 이 표형분은 부부총(夫婦塚)임을 알 수 있다.

남·북분 모두 봉분 정상부에 마구류를 위주로 하는 일괄유물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분조성 마지막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매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물의 출토상태는 고분 조성 당시 덧널 내부, 덧널 상부, 봉분 정상부 등 당시의 장의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부장행위가 이루어졌던 것을 보여 준다.

의의와 평가

황남대총은 그 형태가 표형분에 속하는 부부총으로서 어울무덤[合葬墳]이다. 이 고분의 축조연대는 신라에 있어서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발굴조사자는 무덤덧널 형식의 변천, 고식(古式) 마구(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 말∼5세기 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남정설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연구자나 중국에서의 고식 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 초로 편년하기도 한다. 이밖에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나물마립간(내물마립간)이나 눌지마립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황남대총: 적석목곽분연구의 새 지표」(이종선,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문, 1996)
「황남대총(남분)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연구소, 1994)
「황남대총(북분)발굴조사보고서」(김정기 외, 문화재관리국, 1985)
「경주황남동98호고분(남분)발굴약보고(김정기 외, 문화재관리국, 1976)
「경주제98호고분남분에서 출토한 고분골에 관한 연구」(장신요·김규택, 문화재관리국, 1976)
「경주황남동98호고분발굴약보고」(김정기 외, 문화재관리국, 1974)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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