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 정보 · 금융 · 유통의 중심지로 대구 심장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동서남북이 신천, 달성 기슭, 명덕로 그리고 경부선을 경계로 각각 대구광역시 동구, 서구, 남구 그리고 북구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8˚34'~128˚38', 북위 35˚51'~35˚89'에 위치한다. 면적은 7.06㎢이고, 인구는 4만 5천 516세대 9만 242명(2024년 2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2개 행정동(57개 법정동)이 있다. 구청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2가에 있다.
분지상 대구 지역의 중심지로 팔조령에서 발원하는 신천의 서쪽 범람원과 그 주변에 발달한 낮은 구릉지로 형성되어 있다. 그 범람원은 두텁게 퇴적된 사력질 토양의 충적층으로 두께가 3~5m이기 때문에 투수성이 강하다. 북동부의 팔공산(1,193m)과 남구의 대덕산(584m)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개방된 나팔상의 대구분지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현저한 내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14.8℃이며, 최한월인 1월의 평균기온은 0.8℃인 반면에 최난월인 8월의 평균기온은 25.8℃로써 연교차는 25.0℃에 달하고, 연간 강수량은 1222.4㎜ 내외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과우지역이다.
구석기나 신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발견된 적이 없고, 중구 대봉동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간돌검 · 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민무늬토기와 홈자귀 · 반달형돌칼 등의 유물이 침산(砧山) · 연암산(燕巖山)의 구릉지대에 흩어져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철기 유입 이후 초기 국가 형성 시기에 대구지역에서는 달성토성, 용두토성, 검단토성, 봉무토성, 고산토성 등이 만들어졌다. 이후 대구에 형성되었던 소국은 군현(郡縣)이라는 지방단위로 재편되어 신라로 편입되었다. 이때 이 지역은 달성토성을 중심으로 하나의 군(郡)으로 설정되어 하주(下州)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덕왕(742~765) 때 수창군(壽昌郡)과 그에 딸린 대구현,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 등 총 다섯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중심지가 오늘날의 달성토성터(達成土城址, 달성공원)이다.
1018년(현종 9) 대구지역을 관할하는 수창군이 수성군(壽城郡)으로 개칭되면서 오늘날의 경주에 속하였고, 대구현 · 팔거현 · 하빈현 · 화원현은 성주지역에 속하였다. 그리고 현풍현은 밀양에 속하면서 대구지역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1143년(인종 21)에 대구현이 주현(州縣)으로 승격되면서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상주하고 인근의 하빈현과 화원현을 속현으로 두면서 대구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대구현은 1394년(태조 3)에 수성현 · 해안현이 새로이 포함되는 것을 시작으로 인구가 증가하여 1419년(세종 1)에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466년에는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하여 지리 ·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이 지역이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1596년(선조 29) 대구 달성에 경상감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대구부는 대구본읍과 수성현 · 하빈현 · 해안현 · 경산현 · 하양현 · 화원현을 모두 포괄하는 큰 고을이 되었다.
대구읍성은 1736년(영조 12)부터 축조하고 대수리 공사를 거듭해 1870년에 이르러 완전한 준공을 이루었다. 대구읍성의 진동문(鎭東門)은 현재 동아백화점 남쪽 도로와 동성로가 교차되는 도로, 달서문(達西門)은 중부경찰서를 거친 서향 도로와 서성로가 교차하는 도로,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은 약전골목 종로~남성로 교차 네거리, 공북문(拱北門)은 대안성당 뒷길과 북성로가 마주치는 지점에 있었다. 또한 동소문(東小門)은 대구백화점과 중앙파출소가 연결되는 지점, 서소문(西小門)은 서문교회 입구 골목 앞에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조선총독부 지방 관제’에 의해 종래의 감영제가 폐지되고 대구군은 대구부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14년 새로운 부제의 실시로 대구부의 영역이 옛 대구읍성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는 오늘날 중구 관할구역과 북구 칠성동을 포함한 지역에 해당한다. 그러나 1938년에 다시 대구부의 행정구역이 이전보다 11배 이상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중구 지역은 대구부의 중심지역으로, 수성면 · 달서면 · 성북면에 각각 출장소를 두어 관할하였다.
그리고 대구시가 철도요충지로 주목받으면서 1904년 1월 지금의 대구역 자리에 경부철도 남부건설사무소가 설치되고, 이를 계기로 대구 중심부의 가로망도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대구읍성의 성벽이 철거되고 성 내에 남북으로 5칸 도로인 오늘날의 중앙로가 건설되었다. 1907년 4월에는 동서남북의 성벽이 완전히 철거되었고, 철거된 성벽을 따라 동성로(東城路) · 서성로(西城路) · 남성로(南城路) · 북성로(北城路) 총 4개의 간선도로가 개설되었다.
1953년 4월에 대구시 직할 동 중 동인 1가 외 16개동을 관할하는 중부출장소와 덕산동 외 37개동을 관할하는 종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1963년 1월 1일 중부 · 종로출장소가 통합되어 중구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법정동 55개동(행정동 21개동)에 4.6㎢(인구 15만 1071명)를 관할하게 되었다.
1964년 12월 1일 북구 태평로 3가를 편입하였으며, 1970년 7월 1일 봉산동을 봉산 1구, 봉산 2구로 분동하였다. 1980년 4월 1일 남구 남산동 · 대봉동 일부를 남산 1동, 남산 2동, 남산 3동, 남산 4동으로, 남구 대명동 일부를 대봉 1동, 대봉 2동으로 중구에 편입하였고, 1981년 5월 16일 구청사를 동인 2가 1번지(현 시청주차장 소재)에서 동인 2가 78번지로 이전하였으며, 7월 1일 대구직할시 중구로 승격하였다.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설치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광역시 개칭으로 대구광역시 중구로 개칭되었다. 1999년 6월 1일 구청소재지가 동인동2가 177-4번지로 이전 되었으며, 2011년 행정동 통폐합으로 13개 행정동에서 12개 행정동이 되었다.
중구의 지정유산으로는 사적과 등록유산, 국가민속문화유산 등이 있다.
국가지정문화유산인 사적으로 대구 달성(사적, 1963년 지정)과 대구 계산동성당(사적, 1981년 지정), 구 대구의학전문학교 본관(사적, 2003년 지정), 구 도립대구병원(사적, 2003년 지정)이 있다. 등록유산으로는 구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대구 동산병원 구관이 있고,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진주하씨묘출토유물이 있다. 구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은 2002년 2월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대구 동산병원 구관은 2002년 5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진주하씨묘출토유물은 1993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대구달성은 1939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원래 대구의 옛 부족국가였던 달구벌의 토성으로서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된 성곽의 하나이다. ‘달성공원’이라는 이름도 바로 그 토성에서 유래하였다.
계산성당은 1887년에 착공하여 1899년 한국식 목조십자형 건물로 완공되었으나 1900년 소실되어 1902년에 다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로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로베트 신부가 설계했으며 공사는 화교(華僑)가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의 고딕식 두 개의 종각이 우뚝 솟아 있어 ‘뾰족집’이라는 별명이 있다. 이 건축물은 대구지방의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종교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의 본당은 1918년에 증축된 것이고 1981년에 사적으로 선정되었다.
국가민속문화유산 진주하씨묘출토유물은 1989년 현풍곽씨문중에서 조상의 묘소를 이전하던 중 발견된 17세기 초반의 총 249점의 유물이다.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유산은 총 97점으로, 그 중에서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곳과 관찰사의 관사인 선화당(보물, 2021년 지정)과 징청각이 있다. 징청각은 1982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일제시대 선교사들의 주택이었던 선교사 스윗즈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선교사 챔니스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 선교사 블레어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89년 지정)이 있다. 성모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90년 지정), 대구제일교회(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1992년 지정),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성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은 대구지역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뿌리내리게 된 성지로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남산초등학교강당(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계성학교아담스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계성학교맥퍼슨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계성학교핸더슨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구대구상업학교본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한국산업은행대구지점(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2003년 지정) 등이 있다.
문화유산자료로 1914년에 지어진 신학교로서 대구 천주교 역사의 상징인 성유스티노신학교가 있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1990년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태조 7년(1398) 지금의 교동에 처음 창건된 것으로 소실과 재건이 반복된 후 1032년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된 대구향교대성전(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원래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던 관풍루(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82년 지정), 서상돈 선생이 대지를 기증함으로써 1915년 세워진 샬트르성바오르수녀원코미넷관(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이 있다.
1982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된 건들바위는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어 주는 바위로 그 모양이 삿갓쓴 늙은이 같다해서 삿갓바위[笠巖]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선사유적지인 대봉동에서 출토된 고인돌과 초기국가 형성기의 달성토성이 있다. 대봉동 고인돌은 현재는 경북대학교박물관 앞에 복원되어 전시하고 있다.
중구에는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慶尙監營)이 포정동, 현재 경상감영공원 자리에 설치되어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관찰사가 상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대구뿐만 아니라 경상도 중심의 역할을 담당한 지역인 만큼 전통적으로 대구교육의 본거지였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전통 교육기관은 남산동의 대구향교이다. 대구향교는 1398년(태조 7)에 현재의 교동에 창건된 후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었으나 곧 재건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다. 그 후 1599년(선조 32)에 달성공원 근처에 이건(移建)되어 1601년에 중건되었고, 1605년에 다시 교동으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1932년에 또 다시 현 위치에 옮겨지게 되었으며 1973년에는 보수정화공사를 하였다.
대구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사립달성학교(私立達成學校)가 1899년 7월 경상감영 뒤편 공공건물에서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대구 최초의 학교란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높지만 일본인에 의해 근대교육이 행해졌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이후 1916년에 대구보통고등학교에 최종 인계되었다.
사립대남학교는 1900년 미국에서 온 북장로회 선교사 아담스(J. E. Adams, 18671929)가 제일교회 입구 대문채에 세운 학교이다. 같은 해 아담스와 함께 활동한 브루엔 선교사의 부인 마르타 브루엔(M. S. Bruen, 18751930)에 의해 신명여자소학교(信明女子小學校)가 설립되었다. 두 학교는 1926년 희도보통학교로 통합 · 개명되었고, 1955년 종로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이후 1996년 3월 1일 국민학교 명칭 변경으로 오늘날 종로초등학교로 불리고 있다.
1906년 대구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가 제일교회 내에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남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 문제를 해결하고자 1946년 계성중학교로 인가, 1951년 계성고등학교를 설립, 1963년에는 계성초등학교 설립을 통해 지역의 전통을 지닌 학교가 되었다. 1907년에는 계성학교와 더불어 중등 여성교육을 목표로 한 신명여학교가 설립되어, 이후 1952년 신명여자고등학교로 경상북도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해 2004년부터 남녀공학으로 변경되어 신명고등학교로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경북고등학교, 대륜중 · 고등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 대구상원고등학교, 대구공업고등학교 등은 일제강점기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중구 지역에 설립된 학교들이다.
현재 동인동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은 1910년 동문동(東門洞)에 설립괸 관립대구자혜의원(官立大邱慈惠醫院) 내에 1923년 설립된 사설의학강습소(私設醫學講習所)에서 출발하였다. 이후 1925년 경상북도로 관리권이 이양되어 도립대구의원(道立大邱醫院)으로 개칭, 1933년 전문학교 인가를 받아 공립대구의학전문대학교가 되었다. 광복 이후 1951년 경북대학교가 개교하면서 의과대학으로 편입되었고, 병원은 1993년 독립병원으로 바뀌어 경북대학교병원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6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0개교, 중학교 5개교, 고등학교 4개교 등이 있다. 도서관으로는 1919년 중구 포정동에서 대구부립도서관으로 개관하여 1985년 현재의 동인동 2가에 신축한 대구시립중앙도서관과 1971년 대봉동에서 경상북도 학생도서관으로 개관한 대구시립대봉도서관이 있다. 특히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은 다양한 주제의 강연회와 초등학생 대상 논술강좌 그리고 다도, 서예 등의 문화강좌 및 컴퓨터강좌 등을 통해 생활문화공간으로서 그리고 평생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문화공간으로는 2개의 공공 공연장, 4개의 민간 공연장을 비롯한 51개의 공연시설과 전시시설 34개 소, 지역문화복지시설 3개 소, 문화원 1개 소가 있다.
대구콘서트하우스(대구시민회관)는 중구 태평로 2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역 문화예술 진흥에 기여하고 향토예술의 향상발전 및 공공집회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75년 10월 개관 이래로 현재 약 3,465㎡의 대강당과 419㎡의 소강당 그리고 3개의 전시관을 비롯해 휴게시설 및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중구 봉산동에 위치한 봉산문화회관은 2004년 10월 5일 개관한 종합문화예술회관으로 주민들의 문화욕구 충족 및 정서를 함양하고 지역예술 발전을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3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공연장과 소공연장을 비롯한 3개의 전시실, 2개의 강의실을 갖추고 있으며, 중구문화원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봉산문화회관은 시내 중심가에 입지하여 반월당 지하철역과의 접근성이 용이하며 봉산문화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어 문화거리와 연계된 문화예술회관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중구에는 봉산동 예술마당 솔을 비롯하여 대구연극의 맥을 잇고 있는 예전 아트홀, 남산동에 위치한 아트홀 하모니아 등의 소극장이 있다. 이들 극장에서는 주로 지역의 극단들이 연극을 공연하고, 100석 이하의 규모로 관객과 소통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지역 연극문화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외에도 6개의 영화관에 45개의 상영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 동성아트홀은 대구 유일의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매해 가을 대구단편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그리고 박물관으로는 약전골목 안에 건립된 약령시전시관과 향토역사관이 있다. 약령시전시관은 1984년 약령시 한약재 상설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한약재 및 의서, 한방기구 등을 전시해 오다가 1993년 약령시전시관이라는 정식명칭으로 개관하였다. 현재 각종 한약재와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 등의 한의서 및 한방기구 등 3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달성공원 내에 위치한 향토역사관은 중구의 역사, 민속 등과 관련된 유물자료를 통해 향토 문화유산을 이해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5년 신설되었다. 2개의 전시실에 문화유산 및 대구의 지형도를 비롯한 전시 소모형 등을 갖추고 있다.
중구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로는 1990년부터 시작하여 매해 5~6월 경 개최되는 동성로축제를 비롯하여 봉산문화거리에서 열리는 봉산미술제와 남산동 인쇄골목일대에서 열리는 남산인쇄거리축제 그리고 대구 약전골목 일대에서 개최되는 약령시축제가 있다.
동성로축제는 젊은이들의 거리로 인식되는 동성로에서 시민정서 함양 및 문화예술의 대중화를 목표로 동성로 전역에서 열리는 축제이다. 이 축제는 지역민과 지역기업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루어지며 동성로 상권의 활성화와 대구시민의 문화적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3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해 10월 중순 열리는 봉산미술제는 대구 유일의 문화거리를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다. 봉산문화거리 내 16개 회원화랑에서 30여 명의 작가들과 동양화, 서양화를 비롯한 조각, 판화, 설치미술 등 다양한 장르의 약 500여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지역 유일의 미술제이다. 남산인쇄거리축제는 2000년 제1회를 시작으로 매해 10월 개최되고 있다. 남산인쇄거리축제는 인쇄기술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행사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 공모전, 대구시민이 참여하는 다양한 부대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1978년 고사, 농악놀이 등의 간단한 행사로 시작되었던 약령시축제는 1999년 달구벌축제에서 독립하여 단일축제의 모습으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매해 5월 특별한 테마를 중심으로 개최되어 왔고, 2006년 축제는 전국유일의 한방특구로 지정된 약령시를 대표하기 위한 행사로 구성되었다. 약전골목 전역에서 차량을 통제하여 전통한방체험과 약초전시 등 부대행사가 진행되고, 한약재를 보다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한약재 경매도 이루어진다.
음력 정월 초에 지신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안강과 다복을 축원하는 지신밟기가 약전골목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원래의 서문시장은 대구읍성의 서문(西門) 밖 천황당(天皇塘)이란 못이 있던 자리였는데, 1920년경에 못을 메우고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이름도 서문시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시장이 들어서고 난 뒤로 큰 불이 자주 났다. 그 이유를 시장 사람들은 천황당 못에 빠져 죽은 억울한 처녀귀신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하면 서문시장이 생기기 전 천황당 못은 선남선녀들이 즐겨 찾았으며, 봄 · 가을이면 근처의 여자들이 모여 놀이를 하던 곳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에게 희롱당한 뒤 버림받은 처녀가 못 둑에 신발을 벗어 놓고 못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뒤 못은 메워지고 시장이 들어섰는데, 그 때 죽은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恨) 서린 죽음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시장에 자주 불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현 위치로 이전되고 난 후에도 서문시장의 잦은 화재가 처녀귀신의 억울한 한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원혼을 달래는 굿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건들바위는 그 형상이 갓을 쓴 노인처럼 보인다고 해서 삿갓바위라는 뜻의 입암(笠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의 건들바위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나, 신천의 직강공사로 신천의 유로가 바뀌기 전인 200여 년 전까지는 건들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냇물이 흘렀다. 그래서 이곳은 낚시와 풍류를 즐기던 경치 좋은 곳이었다. 조선 전기 대구 출신의 대학자 서거정이 대구의 풍광을 읊은 대구십영을 남겼는데, 이곳 건들바위의 경치에 매료되어 ‘입암조어’(笠岩釣魚, 입암에서 고기낚기)라는 시를 지었다. 옛날부터 건들바위는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와서 굿이나 제사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하는 부인들이 치성을 올리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그래서 매달 3일과 7일이 되면 촛불을 켜고 소원을 비는 부인들이 많아 이 날만 되면 촛불을 켤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봉산동 대구 제일여자중학교 본관 앞에는 자라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와 산에 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부터 대구의 용두산 · 수도산 · 봉산 등은 화맥(火脈, 불기운)으로 이어져 있어 불이 자주 났다. 사람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 때문에 늘 불안에 떨었다. 그러던 중 고을 수령이 불이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눌러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라 모양으로 생긴 바위를 지금의 봉산에 두었더니 다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 산의 이름은 자래바우산 또는 자라바위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산에는 200년 전 아이가 없던 부부가 자라바위에 공을 드린 후 자라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도 한다. 이곳에서 달맞이를 하였기 때문에 월견산(月見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산을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순종(純宗) 때부터 정오(正午)를 알리기 위해 포(砲)를 발사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달성공원 자리는 옛날 달구벌(達句伐)의 성터였다. 이곳은 이 지방의 토착호족이었던 달성서씨(達成徐氏)의 세거지로 집터로서는 좋았으나 식수(食水)가 부족하였다. 성 밖에서 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을 겪고 있던 중 신령의 점지로 우물을 팠더니 맛이 좋고 찬물이 나와 이를 신령이 가르쳐 주어서 찾은 샘이라 하여 영천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고 이곳에 귀한 손님이 올 때마다 그 수효만큼의 잉어가 두레박에 담겨 나왔기 때문에 그 이름을 잉어샘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사업체는 총 1만 9865개로 7만 8034명이 종사하고 있다. 산업별로 살펴보면, 도 · 소매업이 9,153개소(46%), 종사자 2만 1892명으로 비중이 가장 높다. 그리고 숙박 및 음식점업이 2,784개소(14%), 종사자 8,034명, 제조업이 2,174개소(10.9%), 종사자 4,927명, 기타 공공수리 및 개인 서비스업이 1,768개소(8.9%), 종사자 4,258명, 사업서비스업 사업체수 927개소(4.7%), 종사자 7,045명 순으로 나타난다. 상업에 종사하는 업체가 총 사업체의 거의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많고, 그 이후로는 제조업과 서비스업 종사 비중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사자수 5인 이하의 업체를 제외한, 제조업 현황을 살펴보면 총 210개 사업체(9.7%)에 월평균 종사자수는 1,747명이며, 연간 생산액은 1375억 9700만 원이다. 종사자수 5인 이하의 업체를 제외한 사업체수가 중구의 총 제조업 업체수의 9.7% 밖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통해, 중구의 제조업체 대부분이 소규모의 영세 업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업체 중분류별 사업체수와 종사자수를 살펴보면 출판,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이 89개 소(44.3%), 종사자 702명으로 가장 많고, 봉제의복 및 모피제품업이 35개 소(16.1%), 종사자 342명, 가구 및 기타업이 18개소, 종사자 159명 순이다.
상업시설의 경우 일반시장이 18개소, 전문점 3개소, 백화점 3개소, 쇼핑센터 2개소가 13개 행정동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성내 1동이 총 10개소, 38.5%로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고, 전문점 3개소가 모두 성내 1동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대신동에 7개의 일반 시장이 집중 분포(26.9%)하고 있다. 이외에 대구시의 최대 번화가인 동성로, 중앙로, 반월당 일대에는 5개의 대형 백화점과 3개의 복합 쇼핑몰, 다양한 상점들과 영화관들이 밀집하고 있어 쇼핑뿐만 아니라 관광 및 위락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대구 지역을 대표하는 시장은 대신동 일원에 위치한 서문시장이다. 과거 조선시대 전국 3대 장터의 하나로, 조선 중기부터 대구경제의 축이 되어온 곳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물자조달 기능이 발달해 1669년(현종 10) 좌우도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되어 경상감영이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에 설치되면서 급속하게 발달하였다. 낙동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던 경상좌우도가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면서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교통과 육로교통이 함께 발달했고 이로 인해 많은 왕래가 이루어지면서 대구의 경제적 위치 또한 크게 부상되어 지금의 대신동 일대로 자리를 옮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한 성내동에는 떡집으로 알려진 염매시장과 약전골목으로 유명한 약령시 그리고 교동시장이 있다. 이 밖에도 중구는 대구광역시의 중심지답게 다른 구와는 도심의 번화가와 재래시장 그리고 특정 상업기능이 집적한 거리를 중심으로 16개의 명물거리가 지정되어 있다.
대구 지역의 금융중심지로 한국은행 대구총국을 비롯하여 25개 시중은행 지점, 27개 지방은행 지점, 14개 특수은행 등 총 66개의 은행과 증권 및 각종 보험회사 등의 금융기관이 집중하고 있다.
교통은 북구와의 경계선을 따라 경부선 철도가 통과하며, 대구광역시 지하철의 1호선과 2호선이 모두 통과하며, 봉산동에는 대구시의 유일한 1·2호선 환승역(반월당역)이 있고 시내버스 노선의 결절지로 대중교통의 요지이다.
중구는 역사적으로 대구뿐만 아니라 경북 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 것 외에도 쇼핑, 위락관광의 중심지이다. 역사관광지로는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달성공원이 있는데, 이는 원래 대구 지역에 위치하였던 옛 부족국가 달구벌의 토성인 ‘달성’일대를 공원화한 것이다. 대구 도심지역에 위치한 도시근린공원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희귀 거수목과 조경수, 넓은 잔디광장(26,446㎡) 그리고 사적지와 동물원이 있어 어린이 교육장과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오랜 기간 시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경상감영의 옛 터인 경상감영공원은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인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여 도심 직장인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며, 주위에 극장들이 몰려있어 상영시간을 기다리거나 쇼핑을 하는 사람들도 즐겨 찾는 휴식공간이다. 잔디밭과 분수 사이로 수목이 우거져 있고, 벤치도 충분히 마련되어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대구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관광지의 하나가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다. 1907년 1월 29일 서상돈이 대구광문사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꾸고 ‘담배를 끊어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곧 이어 800만 원의 성금을 내놓았다. 이어 광문사 사장 김광제가 즉각적인 실시를 주장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많은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기 위하여 중앙도서관과 동인지하주차장 사이에 4만 2509㎡의 면적으로 조성되었다. 공원 내에는 달구벌 대종, 종각과 이육사 · 박목월 · 조지훈 · 이호우 · 윤동주의 시비와 대형 영상시설, 이언적 · 김굉필 · 서거정 · 이황 · 정몽주 · 서상일 · 서상돈 · 이상화의 명언비가 위치하고 있다. 달구벌 대종은 지역민의 화합과 번영을 염원하는 대구시민의 뜻을 온 누리에 전하고자 1998년 12월 22일 건조 · 설치되었다. 그 외 2·28학생민주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2·28기념공원이 있다.
중구에는 대구시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특정한 기능이 밀집된 16개소의 ‘명물거리’가 지정되어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거리에서는 문화예술축제가 개최되어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봉산문화거리이다. 봉산동 대구학원에서 봉산육거리에 이르는 이 거리에는 30여 개의 화랑, 25여 개의 표구사 및 골동품점 등이 집적하고 있다. 몇몇 화랑이 입지하고 있던 골목이 문화예술의 거리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다. 대구를 대표하는 대구시민의 문화적 욕구를 수용할 만한 공간으로 이 화랑골목이 선정된 것이다. 현재 봉산문화거리에서는 1년 내내 작품전이 개최되며, 특히 봉산 미술제가 열리는 10월이면 거리는 온통 축제의 열기로 휩싸인다.
그리고 남성동 중앙파출소 맞은편의 과거 약령시 자리에는 한약방과 한의원이 밀집한 약전골목이 있다. 약 700m에 달하는 이 약전골목은 조선시대에 개설된 대구 약령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대구 약령시는 약재 수확기인 봄, 가을 한 해에 두 번 씩 열리는데 성시를 이룰 때는 대구 인구보다 약령시 출시자가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양약이 보급되고 일제의 탄압정책이 가중되면서 약령시는 점차 쇠퇴하여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근래 한약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약전골목은 옛 명성을 회복하고 있고 최근에는 약령시 회관이 건립되어 새롭게 활기를 띄고 있다. 이 회관은 3층 건물로 1층에는 한약재 도매시장이, 2층에는 약령시 전시관, 3층에는 전통문화공간이 있다. 또 젊은이들의 관광명소로는 야시골목이 유명하다. 이 골목은 삼덕동 고려양봉원에서 갤러리존을 거쳐 금융결제원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에 2, 3평 남짓한 자그마한 옷가게들이 빽빽하게 입지하고 있다. 야시(여우의 대구방언) 같은 아가씨들이 즐겨 찾는 골목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개성있는 다양한 옷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에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이들로부터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최근에는 의류 외에도 악세사리, 구두, 화장품, 란제리 코너가 생겨서 종합패션 상가로 변모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비디오방, 호프집, 노래방, 까페 등이 입지하여 쇼핑을 겸한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이 외에도 교동시장 내 전자골목, 동인동 찜갈비골목 그리고 동아쇼핑 뒤편의 떡집골목도 대구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