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1년(태조 4) 태조가 창건하였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가 나라의 번영을 빌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을 쉬게 하는 뜻에서 창과 방패를 부수어 절을 만들게 할 때, 그 일환으로 935년(태조 18) 이 절을 창건하고 남산종(南山宗)의 율승들로 하여금 머무르게 하였다.
946년(정종 1) 정종은 이 절에 불사리(佛舍利)를 봉안하였고, 성종은 서희(徐熙)의 병을 염려하여 이 절에서 기원하였으며, 1018년현종은 사리탑을 중수한 뒤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들어서 3,200인의 승려를 득도시켰다. 1042년정종이 태조의 휘신도량(諱晨道場)을 열었고, 1083년문종이 태자를 송나라에 파견하여 송판대장경(宋版大藏經)을 받아오게 한 뒤 이 절에 봉안하고 도량을 열었으며, 1087년 선종이 대장경경성법회(大藏經慶成法會)를 열었다.
또한, 예종은 선왕인 숙종과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영가를 이 절에 봉안한 뒤 매년 기일마다 찾아와 분향하였으며, 1179년명종이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를 열었다. 그러나 1233년(고종 23) 몽고의 침략으로 소실되어 90여년 동안 방치된 채 소규모로 명맥만 이어오다가, 1323년(충숙왕 10)에 남산종사(南山宗師) 목헌구공(木軒丘公)을 중심으로 한 승려들이 중창을 시작하여 1325년(충숙왕 12) 완공하였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조선 중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있었던 칠층고탑(七層高塔)은 민족 항일기에 개성박물관으로 옮겼는데, 그 때 탑 안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책이 발견되었으며, 7권의 말미에는 염승익(廉承益)이 지은 발원문이 있다. 또한 935년에 조성된 석등은 개성 역사박물관으로 이전 보관되었는데 보물급 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