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건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올렸다. 이 절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원래 흥국사(興國寺)라고 불렸다. 조선 초기에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이 안동부사로 부임한 뒤, 맹인이 많은 안동 지방에서 더 이상 맹인이 생기지 않도록 절의 이름을 개목사로 바꿔 불렀다고 전한다.
건물은 전툇간 5량(前退間五樑) 구조인데, 앞면은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만, 옆면은 앞쪽에 1칸의 툇간을 덧붙여 마치 유교건물인 대성전(大成殿)처럼보인다. 이전에는 가운데칸인 정간(正間)만 법당이었고, 좌우의 협간(夾間)은 돌방이었으며, 건물 서쪽에는 1칸반 규모의 부엌이 덧대어 있었다. 1969년에 해체하여 보수하면서, 방과 부엌을 모두 없앤 법당으로 바꾸었다.
건물은 막돌 위에 긴 돌을 쌓은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기단 윗면에는 둥글고 넓적한 자연석을 다듬지 않은 채 주춧돌로 놓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위에만 공포(栱包)를 둔 주심포(柱心包)식으로 결구(結構)되었다. 곧 기둥은 배흘림이 매우 약한 둥근 기둥인데, 앞면 평주(平柱)의 머리 부분에는 툇보[退樑]가 연결되었고, 대접받침인 주두(柱頭) 위에는 쇠서[牛舌]를 놓아 대들보[大樑]를 받치도록 하였다. 뒷면의 공포는 앞면의 공포와 달리 평주 중간쯤에 창방(昌枋)과 ‘십(十)’자형으로 교차되게 짠 짧은 살미[山彌]인 헛첨차를 두고서, 그 위에 이제공(二諸工)을 놓았는데, 초제공(初諸工)은 운두가 높은 살미로 되어 특이하다. 이제공은 행공첨차(行工檐遮)와 함께 짜여져서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치고 있으며, 쇠서는 모두 끝부분이 아래로 처진 수서[垂舌] 모양이다. 건물 안에는 조각이 선명하지 못한 보아지[樑奉]로 대들보를 받치게 하였는데, 대들보 위에는 포작(包作) 모양으로 세운 기둥인 포대공(包臺工)과 함께 휨이 적은 특이한 모양의 솟을합장(合掌)을 놓아서 종보[宗樑]와 중도리(中道里)를 받치게 하였다.
툇기둥[退柱]의 맨 윗부분에는 대접받침인 주두를 놓아서, 평주와 툇기둥을 연결하는 툇보,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주심도리(柱心道里)를 받도록 하였다. 도리 방향에는 창방을 생략한 대신 기둥 머리에 다포(多包)계 건물에서 주로 사용하는 둥근 모양의 첨차를 끼워서 주심도리 밑의 장여를 받치게 하였다. 툇기둥의 머리 부분은 쇠서로 처리되었다.
앞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정(井)’자 모양의 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정간은 4분합(四分閤)이고 좌우 협간은 2분합이다. 나머지 3면은 뒷면 북쪽 협간에 1짝의 정자살문이 달린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벽으로 처리되었다. 툇간의 바닥과 건물 안의 바닥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다. 건물 안의 가운데칸 뒷쪽에는 작은 불단(佛壇)이 마련되어 있는데, 불단 위에는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고, 뒤쪽의 후불벽에는 석가모니불을 그린 탱화가 걸려 있으며, 보살좌상 위에는 간략한 모습의 닫집이 설치되었다. 맞배지붕의 양쪽면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서 풍판(風板)을 달아 놓았다.
이 건물은 1969년에 보수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천순원년(天順元年)’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457년(세조 3)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변형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