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만월대 유적 ( )

고려시대사
유적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송악산 남쪽 구릉 지대에 있는 고려시대 명문 기와, 금속활자와 청자 · 경첩 등이 출토된 궁궐터.
유적
건립 시기
고려 전기
관련 국가
고려왕조
면적
390,000㎡
소재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개성 만월대 유적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송악산 남쪽 구릉 지대에 있는 고려시대 명문 기와, 금속활자와 청자·경첩 등이 출토된 궁궐터이다. 만월대 유적은 고려시대 국왕의 정치 공간이자 생활 공간으로 919년(태조 2)부터 1392년(공양왕 4)까지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던 궁궐 유적이다. 1973∼1974년에 걸쳐 발굴 조사되었고,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남북 공동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현재 북한 국보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의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송악산 남쪽 구릉 지대에 있는 고려시대 명문 기와, 금속활자와 청자 · 경첩 등이 출토된 궁궐터.
발굴경위 및 결과

만월대(滿月臺)의 전체 면적은 390,000㎡이다. 송악산 남쪽 기슭의 경사면에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조성된 만월대는 크게 ‘중심 건축군, 동부 건축군, 서부 건축군, 서북 건축군’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중심 건축군’은 궁궐 중앙부의 가장 높은 대지에 남북 방향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다. 신봉문터(神鳳門址), 창합문터(閶闔門址), 회경전터(會慶殿址) 앞 대형 계단, 회경전터, 장화전터(長和殿址), 원덕전터 (元德殿址) 등이 하나의 축을 이룬다. 동부 건축군은 중심 건축군을 기준으로 동편에 있으며 춘궁(春宮, 동궁)과 동지(東池)가 있는 지역이다. 궁성 내의 생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서부 건축군은 중심 건축군을 기준으로 서편에 위치하며 중심 건축군 축대 아래로 낮게 펼쳐져 있다. 2007년부터 진행된 남북 공동 발굴 조사 대상 지역이다. 서부 건축군 위쪽으로 서북 건축군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위로 궁궐의 정원인 금원(禁苑)이 자리한다.

만월대의 첫 발굴 조사 기록은 1954년 북한이 회경전(會慶殿) 전문(前門) 주변을 조사한 것이다. 이 조사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훼손된 만월대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1973~1974년 중심 건축군과 서북 건축군의 배치와 대략적인 지형을 확인하는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고, 이때 만들어진 도면은 이후 진행된 만월대 조사와 연구의 기준이 되었다. 1985년에는 궁성 동지의 못과 배수로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2년에 원덕전(元德殿)에 대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고, 1994년에 발굴 조사 보고가 발표되었다. 이후, 남과 북이 함께 2007년부터 2018년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서부 건축군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만월대는 전반적으로 지형이 동남쪽으로 향한 산기슭을 택하여 성벽은 야산 능선을 타기도 하고 벌판을 가로지르기도 하였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토성(土城)이 많고 흙과 돌을 섞어 쌓은 곳도 있다.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60일간 실시된 제1차 조사는 서부 건축군 33,000㎡에 대한 시굴 조사로 진행되었다. 전면 발굴 전, 서부 건축군 전체 유구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두 개의 지구로 나누어 남편(가 지구)은 북측 조사단이 북편(나 지구)은 남측 조사단이 조사하였다. 기준 축을 설정한 후 25m 그리드를 설치하고 북단과 동단을 연결하여 폭 1m의 ‘ㄱ’ 형 조사 갱을 통해 서부 건축군에 많은 건물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2007년 9월 3일부터 11월 16일까지 75일간 실시된 2차 조사는 서부 건축군의 북동쪽 1건물지군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1건물지군은 당시 확인된 부분 중 규모가 가장 큰 건물지군으로서, 전체 7개의 건물지가 일곽을 이루고 있었다. 회랑식(回廊式) 건물이 중심의 1-1호 건물지[아(亞)자형 건물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건물지군의 북쪽은 대형 축대를 쌓아 올려 경계로 삼았고, 남향으로 계단과 문을 배치, 주변으로 이동이 원활하도록 하였다.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50일간 실시된 제3차 조사는 본래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11월이 되어서야 발굴 조사가 진행될 수 있었다. 조사 지역은 서부 건축군의 북쪽 중앙에 위치하는 2‧3건물지군을 대상으로 하였다. 2건물지군은 동서 32m의 규모로 중심 건물지(2-1호 건물지)를 세 개의 건물이 동 · 서 · 남쪽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중심 건물지는 내부에 벽이 설치된 특수한 용도의 건물로 추정된다. 3건물지군의 중심인 3-1호 건물지는 제1차 시굴 조사 때 주목한 장소였다. 제3차 조사를 통해 고려 국왕들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경령전(景靈殿)임이 밝혀졌다.

2010년 3월 23일부터 5월 18일까지 57일간 실시된 4차 조사는 제1차 시굴 조사 지역의 중앙에서 확인된 건물지군과 1‧2‧3건물지군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먼저 서부 건축군 중앙의 건물지군 중 남과 북을 추정 건덕전(乾德殿) 구역으로 파악하고 평면 구조를 살폈으나, 파괴가 심해서 기단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서부 건축군의 조성 방법과 현재까지의 변화 과정을 확인하고자 1‧2‧3건물지군에 대한 토층 조사도 실시하였다. 탐색 갱을 설치해 각 건물지군이 자리하고 있던 지형을 확인하였고, 조사 결과 현재 건물지군의 아래에 선대 유구의 존재를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고려 궁궐이 여러 차례 개축(改築)되었음을 고고학적으로 규명하였다.

2011년 11월 14일부터 12월 20일까지 37일간 실시된 발굴 중 여름 폭우로 인해 만월대의 일부가 훼손될 위험에 놓이자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에 대한 안전 진단과 긴급 복구 조사로 제5차 조사가 진행되었다. 1건물지군의 남쪽 석축과 건물지 보존 조치를 중심으로 석축 이탈 예방, 주변 유구의 유실 여부에 대한 긴급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일부 석축의 이탈 위험성이 높은 구간도 있었지만, 석축 서쪽으로 자리한 4건물지군 내 건물지 8개소에서는 다행히도 폭우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다. 복토 등 유적의 추가적 보존 조치를 시행하였다.

2014년 7월 22일부터 8월 16일까지 26일간 실시된 제6차 조사는 서부 건축군 4건물지군 남쪽의 중심 건축군과 연결 지점인 5건물지군에 대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형 계단 2개소와 더불어 이들과 연결되는 문지를 확인하였으며, 대형 계단의 주변으로 총 4개의 배수로도 발견되었다. 제1정전인 회경전이 자리하는 중심 건축군과 제2정전인 건덕전이 자리하는 서부 건축군 사이의 이동 및 배수 체계를 규명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한 것이다.

2015년 6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183일간 이루어진,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 중 6개월이라는 가장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제7차 조사는 서부 건축군 1‧2‧3‧4건물지군 남쪽 지역인 5‧6‧7‧8건물지군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2007년 제1차 시굴 조사 당시 확인한 비좌(碑座)를 비롯하여 경령전 일곽(一廓)과 통행하기 위한 대형 계단 및 이와 연결된 회랑, 2014년 조사한 대형 계단의 서쪽으로 이어진 보도와 문지(門址), 남북 방향으로 조성된 건물지와 이를 둘러싼 대형 회랑, 우물 등 다양한 유구를 확인하였다. 또한, 제7차 조사 막바지에 금속활자 1점(嫥, ‘전일할 전’으로 추정)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8년 10월 22일부터 12월 10일까지 50일간 실시된 제8차 조사는 회경전과 장화전(長和殿) 사이 중심 건축군의 축대 구간을 대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다. 발굴 구역은 서부 건축군과 중심 건축군에 걸쳐 있다. 서부 건축군 지역에서 2014년 제6차 조사에 이어 중심 건축군과 서부 건축군 사이의 이동 및 배수 체계를 규명할 수 있는 대형 계단을 추가로 조사하였다. 대형 계단의 계단석 아래로는 배수로를 설치해 중심 건축군의 빗물이 효과적으로 흘러내리게 한 것을 확인하였다.

형태 및 특징

황성유적(皇城遺蹟)은 동벽 · 남벽 · 서벽 · 북벽 등 네 벽과 성문지가 발굴 조사되었다. 동벽은 만월대의 동쪽 성벽으로 북에서 남으로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곧게 뻗었다. 대부분 토성으로 되어 있는 성벽은 군데군데 끊어져 있는데, 성문지(城門址)로 추정된다. 성문지는 동벽의 북쪽과 동쪽 한가운데에 각각 하나씩 있고, 남쪽에는 광화교(廣化橋) 자리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벽은 만월대 남쪽 성벽으로 그동안 변동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이 성벽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갔다가 남쪽 방향으로 꺾였다. 이 부근에서 야산의 능선은 낮아지고 서쪽에서 뻗어온 큰 고개의 줄기와 작은 고개의 줄기가 야산 위에서 서로 합쳐진다. 남벽의 가운데에 주작 고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아마 주작문(朱雀門)이 있었을 것이다.

서벽은 만월대의 서쪽 성벽으로 송악산 줄기의 한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서 눌리문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갈라진다. 성벽은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오정문[옛 선의문(宣義門)]에 이르는데, 이것이 개경성(開京城)의 나성(羅城) 성벽이다. 만월대의 서쪽 성벽은 개경성의 나성 성벽과 일치한다.

북벽은 만월대의 북쪽 성벽으로 높지 않은 야산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자그마한 골짜기를 막아서 성을 이루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다. 야산의 동쪽은 구야골이라고 하는 골짜기를 막았다.

성벽은 이 골짜기와 마주치는 곳에서 끊어졌다가 다시 동으로 뻗었다. 서쪽은 쌍폭동(雙瀑洞)에서 일단 끊어졌다가 다시 황성 서벽과 잇대어진다. 성문지의 경우 동쪽 골짜기와 서쪽 쌍폭동 그리고 쌍폭동에서 다시 서쪽으로 뻗은 성벽 줄기에 조그마한 문터가 있다. 만월대 내에는 궁전들을 둘러쌓은 궁성도 있지만,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궁성 북쪽은 황성 북벽과 조금 떨어져 터만 남아 있다. 서벽은 북쪽으로부터 야산을 따라 서남쪽으로 토성벽이 뻗어 있다. 성벽은 광명천을 가로질러 가마물과 서화문(西化門) 터를 지나 삼성골 서쪽에 이른다. 남벽은 터만 있을 뿐 그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궁성 동벽은 여정궁(麗正宮)의 일부가 남아 있고, 동쪽으로 드나드는 문설주로 썼던 돌기둥 2개와 그로부터 드나드는 곳에 설치한 계단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부터 남으로 뻗은 성벽은 흙담벽 형태로 광명천에 이른다.

궁전의 정문인 숭정문(崇政門)은 정남향으로, 숭정문을 들어서면 동서 좌우에 동락정이 있고 앞마당인 구정(毬庭)이 있다. 구정의 동쪽에는 춘덕문(春德門)이 있는데, 이 문을 통해 왕세자가 살던 여정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구정의 서쪽 태초문(太初門)은 건덕전으로 통한다.

구정에서 곧바로 북쪽으로 나가면 궁성의 둘째 대문인 신봉문(神鳳門)에 이른다. 신봉문은 남북 너비 18.5m, 동서 너비 약 32m의 축대 위에 전면 7칸, 측면 5칸으로 된 2층 다락형의 대문이다.

신봉문을 지나 북쪽으로 나가면 셋째 대문인 창합문(嗽闔門)에 이른다. 창합문은 전면 5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창합문을 지나면 19m 높이의 가파른 언덕에 회경전 전문이 있다. 회경전 전각은 현재 축대의 한가운데가 한단 높고 남쪽으로 약간 내밀고 있다. 회경전 전체 규모는 전면 9칸, 측면 4칸이다. 회경전 북쪽에는 장화전(長和殿) 터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회경전과 비슷하다. 장화전의 북쪽에는 문덕전(文德殿)이 있다.

만월대 궁성의 중심 건축군의 서쪽은 왕이 일상적으로 살았던 중광전(重光殿)을 비롯한 여러 궁전들과 내전에 해당되는 궁전들과 편전들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중심 건축군의 동쪽 북부는 왕세자의 궁전이 있었던 여정궁이 있고, 그 남쪽에는 3성 6부(三省六部)들이 있었던 건물지가 있다. 그리고 궁성의 북쪽으로 금원(禽苑)이 있었다. 1985년 고고학연구소가 만월대 못 유적과 만월대의 동쪽 지하 하수도 시설을 발굴 조사하였다.

2008년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남측의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과 남북역사학자협의회, 그리고 북측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민족화해협의회와 공동으로 이루어진 개성 고려 궁성(만월대)에 대한 제3차 남북 공동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1차 시굴 조사에서 일부 확인된 경령전과 주변 건물들의 정확한 규모 및 배치 상태를 확인하였다. 구체적인 발굴 성과는 다음과 같다.

건물 내부에서 5개의 예단(禮壇) 기초 시설이 확인된 경령전(17호 건물지)은 동서 2,267㎝, 남북 1,015㎝의 장방형 기단(基壇)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건물 남편에는 3개의 문과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남편을 제외한 3면은 바깥쪽 초석열(礎石列)을 따라 벽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예단의 후벽과 양측 벽에 별도의 시설(御眞)을 걸거나 벽화를 그리기 위한 시설을 하기 위한 용도로 판단된다.

경령전 남편에서 나란하게 노출된 18호 건물(기단 크기: 동서 1,880㎝, 남북 1,008㎝, 정면 3칸×측면 3칸)은 건물의 정면과 양 측면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건물 주위에 청석(靑石)을 방형(方形)으로 잘라 만든 전(塼)을 깔아 놓았다. 특히 이 건물 남편에서 길이 200㎝, 너비 90㎝ 크기의 석제 기초 시설이 동서 대칭으로 2개소 확인되었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내부를 낮게 파낸 점으로 미루어 보아 석물(石物) 등을 놓기 위한 기초 시설로 판단된다.

한편, 이번 조사 지역의 전체적인 평면 배치 형태는 송악산에서 남북 방향으로 경사져 내려오는 구릉에 2개의 동서 방향 축대(높이 약 4m)를 쌓아 계단식 평탄면을 조성한 다음 경령전을 비롯한 중요 건물을 세우고, 그 주위를 회랑식 건물로 에워싼 폐쇄적인 구조임이 확인되었다. 이는 경령전 일곽이 제례(祭禮)를 위한 특수 공간이므로 여타 생활 공간과 분리한 것으로 이해된다.

의의 및 평가

2007년 5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고려 궁성 중심 건축군의 서쪽 33,000㎡에 대한 시굴 조사를 남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2018년도까지 궁성에 대한 총 8차례의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개성 고려 궁성에 대한 그간의 조사를 보면 제1~7차는 서부 건축군에 대한 조사였고, 2018년의 제8차 조사는 이전과는 달리 중심 건축군에 대한 조사였으며, 선경전(회경전)과 장화전 사이 중심 축대 구역이었다.

만월대 지역의 발굴 성과는 2007년 조사 지역 전역에 대한 시굴 조사를 통해 대체적인 건물의 배치 양상을 이해하게 되었고, 계속된 연차 발굴을 통해 다수의 건물지, 축대, 배수 시설, 계단 등의 규모와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으며, 경령전과 같은 일부 건물은 그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금속활자, 청자, '赤項(적항)○○', '德水(덕수)○○', '板積(판적)○○', '月盖(월개)○○'가 새겨진 명문와(銘文瓦), 문고리 · 경첩 등 약 3,000여 점을 수습하어 실물 자료가 부족한 고려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단행본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조선유적유물도감』(1980)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시굴조사보고서(2008)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2009)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Ⅰ(2012)
국립문화재연구소, 『고려도성 기초학술연구』1(2013)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Ⅱ(2015)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남북공동 발굴조사보고서』Ⅲ(2020)

논문

개성발굴조사단, 「개성만월대의 못과 지하하수도시설물에 대한 조사발굴보고」(『조선고고연구』 1986년 3호, 사회과학출판사, 1986)
남창근, 「고려 본궐 만월대 주요전각 위치와 배치체계」(『중앙고고연구』 32, 중앙문화재연구원, 2020)
박지영, 「고려궁성(만월대) 출토 청자로 본 건물지군의 성격」(『한국사학보』 79, 고려사학회, 2020)
유부현, 「개성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의 가치」(『한국사학보』 79, 고려사학회, 2020)
정찬영, 「만월대유적에 대하여 Ⅰ」(『조선고고연구』 1989년 1호, 사회과학출판사, 1989)
홍영의, 「개성 고려 궁성 출토 명문기와의 유형과 요장」(『개성 고려 궁성 남북발굴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기타 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년 개성 고려궁성(만월대) 발굴조사 성과 발표문」(2008)
남북한역사학자협의회, 『고려 도성 개경 궁성 만월대』(개성 만월대 남북공동조사 성과 학술회의 자료집, 2019)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디지털기록관(http://www.manwoldae.org/front/main.do)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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