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10칸, 측면 4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기와지붕건물. 세종 때 집현전으로 쓰이던 건물로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때 재건되면서 건물 명칭이 바뀌었다.
근정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회루의 바로 남쪽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세종 때에는 여기에 왕실의 도서를 비치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이 주야로 글을 읽었다.
세조 때 예문관이 되었다. 1867년(고종 4)에 재건되어 한때는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군국기무처 청사로 쓰이기도 하였으나 기관이 폐지되면서 그 용도가 계속되지는 않았다. 1895년 1월에는 내각의 청사로 이용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민족관으로 임시로 이용된 적도 있다.
지금은 건물 한채만 홀로 남아 있으나 고종 때에는 주변에 200칸 가까운 행각(行閣)들이 있었고, 이웃하여 대전장방(大殿長房) · 내반원(內班院) · 수라간(水刺間) · 정원(政院) · 빈청(賓廳) · 선전관직방(宣傳官直房) · 검서청(檢書廳) · 옥당(玉堂) · 약방 · 의관방(醫官房) · 내각(內閣) 등의 전각들이 영추문(迎秋門)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 주변 건물은 1910년 이후 일본인들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건물은 높고 넓은 월대(越臺 :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사분합의 창이 설치되고 겹처마에 지붕 각 마루에는 취두(鷲頭 : 매 머리모양의 장식) · 용두(龍頭) · 잡상(雜像)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의 형태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궁실의 격식을 취하고 있으며, 경복궁내의 얼마 남지 않은 목조 유구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