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光山)김씨. 아버지는 근수(謹殊)이다. 어려서 가세가 몰락하여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에 있는 친척집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사서삼경을 배운 뒤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의 배양학교(培養學校)에 입학하여 한문을 공부하였다.
191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덕유산 등지에서 의병대장으로 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나, 국권이 상실되자 출가를 결심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2년 동안 은거하다가 27세에 건봉사(乾鳳寺)에서 연호(蓮湖)를 은사로 삼아 사미계(沙彌戒)를 받은 뒤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였다.
그 당시 조실(祖室)로 있던 설파(雪坡)의 자극을 받고 하루 세 시간만 자면서 3년 동안 노력한 결과, 대교과(大敎科)와 수의과(隨意科)를 모두 마쳤다. 그 뒤 능허(陵虛)의 법을 이어받은 후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사(摩訶衍寺)에서 수선(修禪)에 몰두하였는데, 이 때 나한(羅漢)과 대화하고 서기(瑞氣)를 방광(放光)하는 등 많은 이적(異蹟)을 보였다.
1923년 유점사(楡岾寺)·건봉사 등지에서 경법을 공부하다가 38세에 대강백(大講伯)이 되어 유점사 불교전문강원의 조실로 2년, 건봉사 불교전문강원의 조실로 3년을 지내면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939년 4월 일본의 불교를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1939년 10월에는 건봉사 주지로 임명되어 승려들의 기강 확립과 사찰 수호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매년 소집하는 31본산 주지회의에서는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면전에서 큰소리로 그의 오만한 태도를 꾸짖었고,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가 운영난으로 매도 직전에 처했을 때는 그 부당성과 인재의 양성을 역설하여 학교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광복 후 건봉사 주지로 3선 되었으나 북한의 불교 탄압으로 월남하여 계룡산 신도안에 은거하던 중, 동학사(東鶴寺) 주지 송덕윤(宋德潤)의 청에 따라 1953년 동학사에 비구니 불교전문강원을 설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953년 8월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나이 85세, 법랍 58세로 입적하였다.